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과학상 수상을 며칠 앞둔 10월 초 미국 버클리대 김성호 박사에게 E메일을 보냈다. 1987년 발암단백질 라스의 3차원 입체구조를 세계 최초로 규명하는 등 탁월한 연구성과를 쏟아내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노벨상에 근접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노벨상 시즌을 맞아 본인의 연구 근황과 함께 한국인으로서 노벨상에 도전할만한 과학자로 주가 있을지 김성호 박사의 견해를 묻고 싶었다.
그런데 답변은 단 한문장으로 돌아왔다.
"그 주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나마 처음에 곧바로 답변이 오지 않아 몇차례 팩스와 전화녹음을 남긴 후의 일이었다.
새롭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 곳은 국내에서 '노벨상에 도전한다'는 취지를 표방하고 나선 조직들.
1996년 10월 한국 기초과학을 세계 수준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나선 고등과학원, 그리고 1997년 6월 국회의원과 재계, 학계 인사들이 모여 발족시킨 노벨과학상수상지원본부(사단법인)였다.
바둑 프로 9단과 아마 3-4단의 격차
고등과학원은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각 분야에 노벨상(수학은 필즈상) 수상자에 버금가는 국내외 교수진을 포진시키겠다고 천명한 곳이다. 현재 수학부와 물리학부가 개설돼 있는데, 물리학부의 경우 노벨상 접근이 용이한 경쟁력 있는 분야인 소립자이론(초끈이론, 중성미립자 등)에 전임 연구원 14명(전체 20명)이 전념하고 있다. 고등과학원은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이 방미중 재미과학자들과 가진 만찬회에서 젊은 과학도들이 노벨상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실현시킨 조직이어서 더욱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편 노벨과학상수상지원본부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한국인 연구자를 발굴해 지원과 홍보를 아끼지 않겠다는게 기본 취지다. 노벨상 후보를 선정해 수상이 조기에 이뤄질 수 있도록 '정치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겠다는 의미다. 현재 과학자를 주축으로 한 1백14명(국회의원 10명, 재계 인사 6명포함)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고, 11회에 걸쳐 국내외 과학기술 석학을 초빙해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 현황과 노벨상에 한걸음 다가서는데 필요한 정보를 교환해 왔다. 조직이름에 걸맞게 세부 분과로 물리, 화학, 그리고 생리 및 의학 분야 위원회가 설립돼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양쪽 모두 선뜻 취재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몇차례 접촉을 시도한 뒤 겨우 두 조직의 대표를 만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현재 '한국인 노벨상 수상' 운운하는 것은 너무 이른 얘기이며, 이런 상황에서 '누구누구가 후보감'이라고 잘못 알려지면 본인에게는 상당한 부담감만을 안겨줄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김성호 박사가 인터뷰에 응하지 않은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고등과학원의 김정욱 원장은 "바둑에 비유하면 노벨상수상자는 프로 9단인데 비해 한국 최고의 과학자는 아마추어 3-4단 정도 수준"이라며 "현재 노벨상을 바라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라고 단언한다. 한국인으로서 가장 앞서 있다 해도 비슷한 수준을 갖춘 외국인 과학자가 이미 수백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노벨과학상수상지원본부의 전무식 본부장(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 생각도 비슷하다. 그는 "노벨상 수상 경향을 보면 탁월한 업적을 쌓은 후 평균 10년 정도 지난 후 상을 받는다"고 설명하고 "2010년 경에 노벨상 받기 위해 현재 그럴만한 준비를 갖춘 한국인 과학자는 한명도 없다"고 말한다. "굳이 거론하자면 1977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타계한 핵물리학의 거두 고 이휘소 교수를 들 수 있지만, 당시 업적이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분이 현재까지 생존해서 연구를 했다면 지금 후보로 오를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라는게 전무식 본부장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줘도 최소한 10년 이내에는 한국인은 노벨상을 꿈도 꿀 수 없다. 왜 그럴까
대답은 간단하다. 노벨상은 기초과학 분야에서 창조적인 성과를 일궈낸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한국의 기초과학 수준은 선진국에 훨씬 못미친다.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연구 내용을 살펴보면 현격한 수준 차이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의 물리학자 3명이 전자의 새로운 상태인 '양자 유체'를 발견하고 이를 이론적으로 규명해 올해 노벨물리상의 영예를 안았다. 양자 유체란 극도로 강한 자기장과 영하 273℃내외의 극저온의 환경에서 전자가 액체처럼 운동하면서 전기저항이 분수값을 갖는 상태다. 여기서 사용된 실험재료는 갈륨비소 반도체.
