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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맞은 단풍은 꽃 보다 붉지 않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가을에는 여름보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적어 높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 먼지나 수증기 같은 부유물이 많으면 태양의 백색광을 대부분 산란시켜 희뿌연 색의 하늘이 된다. 하지만 부유물이 적은 가을 하늘에서는 푸른빛만 많이 산란돼 높고 먼 쪽빛 하늘이 된다. 그리고 이 맑은 하늘에 노을이 지면 시인의 표현대로 “먼 산에 부딪쳐 타는 눈부신 석양”(遙山唐突夕陽明)을 볼 수 있다. 쪽빛 하늘과 붉은 석양, 여기에 선홍색 단풍은 가을을 완성하는 정취다.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물드는 단풍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시에서

숲 정자에 가을 저무니,
나그네 시정(詩情)은 그지 없어라
먼 강물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단풍잎(霜楓) 하늘에 붉다

고 읊었다. 고려 때의 학자인 이장용(李藏用, 1201-1272) 또한

한 이파리 바스락 지는,
밤 소리에 깜짝 놀라,
천산(千山)의 푸른 숲들,
문득 서리 내린 아침에 상기됐네

라고 했다. 모두들 가을 정취의 대명사인 단풍을 노래한 것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처럼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길로” 가고 있는 가을의 색깔.

여름내 잎들은 푸르렀다. 그들의 푸르름을 지켜주었던 것은 잎 속의 엽록소. 그러나 가을이 돼 식물들이 겨울 준비를 하면서 잎으로 오는 수분과 영양분이 줄어들면, 엽록소는 조금씩 파괴되고 잎은 푸른색을 잃어간다. 이때 엽록소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동안 엽록소의 푸른색에 가려져 있던 잎 속의 카로틴과 크산토필이라는 노란 색소가 모습을 드러내 잎은 노랗게 변해간다. 공해 묻은 도심에 한순간 수놓고 져 가는 노란색 은행잎도 이렇게 만들어진다.

노란 색보다는 붉은 색 단풍

하지만 옛사람들이 노란 단풍보다는 붉은 단풍을 윗길로 치고, 언제나 시정의 출발은 붉은 단풍이었다. 왜인가. 시인들의 눈에는 잎사귀 안에서 붉은 색을 새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식물들의 노력이 보였던 것은 아닌지. 붉은 색 단풍은 엽록소가 사라지면서 원래 잎 속에 있던 색소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잎이 안토시아닌이라는 새로운 색소를 만들어 붉어진다. 노란 단풍은 저절로 노랗게 된다고 할 수 있지만 붉은 단풍은 노력이 있어야 붉어지는 것이다.

안토시아닌은 탄수화물이 많을수록 많이 만들어진다. 탄수화물이 많이 쌓이려면 낮에는 잎이 광합성을 왕성하게 하고, 밤에는 호흡을 적게 해서 이미 만들어 놓은 탄수화물을 조금 소비해야 한다. 그러니 낮에는 햇볕이 많이 들고 밤에는 시원하면서 밤과 낮의 온도차가 많이 나야 한다. 가을에 사과가 익으면서 열매의 위쪽이 먼저 붉어지는 것은 위쪽이 햇볕을 많이 받아 탄수화물이 많이 만들어지고 이곳에서 안토시아닌이 많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붉은 단풍이 곱고 진하게 들려면 일교차가 크고 햇빛이 많은 날씨가 돼야 한다. 그러나 밤낮의 온도차가 너무 심하면 단풍의 색이 곱지 않은데, 우리보다 건조한 기후인 유럽의 단풍이 예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는 밤낮의 온도차가 너무 크게 나지 않으면서 기온이 서서히 내려가므로 안토시아닌의 생성에 최적의 조건이다. 금수강산이자, 화려강산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들의 오해

한편, 사람들은 단풍을 묘사할 때 꼭 서리와 연관시키고, ‘서리를 맞아야 단풍이 든다’고 생각한다. 율곡의 시나 이장용의 시에서도 단풍과 서리는 함께였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목(杜牧)의 ‘산행’(山行)이라는 시에 나오는 “서리 맞은 잎사귀가 2월의 꽃보다 붉다”(霜葉紅於二月花)는 구절은 이들보다 더욱 잘 알려진 경우다.

‘단풍은 서리가 내린 후에 든다’는 속설은 과학적으로 보면 조금 잘못된 것이다. 서리는 기온이 빙점 아래로 떨어질 때 공기중의 수증기가 지면에나 주변 물체에 붙어 응결된 얼음 결정이다. 가을이 되면서 밤 기온이 떨어져 영하로 내려가면 처음에는 물방울이 맺혀 이슬이 된다. 하지만 점차 온도가 더 내려가면 이슬이 얼어서 서리가 된다. 가을 절기인 백로(9월 8일 경), 한로(10월 8일 경), 상강(10월 23일 경)이 이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백로는 ‘흰 이슬’이라는 뜻이니 이때부터 밤기온이 낮아져 이슬이 맺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로는 ‘찬 이슬’이라는 뜻이니 온도가 더 내려가 서리가 되기 직전의 찬 이슬이다. 드디어 상강은 ‘서리가 내림’이니 10월 하순이 돼 기온이 영하로 많이 내려갔음을 알 수 있다.

지역의 고저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 단풍은 대체로 9월 하순부터 11월 상순까지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물들어 가는데, 첫서리는 평지의 경우 중부지방에서 10월 하순, 남해안 지방은 11월 10일 경에 내린다. 서리가 내리는 시기와 단풍이 드는 시기가 거의 겹쳐 있어서 그런 오해가 생긴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붉은 단풍들은 서리가 오기 전에 든다.

단풍이 들기 전에 서리를 맞으면 잎사귀가 얼어버려 색이 제대로 들지 않고 잎이 죽어버린다. 단풍은 갑자기 색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햇볕을 잘 받는 쪽부터 노랗게 됐다가 다시 붉은 색이 첨가돼 오렌지색으로 변한 다음, 끝내는 완전히 붉어지는 과정을 밟는다. 이렇게 서서히 변하는 과정을 잘 밟아야 곱고 예쁜 단풍이 되는데, 중간에 서리가 내리면 잎이 다 죽고 색은 누렇게 떠버린다. 2월의 꽃보다 붉을 정도로 진하고 고운 단풍은 ‘서리맞은 단풍’(霜葉)이 아닌 것이다. 다만 서리가 내린 아침의 쌀쌀함 때문에 문득 완연한 가을 기운을 느끼면서 바라본 먼 산이 이미 붉어져 있음을 깨달았던 것뿐이다.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옛말이 있다. 하지만 성장(盛裝)의 시절을 정리하는 나뭇잎에 서리가 내리면 고운 단풍이 들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에도 서리 같은 원망이 남아있다면 그 빛은 곱지 못할 것이다. 푸른 하늘과 저녁 노을, 색색의 단풍들이 설레임과 추억으로 물드는 가을. 다만 용서와 사랑으로 서서히 물들어, 꽃보다 붉은 시인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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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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