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에서는 1980년 10월부터 잇따라 5명의 젊은 동성연애자(同性戀愛者)가 칼리니폐렴에 걸렸다. 칼리니폐렴은 면역력이 전혀 없는 노인에게서 발생하는 희귀한 병. 그런데 젊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캘리포니아대학의 마이클 거트립 박사는 환자들의 혈액을 검사한 결과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혈액 속에 있어야 할 항체 형성을 돕는 세포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거트립 박사는 이게 혹시 무서운 전염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1981년 6월 5일 미국질병통제센터(CDC)에서 발행하는 주간 질병잡지 MMWR에 보고했다.
거트립 박사의 논문이 발표된지 한달 후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26명의 동성연애자에게서 카포시육종이라는 암이 발견됐다. 이것 역시 1년에 인구 1천만명당 2-6명의 환자가 발생하는 희귀한 병. 그들의 혈액 속에서도 면역을 담당할 세포가 들어있지 않았다.
미국질병통제센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병을 ‘게이(동성연애자) 관련 면역결핍’(GRID)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1982년 수혈을 받은 환자와 이성연애자에게서도 같은 병이 발견되기 시작됐다. 동성연애자에게만 발생하는 병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성연애자에 대한 오해가 풀려 이 병의 이름도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로 바뀌었다.
에이즈의 희생자는 점차 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동성연애자들의 불결한 성생활에서 생겨난 병을 왜 돕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재선을 앞둔 레이건 대통령은 역병이 나돈다는 소문이 대통령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병을 덮어두었다. 레이건은 1984년 다시 대통령이 됐다.
에이즈의 원인을 처음으로 밝힌 곳은 프랑스였다. 1983년 2월 파스퇴르연구소의 뤽 몽타니에(1932-) 박사가 동성연애자의 임파선 조직을 조사해 에이즈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바이러스의 이름을 ‘임파절증 관련 바이러스’(LAV)라고 불렀다. 그리고 혈액검사 시약을 개발해 에이즈 환자를 찾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프랑스는 의기양양하게 LAV 시약에 대한 미국 특허를 얻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국립암연구소(NCI)의 로버트 갤러(1937-) 박사가 발견한 ‘사람 T세포 친화성 바이러스’(HTLV-III)와 같다는 이유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레이건 행정부는 정부가 에이즈에 대해 냉담하다는 비판을 의식해 갤러 박사를 이용했던 것이다.
로버트 갤러는 1979년 레트로바이러스(RNA 종양 바이러스)를 발견했는데, 이는 암과 관련해 발견된 최초의 바이러스였다. 따라서 그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몽타니에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미국 학술잡지인 사이언스지에 싣고 싶었다. 그래서 갤러의 추천을 받고자 논문 전문을 보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됐다. 요약문을 갤러가 쓰면서 공동발견자인 양 돼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에이즈바이러스를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에 대한 프랑스와 미국의 대논쟁이 시작됐다.
물론 갤러가 사이언스에 발표한 에이즈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은 몽타니에의 것과 똑같았다. 바이러스는 전염되는 동안 변이를 일으킨다. 또 미국과 유럽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먼데 바이러스가 똑같은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에이즈바이러스 논쟁은 1987년 3월 정치적으로 끝을 맺었다. 백악관을 방문한 프랑스의 시라크 총리가 레이건 대통령에게 양보한 것이다. “몽타니에와 갤러를 에이즈 바이러스의 동시 발견자로 한다. 시약에서 얻어진 특허료는 균등하게 나눈다. 프랑스측에서는 소송을 취하한다.” 이 합의문에는 에이즈바이러스의 이름을 HTLV와 LAV가 아닌 ‘사람면역부전바이러스’(HIV)로 정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에이즈는 HIV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면역력이 떨어지는 현상이다. 즉 에이즈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병균이 침입했을 때 이를 물리치지 못해 죽는 것이다. 에이즈바이러스는 감염자와 성관계(정액이나 질액을 통해 감염)를 맺거나 그 피를 수혈할 경우 옮겨진다. 악수하고, 수영하고, 물을 같이 마시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정도로 옮기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 전염병과 다른 점. 또 눈물, 땀, 침 등의 분비물에도 에이즈 바이러스는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재채기나 기침을 겁낼 필요는 없다. 모기나 다른 곤충에 의해 옮겨지지도 않는다.
에이즈바이러스는 쉽게 옮겨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감염자가 3천만명(세계 인구의 2백분의 1)에 이른다. 1998년 유엔에이즈프로그램(UNAIDS)과 세계보건기구(WHO)가 공동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1천1백70만명이 사망했고, 1997년 사망자만 3백10만명에 이른다. 그런데 1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지금까지 2백70만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동성연애자도 아니고, 불결한 성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 감염자수는 3천1백명이고, 3백명 가량이 사망했다.
아직 에이즈바이러스가 왜 생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학설은 아프리카 원숭이에게서 유래했다는 것. 현재 아프리카 지역에는 2천3백만명에 이르는 에이즈바이러스 감염자가 있다(아프리카에서는 옛날부터 슬림병이라는 에이즈 증상이 발견되곤 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프리카 원숭이를 조사한 결과 원숭이 에이즈바이러스(SIV)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SIV와 HIV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1999년 1월 미국 앨라배마대학 비어트리스 한 박사팀이 인간 에이즈바이러스는 침팬지로부터 이종 감염됐다고 발표했다. 침팬지의 에이즈바이러스(SIVcpz)와 HIV는 VPU라는 공동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것이 증거라는 것.
에이즈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방법 역시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아지도티미딘(AZT)과 같은 치료약이 있긴 하지만 에이즈바이러스의 증식을 잠시 억제할 뿐이다. 결국 최선의 치료책은 예방이라는 얘기다.
에이즈의 위험성이 알려지면서 1988년 1월 1백48개국의 보건장관들은 영국 런던에 모여 에이즈 예방에 관한 런던선언을 채택했다. 이를 계기로 세계보건기구는 12월 1일을 ‘에이즈 예방의 날’로 정하고 1988년부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