고달픈 한국의 실험실
이 연구에 대해 김정욱 원장은 "재료와 실험 조건 면에서 한국은 이와 관련된 아무런 기반을 갖춘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한국이 왜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지 알려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평한다. "양자 유체"발견이 가능했던 것은 저온물리학, 강하고 균일한 자기장을 만드는 기술, 품질 좋은 재료와 같이 '기초' 분야에 해당하는 지식이 상당히 축적된 결과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정부나 기억이 산업적으로 응용될만한 기술 새발에 역점을 둬 온 탓에 '당장 돈을 못벌어들이는' 기초 분야에 대한 지원은 부족했다.
이런 여건에서는 노벨상을 만드는 연구풍토가 전혀 형성되지 못한다. 김성호 박사와 함께 외국 생명과학계에서 명성을 높이고 있는 미국립보건원의 세포신호전달연구실장 이서구 박사(이화여대 생물학과 석좌교수)역시 비슷한 상황을 지적한다. 그는 생물체에 가해진 자극이 세포를 통해 전달될 때 어떤 화학물질을 통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꾸준히 연구해 왔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과정에서부터 암의 발생에 이르기까지 인체의 모든 생명 현상을 '신호전달 체계'입장에서 해석하는 기초분야다.
이서구 박사는 "노벨상감 아이디어는 대학원에서 교수와 동료 간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서 떠오르기 시작한다" 고 전제하고 "현재 한국의 대학원 분위기는 그럴 여유를 갖추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거나 너무 어려워 풀지 못하는 한가지 문제를 상당히 오랫동안 연구해서 획기적인 결과를 내야 노벨상에 도전할만하다. 교수나 대학원생들은 '우리 세대에는 안돼도 다음 세대에 해결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연구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실험실 생활은 상당히 고달프다. 실험실을 운영하기 위한 최소한의 연구비를 확보하려면 1년에 4-5개의 연구를 따내야 한다. 지속적이고 독창적인 연구는 커녕 당장 발등에 떨어진 과제를 수행하기 바쁘다. 설상가상으로 수많은 행정적인 잡무가 연구를 방해한다.
그렇다면 기초 과학이 탄탄한 선진국에서 연구하고 있는 한국인 과학자에게 노벨상을 기대하는 것은 어떨까. 외국의 명문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수백편의 논문을 발표한 몇몇 한국인 과학자들이 노벨상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은근히 주목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대답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김정욱 원장은 유학생 세대를 3세대로 구분하고, 현재 재외 한국인 과학자에게 기대를 걸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한다. 1세대는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대학과 연구소를 자리를 잡고 연구를 수행하는 50-60대 연령의 집단이다. 다른 세대에 비해 가장 수가 많을 뿐더러, 국내 언론에서 세계적인 과학자로 소개되는 인물들이 주로 속한 세대이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미국 콜럼비아대 이원용 박사(입자물리학 실험), 브라운대 강경식 박사(입자물리학 이론), 프랑스 원자력청산하 샤클레 연구소의 노만규 박사(핵물리), 그리고 김정욱 원장(원자핵 약작용)이 여기에 속한다. 화학 분야에서는 김성호 박사를 비롯해 독일 뮌헨공대의 김재일 박사(플루토늄연구), 스위스 취리히공대의 하태규 박사(양자화학 이론), 그리고 생물 분야에는 이서구 박사와 캐나다 캘거리대 윤지원 박사(당뇨병백신개발)가 있다.
'IMF형 돌파구' 컴퓨터생물학
그러나 노벨상 후보자들이 가장 중요한 업적을 쌓는 평균 연령은 통상 40대다. 과학지식과 실험기술이 가장 무르익고 여느 때보다 혈기왕성한 연구를 수행하는 시기다. 이때의 연구가 얼마나 탁월했는지가 10년 정도 지나 학계에서 평가되고, 그 결과에 따라 후보자로 추천될지 말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한국인 유학생 2세대는 어떨까.
