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담배가 최근 국내외 이슈의 중심이 됐다. 발단은 미국이다. 미국에서 액상 전자담배가 원인으로 의심되는 중증 폐 질환 환자가 1500명에 달했고, 3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10월 17일 기준). 사망자는 대부분 50대 이상이었지만, 전체 환자의 3분의 1 이상은 21세 미만이었다. 미국 뉴욕주, 워싱턴주 등은 가향 성분이 든 전자담배 판매를 금지했다. 국내에서도 10월 14일 첫 액상 전자담배 폐 질환 의심사례가 접수됐다.
남자 청소년 흡연자 중 68.3% 가향담배 피워
본디 담배 연기는 굉장히 독하다. 식물의 잎을 태운 연기를 그대로 빨대로 흡입한다고 생각해보라. 하지만 현재 국내에서 판매되는 담배에서는 그런 거부감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담배는 갖가지의 유혹적인(?) 맛으로 뒤덮여 있다.
담배를 거부감 없이 필 수 있게 된 건 담배에 수많은 첨가물을 들이부었기 때문이다. 기관지를 무디게 만들어 더 많은 담배 연기가 폐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첨가물, 체내 니코틴 대사 과정을 느리게 해 혈중 니코틴 농도를 높게 유지하게 만드는 첨가물, 담배가 탈 때 재가 흩날리지 않게 하는 첨가물 등 종류도 다양하다. 모두 흡연자들이 담배를 계속 피우도록 유도하는 물질들이다. 신호상 공주대 환경교육과 교수는 “음식을 맛있게 느끼도록 조미료를 잔뜩 넣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최근 문제가 된 가향 성분은 그런 첨가물 중 하나다. 담배 특유의 독한 냄새를 감춰주고 향긋한 냄새를 풍기게 해준다. 이런 가향 성분이 실제로 신규 흡연자를 유도하고 흡연을 지속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국내외 연구 결과에서도 확인됐다.
2017년 김희진 연세대 역학건강증진학과 교수팀은 청소년과 청년층에 해당하는 13~39세 흡연자 9063명을 대상으로 가향담배 사용실태를 조사했다. 그 결과 젊은 흡연자 중 65% 정도가 가향담배를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13~18세의 남성은 68.3%, 19~24세의 여성은 82.7%가 가향담배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흡연 시작 연령에 해당하는 남성 청소년과 젊은 여성의 사용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가향담배가 흡연을 계속 유도한다는 결과다. 김 교수팀의 조사에서 흡연 경험자의 70% 이상은 담배의 향이 흡연을 처음 시도하는 데 큰 영향을 줬다고 답했다. 가향담배의 향이 마음에 들 뿐만 아니라 연기를 들이마실 때 불편함을 없애 주고, 몸에도 덜 해롭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가향담배로 흡연을 시작해 조사 시점까지 계속 가향담배를 흡연한 경우는 70%에 가까운 반면, 일반담배로 시작해 계속 일반담배를 흡연한 경우는 40% 수준에 머물렀다.
연구팀은 “일반담배 연기의 거칠고 불편한 자극적인 특성은 초기 흡연 시도 단계에서 장벽으로 작용하는데, 가향담배는 이런 자극적 특성을 숨긴다”며 “일반담배보다 흡연을 쉽게 시도하게 만들고, 흡연을 유지하도록 유인한다”고 분석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을 통해 ‘담배 제품의 맛을 향상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성분의 사용을 금지 또는 제한하도록 규제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브라질은 2012년부터 모든 담배 제품에 가향 물질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으며, 미국과 캐나다의 일부 주와 유럽연합(EU) 등은 가향담배의 판매를 제한하거나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질병관리본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가향 물질의 규제 방안을 마련해 입법을 추진 중이며, 아직 정부 차원의 규제는 없다.
뉴욕주 등 가향 전자담배 판매 중단
미국에서 액상 전자담배가 원인으로 의심되는 폐 질환자의 수가 급증했지만, 폐 질환의 직접적인 원인이 전자담배의 성분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전자담배의 여러 성분이 원인 물질로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신 교수는 “미국에서 이를 분석하는 관계자에 따르면 원인 분석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시일이 꽤 오래 걸릴 것 같다”며 “100% 확신이 들 때까지 원인을 지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가 빠르게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미국 정부가 이처럼 신중한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과거 담배의 유해성을 지목했을 때 대형 로펌을 앞세운 담배회사로부터 빈번하게 소송을 당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질병관리본부에서 궐련형 전자담배가 일반담배보다 타르가 더 많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가 대형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 인터내셔널에게 즉각 소송을 당했고, 이를 둘러싼 공방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신 교수는 “조사 결과에 따라 담배회사와 분쟁이 생길 수 있는 만큼 인과관계가 명확히 드러날 때까지 발표를 미룰 것”이라고 말했다.
