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어른들은 ‘아홉수를 조심하라’고 했다. 29세 된 자식은 결혼을 피하고, 회갑 전해(59세)에는 생일을 꺼렸는데, 이것은 9라는 수가 마지막의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야구를 보면서 9회말, 투아웃, 만루, 투스리 풀카운트에서는 무언가가 터질 것 같은 생각을 갖는 것도 그 수가 야구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수이기 때문이다. 1999년에 인류가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참언이 많은 것도 9가 세개나 겹쳐있는 1천년대의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땡 잡아 좋은 이유
제비는 3월3일에 와서 9월 9일에 강남으로 떠난다고 한다.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제비는 해마다 날씨에 따라 조금 이르기도 하고 늦기도 한다. 더구나 이 날짜는 음력이라서 계절 변화를 정확히 반영하지도 못하고, 양력과 비교하면 해마다 다른 날이다. 그런데도 이런 날을 의미있게 생각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같은 수가 겹치는데서 오는 미학적인 느낌 때문일 것이다. 우리말에서 큰 횡재를 했을 때 ‘땡 잡았다’고 하는데, 이 때의 땡도 같은 패의 화투장 두 개가 서로 겹치는 것을 말한다. 독일에서도 같은 숫자가 겹치는 순간에 어떤 일을 하면 크게 행운이 온다고 해서 1999년 9월 9일 9시에 결혼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관공서마다 골치라고 한다. 같은 일이 88년 8월 8일 8시, 77년 7월 7일 7시에도 있었다. 우리의 세시풍속에도 1월 1일(설), 3월 3일(삼짓날), 5월 5일(단오), 6월 6일(유두), 7월 7일(칠석), 9월 9일(중구절) 등 같은 수가 겹치는 날이 많다. 중국에서는 10월 10일(쌍십절)을 기념하기도 한다.
9를 아슬아슬하게 느끼고, 같은 수가 겹치는 것을 행운으로 보는 것과 반대로 불운한 느낌을 주는 숫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건물에 4층을 두지 않고, 서양에서는 제비를 뽑을 때 13을 두지 않는다. 왜 그럴까. ‘13일의 금요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하룻밤 사이에 꼬리를 물고 벌어지는 끔찍한 살인을 그린 공포영화다. 서양 사람들 사이에서 13은 재앙을 의미하는 일이 많다. 더구나 이 수가 금요일과 겹치게 되는 13일의 금요일은 반드시 끔찍한 불행이 벌어지고 말 것 같은 예감으로로 다가온다. 영어에서는 ‘13공포증’(Triskaideka-phobia)이라는 고유명사가 있을 정도로 13은 악마와 불행을 상징한다.
13일의 금요일
예수는 자신이 체포돼 사형될 것을 알고 12명의 제자와 함께 만찬을 들었다. 식사 도중 유다가 자리를 떠나 예수를 배반하고 병사들을 불러와 예수는 잡혀갔다. 다음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했는데, 이 날이 금요일이었다. 예수는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했는데, 이 날이 일요일(주의 날)이므로 역산하면 예수가 죽은 날은 금요일이 된다.
기독교도들은 예수와 12제자를 합해 13명이 모인 곳에서 유다의 배반이 일어났으므로 13이라는 숫자에 배반과 불행이 담겨있다고 믿게 됐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불행이 일어난 날이 금요일이었으므로 이 또한 불길함과 고통을 상징하게 됐다. 그러니 13과 금요일이 겹치는 날이 주는 의미는 불행한 일이 터지고 말 것 같은 공포와 불안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오늘날까지 서양에서는 13명이 함께 회식을 하면 그 해 안에 한명이 죽음을 당한다는 미신도 있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에는 ‘짐승의 수’라고 하는 숫자 666이 실려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666이라는 숫자를 ‘사탄의 수’라고 해서 매우 혐오하는 생각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발달한 ‘게마트리아’라는 점수술(占數術)에서 유래한 믿음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히틀러의 이름도 666
숫자로 점을 치는 방법은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가 알려져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주역으로 점치는 것도 점수술의 일종이다. 게마트리아는 알파벳 각각에 숫자를 배당해서 단어가 만드는 숫자로 행불행을 점치는 것이다. 알파(A)=1, 베타(Β)=2, 감마(Γ)=3 … 에타(H)=8, 테타(Θ)=9, 아이오타(Ι)=10, 카파(Κ)=20, 람다(Λ)=30, 뮤(M)=40, 뉴(N)=50 … 로(Ρ)=100, 시그마(Σ)=200, 타우(Τ)=300 … 오메가(Ω)=800 등으로 매겨진다. 이에 따라 아멘(AMHN, 라틴어)은 1, 40, 8, 50으로 99가 되는 식이다.