기대 외로 1세대에 비해 외국에서 자리를 잡은 수가 절반 이하로 현격히 줄어들었다. 대다수의 유학생이 포진한 미국의 경우 1980년대에 닥친 경제 불황 탓에 대학이나 연구소에 취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것이 주요 원인이다. 그래서 많은 유학생들이 박사후 과정까지 마친 후 한국에 돌아오는 길을 걸었다.
이 연령층에서 유학생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고 30세의 나이로 MIT 교수가 된 피터 김이 주목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바이러스가 어떻게 세포에 침입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최초로 발견함으로써 독감 바이러스나 에이즈 바이러스 등이 인체세포막에 어떻게 융합하는지를 규명해 냈다.
그러나 국내 노벨상 추진 관계자들은 피터 김을 노벨상 후보감이라고 거론하는 일을 조심스러워 한다. 업적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비슷한 수준의 업적을 쌓은 외국 과학자 역시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 수 있는 세대는 현재 박사 과정을 마치고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고 있는 30대 연령층의 3세대. 하지만 이들이 40대에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지 현 단계에서 단언하기 어렵다.
돌파구는 어디일까. 고등과학원은 기초과학 중 '장래가 가장 밝고 사람이 있는' 분야를 선별해 중점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국내에 사람이 없다면 국적을 불문하고 외국에서 초빙해 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하지만 작년부터 급속히 한국 경제가 어려워진 탓에 진행이 순조롭지 못하다. 현재 고등과학원은 물리학과 수학 분과만 갖췄을 뿐 화학과 생물 분과 설립을 늦추고 있다. 실험 시설이 상대적으로 많이 요구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비용 충당이 만만치 않다.
묘책으로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전망이 밝은 컴퓨터생물학(computational biology)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유전자 구조에 관한 수많은 데이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컴퓨터를 이용해 해독하는 분야다. 김정욱 원장을 "올해 노벨화학상 수상자 중 한 명인 수학자가 이 분야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사람인 만큼 생물학뿐 아니라 화학에서도 전망이 좋다"고 말한다. 고등과학원은 조만간 김성호 박사를 석학교수로 유치하고, 그를 주축으로 연구진을 구축해 컴퓨터생물학의 발판을 마련할 계획이다. 위축된 경제 상황 속에서 첨단을 추구하는 'IMF형 기초과학 전략'인 셈이다.
그러나 고등과학원이 추구하는 것은 노벨상 자체가 아니다. 노벨상이 기초과학의 상징인 만큼 한국의 기초과학 수준을 높이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그래서 김정욱 원장은 "고등과학원이 마치 노벨과학상 수상자 양성소인 것처럼 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 현실 여건이 전혀 받쳐주지 않는데 공연히 사람들의 관심만 높아져 연구자들로서는 오히려 부담감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한국노벨상수상지원본부도 같은 입장이다. 사실 이 조직의 영문 명칭은 'Kore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즉 '한국과학진흥협의회'다. 노벨상 분위기를 풍기는 단어는 하나도 없다. 공학이나 기술이 아닌 기초과학을 진흥시키겠다는 게 본래의 설립취지다.
꼬마 후보자 수준
그렇다면 왜 '노벨과학상'이란 용어를 사용했을까. 전무식 본부장은 "골프광이 아니면서 골프의 경기규칙을 훤히 알고 있고, 축구팬이 아니면서 월드컵 경기에 일가견이 있지만, 과학기술에는 도통 무덤덤한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용했다"고 피력한다. 교육중심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연구에 중점을 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식 수준이지만 노벨상만큼은 일반인들의 귀에 익숙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한국노벨과학상수상지원본부는 내년부터 구체적으로 후보자 선정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그러나 여기서 후보자란 실제 후보자의 후보자, 즉 '꼬마 후보자' 정도의 수준이다. 이들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보다 중요하게 남겨진 과제다. 지원본부는 현재 회원들의 회비 정도로 모임을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기 때문에 후보자가 선정된다 해도 당장은 이들을 지원할 재원마련이 급선무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누가 후보로 거명됐다'는 사실에만 집착해 노벨상 시즌에 잠깐 관심을 높이다 이내 잊어버리는 과정이 당분간 지루하게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