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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세종기지 특명

임기 내에 끝내라!


세종기지에 설치된 명패.


남극은 지구에서 마지막 남은 ‘주인 없는’ 땅이다. 이곳에는 석유, 금속자원 등 엄청난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다. 그러므로 이를 차지하려는 열강들의 다툼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6월 23일 발효된 남극조약은 이러한 다툼을 막아보자는 데 있었다.

남극조약의 약점은 어떤 국가의 영유권도 인정하지 않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는 점. 남극조약이 발효된지 30년이 지나면 영유권을 다시 논의할 수 있다는 조항이 분쟁의 불씨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극조약이 발효됐지만 나라마다 남극대륙이 자국의 땅임을 암시하는 공식, 비공식 노력들을 기울였다. 나중에 영유권 분쟁이 일어나면 조금이나마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아르헨티나는 1955년부터 남극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자국민들에게 장려했다. 칠레는 대통령이 수시로 방문하면서 그곳에 거주하는 군인들을 격려했고, 나중에는 아예 군인가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그래서 칠레기지에는 은행, 우체국, 학교, 병원 등 없는 게 없었다. 이 밖에 영유권을 주장하는 나라들은 저마다 남극기지를 건설하고 우표, 기념품 등에 자국 영토임을 공공연하게 표시했다.

우리나라가 남극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78년 12월 수산청에서 남빙양의 크릴을 시험조업하면서부터다. 그러나 몇차례의 조업에 불과했다. 본격적인 관심은 1985년 11월 한국해양소년단연맹이 문화방송(MBC)과 공동으로 한국 최초의 남극탐험을 시도하면서 비롯됐다.

해양소년단이라면 그리 큰 단체가 아니다. 그런데 1985년 4월 제5대 총재로 윤석순씨가 임명되면서 큰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남극 개척의 1등공신이라할 수 있는 윤석순씨는 어떤 사람인가.

윤석순씨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총무국장을 지내다 1980년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여기에 합류해 민정당 창당작업을 도왔다. 그 공로로 1981년 민정당 사무차장과 제11대 전국구의원이 됐다. 그런데 1985년 다시 국회에 들어가지 못하자 해양소년단 총재가 된 것이다.

이만한 경력으로 남극탐험을 시도하기엔 역부족.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힘이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과 사돈지간이었던 것. 형 윤광순씨의 장남 상현군이 대통령의 외동딸 효선양과 결혼한 것이다. 게다가 1995년 전두환 비자금사건에서 드러났듯이 형은 한국투자신탁 사장으로 근무하면서 1천억원이 넘는 전두환씨의 비자금을 관리해줄 만큼 신망이 두터웠다.

윤석순씨는 보잘 것 없는 해양소년단연맹의 총재였지만 그동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최초의 남극 탐험을 추진했다. 원래 계획은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줄 요량으로 남극대륙의 최고봉인 빈손 매시프(5천1백40m)를 정복하려고 했다. 그런데 외무부에서 이를 허락하기 앞서 이왕이면 과학자들을 데려가 과학탐사도 해보라고 권유했다.

해양소년단은 급히 자원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해양연구소에 공문을 보냈다. 그런데 규모가 컸던 자원연구소에서는 층층시하(層層侍下) 의견을 조율하다보니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답변이 온 곳은 과총회관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해양연구소(1990년 현 한국해양연구소로 독립해 경기도 안산에 자리잡음)였다. 이는 훗날 남극과학기지를 해양연구소에서 운영하게 된 계기가 됐다. 재정이 넉넉치 않았던 해양연구소는 해양소년단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지질학자인 장순근 박사와 기상학자인 최효 박사를 파견했다. 국가 연구기관이 소년 단체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윤석순 총재를 단장으로 한 남극탐험대는 1985년11월29일 영하 42℃에서 세계에서 6번째로 빈손 매시프봉을 정복했다. 두명의 과학자는 킹조지섬에서 야영하면서 남극 자연환경을 관찰하고, 다른 과학기지들을 방문했다.

1985년의 남극탐험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남극조약 가입을 추진했다. 유엔가입국의 경우에는 원하면 자동 가입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당시 유엔에 가입돼 있지 않아 남극조약 협의당사국 전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북한이 남극조약에 동시에 가입하겠다고 나섰다. 여기에다 북한과 가까운 옛소련(러시아), 중국, 폴란드 등이 있어 걸림돌이 됐다. 결국 한차례의 남극탐험 경험을 인정받아 우리나라는 1986년 11월 28일 세계에서 33번째로 남극조약에 가입했고, 북한은 1987년 1월 21일 그리스에 이어 35번째 남극조약 가입국이 됐다.

남극조약 가입에 혁혁한 공을 세운 외무부는 1987년 1월 신년업무보고에서 남극기지 건설을 제안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임기 내에) 건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부터 남극기지 건설계획은 과학기술처가 맡아 일사천리, 주마가편으로 추진했다.

남극과학기지 후보지는 남극대륙에서 조금 떨어진 킹조지섬 남서쪽 (남위 62도 13분, 서경 58도 45분)으로 결정됐다. 한차례의 남극탐험 때 가본 곳이란 이곳 뿐이었다. 그리고 남극에 여름이 찾아오는 12월 16일부터 남극기지 건설이 시작됐다. 다른 국가에게 눈치는 보이지만 주인없는 땅에 울타리를 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두달 뒤인 1988년 2월 17일 남극과학기지가 완성돼 준공식을 가졌다. 이름은 공모에 의해 세종기지로 정해졌으며, 그곳에는 ‘남극의 한국 세계의 평화, 대통령 전두환’이란 휘호가 걸렸다. 그로부터 8일 후인 2월 25일 아침 전두환 대통령은 친구인 노태우씨에게 청와대를 넘기고 8년 동안 누렸던 권좌에서 내려왔다.

만약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 내’라는 조건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 국토 밖의 유일한 연구기지인 세종기지의 건설은 오래 걸렸거나 아예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더 잘돼 남극대륙에 자리잡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1996년 8월 새로 생긴 해양수산부는 9월 5일 이러한 한을 풀겠다며“2000년까지 남극대륙에 제2의 남극기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를 추진하라고 한국해양연구소에 지시했다.

그러나 이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예산을 뒷받침해 줄 후원자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세종과학기지를 두고 과학기술부와 해양수산부 사이의 신경전도 있었다. 성격상 과학기술부에 속하나 해양연구소가 해양수산부로 넘어가면서 덩달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속에 탄생한 세종기지는 지난 10여년 동안 경제적인 측면에서 실익이 없다는 비판과 외풍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남극생태, 고층대기, 지질 등 극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추위와 외로움 속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아니었던들 우리나라에서 극지환경을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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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동아일보 조사연구팀
  • 홍대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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