이 방식을 따르면 베드로를 처형했던 로마 황제 네로의 이름이 666이 된다. 또한 2차대전을 일으키고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이름도 666이 돼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최근에는 공산품에 붙이는 바코드에 666이 쓰여있다고 해서 인류의 종말이나 신의 심판이 가까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바코드에 ‘사탄의 수’ 666이 있다는 말은 오해에서 나온 것이다. 바코드에서 기준점 역할을 하는 3곳에 길다란 2줄의 검은색 선이 ||와 같이 새겨져 있다. 검은색을 1, 흰색을 0으로 하면, 101이 된다. 바코드에서 6을 나타내는 부호중 하나가 1010000인데 이것을 앞부분만 따다가 6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선들은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바코드를 읽는 기계가 인식하기 쉽도록 기준점 역할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코드에 666이 새겨져 있다는 소리는 혹세무민하는 참언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의 이름도 게마트리아로 풀어내면 666이 나온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 당시 구교측에서는 루터가 악마라는 좋은 증거로 선전했지만, 신교가 자리잡은 오늘날 루터는 개신교의 선구자로 추앙받으니 점수술을 어떻게 봐야 할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에서 뿌리깊게 자리잡은 작명학도 서양의 게마트리아와 다르지 않다. 한자 이름을 지을 때는 각 글자가 지니는 획수를 세어서 이것을 오행에 배당한다. 1획과 2획은 목(木), 3획과 4획은 화(火), 5획과 6획은 토(土), 7획과 8획은 금(金), 9획과 10획은 수(水)에 배당한다. 이름의 획수가 13, 6, 17이라면 화, 토, 금이 된다. 이 순서는 오행의 상생상극(相生相剋)의 원리상 상생의 관계가 되므로 매우 좋은 이름으로 친다. 만일 서로 상극 관계로 배열돼 있다면 그 이름은 좋지 않은 이름으로 본다. 최근에는 한글 이름인 경우에도 자음과 모음을 오행에 배당해서 글자의 순서가 어떤 배열을 이루는가에 따라 화복을 판단하는 일까지 생겼다.
스키너의 비둘기
숫자가 주는 미학적인 느낌을 한번쯤 음미해보는 정도를 넘어 숫자에 대한 공포를 떨치지 못하거나 점수술에 의지해 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때에 유명한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의 비둘기 실험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키너는 비둘기를 방에 가두고 특별히 설치된 막대기를 부리로 쪼면 먹이가 흘러나오게 실험장치를 만들었다. 어느 날 비둘기가 우연히 방을 한바퀴를 선회한 후, 부리로 막대를 쪼았더니 먹이가 흘러 나왔다. 그러자 비둘기는 먹이가 생각날 때마다 매번 방안을 한바퀴 선회한 후 막대를 쪼았다. 막대를 건드리는 최종적인 행동이 먹이를 나오게 하는 것이지만, 비둘기는 자신이 방을 한바퀴 선회한 것 때문에 먹이가 나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침에 장의차를 보면 재수가 좋다거나, 건물의 4층은 죽을 사(死)와 같아서 사고가 많이 난다거나 하는 믿음이 스키너의 비둘기가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 ‘13일의 금요일’에서 등장인물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유는 사실 자신들의 방탕한 생활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끔찍한 일이 13일과 금요일이 겹쳤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화목하게 잘 살려는 자세가 없다면, 99년 9월 9일에 결혼한다고 해서 특별히 행복한 결혼생활이 될 이치가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