대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 없는 미국 주정부들은 가향 성분이 들어간 액상 전자담배 판매에는 제동을 걸었다.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가향 전자담배는 청소년을 겨냥한 것”이라며 10월 17일부터 일반담배 향과 멘톨(박하) 향을 제외한 가향 성분이 들어간 모든 액상 전자담배 판매를 즉각 중단시켰다. 뉴욕주 외에 미시간주, 워싱턴주 등도 이 같은 조치를 단행했다.
전자담배 성분 공개 안 되는 게 문제
담배의 유해성이 처음으로 밝혀진 건 1964년 1월 미국 국립 위생협회(NSF)에서 발간한 ‘흡연과 건강’이라는 보고서였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지금까지 담배의 유해성은 학계에서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다. 국제 표준 분석법이 마련됐고, 담배의 어떤 성분이 어떻게 악영향을 미치는지가 세세하게 밝혀졌다.
하지만 2000년 후반 새롭게 등장한 신형 담배들의 경우 연구가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 담뱃잎을 가열하는 궐련형 전자담배, 희석제에 니코틴과 첨가제를 넣은 액상을 가열하는 액상 전자담배, 그리고 액상을 공기와 닿지 않도록 밀폐시킨 폐쇄형 액상 전자담배 등 새로운 형태의 담배가 출시돼 흡연을 유도하고 있다.
신 교수는 “담배 유형마다 첨가제의 종류와 제조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이로부터 발생하는 유해물질의 종류와 양도 각각 다르다”고 말했다. 가령 일반담배와 궐련형 전자담배 모두 담뱃잎에 열을 가하는 방식이지만, 일반담배는 650도에서 ‘태우고’, 궐련형 전자담배는 350도에서 ‘가열’하기 때문에 수분이나 유해물질의 양이 다르다(정확한 유해물질의 종류와 양은 계속 연구중이다).
지난해 출시된 폐쇄형 액상 전자담배도 액상이 산소와 만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액상 전자담배보다 부산물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신 교수는 “담배 성분이 대부분 공개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담배회사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가향 성분을 포함한 첨가제를 어느 담배에 얼마나 넣는지 공개하지 않는다”며 “(담배 성분의 유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를 정부와 연구기관에서 밝혀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연구기관에서 담배 성분을 분석한다는 건 마치 음식을 먹어보고 그 안에 들어간 수십, 수백 가지 재료가 무엇인지 유추하는 것과 같다. 기존에 성분을 분석한 일반담배를 토대로 일부 성분은 추적할 수 있겠지만, 새로 추가된 첨가제들이 어떤 종류이며 얼마큼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추가로 분석 과정이 필요하다.
신 교수는 “담배 종류마다 배출 물질이 다른 만큼 기존 담배 성분 분석법으로는 새로운 전자담배들이 얼마나 해로운지 판단하기 어렵다”며 “새로운 담배가 나올 때마다 그에 맞는 새로운 분석법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현재 전자담배 성분을 분석하는 방법은 연구실마다 제각각이다. 공통된 표준 분석법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규제 성분 지정 등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신 교수는 “결국 정부의 의지가 유해 성분을 규제하고 분석하기 위한 시작점”이라며 “우리나라는 담배 관련 사업이 정부 주도에서 민간기업으로 넘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도 담배 규제에 대해서는 부처별로 방침이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새로운 형태의 전자담배들은 계속 팔리고 있다. 국내에서 2000년 중반 이후 꾸준히 감소하던 청소년 흡연율이 2016년을 기점으로 증가세로 전환했는데, 보건복지부는 전자담배의 보급이 그 원인 중 하나라고 추측하고 있다.
미국도 식품의약국(FDA)의 조사에 따르면 2018년 미국 고등학생의 21%가 ‘지난 한 달 사이 전자담배를 피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2017년(11%)과 비교해 두 배로 늘었다.
전자담배의 성분 분석이 안 된 만큼 이런 담배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더욱 불분명하다. 미국 미네소타주 메이요클리닉 연구팀은 저명한 의학 저널인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JM)’ 10월 2일자에 액상 전자담배가 원인으로 의심되는 폐 질환자 17명의 폐 조직을 검사한 결과, 전자담배에서 흡입한 독성 물질이 폐 조직을 손상시켰을 가능성이 있지만 정확히 어떤 성분 때문인지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밝혔다. doi: 10.1056/NEJMc1913069
신 교수는 “전자담배는 기존 담배와 전혀 다른 담배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정부가 의지를 갖고 궁극적으로는 담배회사가 직접 정확한 성분을 공개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