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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일방적 승리는 없다 절충이 있을 뿐

인간과 함게 하는 숙명의 적대관계


미래에도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단지 전쟁의 양상이 조금 첨단화될 뿐.


바이러스와 인간은 숙명적인 악연 관계를 맺고 있다. 바이러스는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지만 인류 전체를 완전히 사멸시키지 않는다. 인간의 사멸은 곧 자신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치러야 할 바이러스와의 전쟁 양상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몇개월만 지나면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이하게 된다. 사람들은 21세기를 맞이하면서 각오를 새롭게 다지기도 하고, 현재와는 무엇인가 달라질 것으로 기대와 희망을 모은다. ‘바이러스와의 전쟁’도 새로운 국면, 그것도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우리가 여전히 겪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단지 바뀐다면, 전쟁 양상만이 조금 첨단화할 것이다.

질병의 세계화

바이러스라는 공격자에 대처하는 사람의 전략·전술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바이러스도 이에 적응하고 재도전할 것이다. 바이러스는 사람이라는 동물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둘 사이는 태생기부터 얽혀진 악연 관계다.

바이러스는 사람과 함께 지구 생태계를 공유하고 있다. 바이러스는 그 종류도 다양하고, 공격상대도 세균, 곰팡이, 식물, 곤충, 척추동물 모두를 망라한다. 따라서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건강 문제만이 아니고, 작물재배와 가축을 기르는 농축업의 재해로서도 골치거리다.

세기가 바뀐다고 우리를 공격하는 바이러스의 종류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21세기에 걱정해야 할 바이러스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크게 두종류로 나누어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과거에 경험했고 지금도 되살아나는 기존 질환의 유행(re-emerging)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에 만난 적이 없는 새로 생겨난 질병의 유행(emerging)이다.

새로 생겨난 질병의 유행은 1981년부터 전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에이즈 유행을 계기로 세계보건기구가 예시하고 있는 30여가지의 질환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들 중에서 바이러스성 질환으로는 에이즈를 유발하는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IV)를 위시해, 유아에게 설사증을 일으키는 로타 바이러스(1973), 적혈구가 파괴돼 산소공급이 안됨으로써 만성 빈혈의 원인이 되는 파르보 바이러스 B19(1975), 아프리카 출혈열을 일으키는 에볼라 바이러스(1977), 한국에서 처음 분리된 유행성출혈열의 한탄 바이러스(1977), 음식물로 전파되는 간염 E(1988)와 혈액으로 전파되는 간염 C 바이러스(1989), 최근 미주를 경악시키고 있는 출혈성 병원체인 신 놈브레 바이러스(1993)가 있다.

되돌아온 기존 바이러스 질환 중에는 뎅기열과 황열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면 뎅기 바이러스에 의해 고열과 출혈을 일으키는 질환인 뎅기열은 1994년 남미에서만 20여만명을 사망케한 치명률이 높은 질병으로 반세기만에 다시 만연된 것이다.

이렇게 되살아나는 기존 질환과 새로 생겨난 질병이 21세기에도 유행할 위험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이러스가 스스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새롭게 등장하는 탓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행태 변화 역시 주요 원인이다. 과거에는 질병이 지역적으로 국한돼 소위 ‘질병의 쇄국주의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러나 인간 문명의 세계화는 곧 바이러스집단의 세계화로 이어졌다. 세계 여행의 자유화는 한 지역에서만 창궐하던 바이러스의 세계여행을 가능케 해 수입병이라는 낯선 질병을 등장시켰다.

전쟁이 한 원인

식량 원료공급의 세계화 역시 바이러스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좋은 예가 광우병이다. 영국에서 생산된 쇠고기로 인한 광우병의 공포는 유럽전역을 휩쓸고 있다. 이에 한몫을 더한 경우가 즉석 음식물(팩스트 푸드)을 통한 음식문화의 세계화다. 햄버거, 피자, 통닭과 같은 음식의 세계시장화는 각종 전염원의 세계적 유행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광우병, 그리고 바이러스는 아니지만 식중독을 일으키는 살모넬라균과 O157대장균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구 증가와 인구의 급격한 도시 집중화가 또다른 이유로 등장한다. 이로 인한 인구 과밀현상은 바이러스 전파에 좋은 조건을 만들고 있다. 간염바이러스와 홍역이 인구가 집중된 곳에서 반복적으로 유행하는 것이 그 예다.

내란과 전쟁으로 인한 인구의 대이동과 기근 또한 되살아나는 기존 질환과 새로 생겨난 질병이 유행할 위험을 초래한다. 지난 5월 초 아프리카 지역에서 갑자기 창궐한 마버그 바이러스 질환에서 이런 사례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누구로부터 퍼지기 시작했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전염됐는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단지 바이러스가 잘 전염되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전쟁이다.

열대의 밀림 속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투에 밤낮으로 임하고 있는 군인들에게 위생관념이 있을 수 없다. 각종 병균이 득실거리는 불결한 환경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셈이다. 이들 중 누군가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면 질병은 군인과 민간인 모두에게 급속히 전염될 수 있다.

사건이 발생한지 며칠 후 남아프리카공화국 보건부의 카메론 박사는 “전쟁이 더욱 많은 질병을 낳고 있다”고 논평하고 1차 세계대전 당시 총탄에 맞아 사망한 사람보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희생된 수가 더 많았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그는 일례로 앙골라에서 25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정부군과 반정부군 간의 전투 때문에 지난 2개월 동안 수도 루안다에서 50명 이상의 어린이가 소아마비로 사망했고 7백여명이 질병을 앓게 됐다고 밝혔다. 또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서 예외 없이 콜레라나 뇌막염과 같은 치명적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고 한다.

카메론 박사는 이번 마버그 바이러스의 등장 원인 역시 전쟁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작년 말 우간다가 콩고민주공화국 북부를 장악하고 있는 반군을 지원함으로써 양국은 적대관계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콩고민주공화국 국방부 대변인은 “마버그 질환이 본국이 고용한 다수의 외인부대를 통해 전염된 것 같다”고 밝혔다.


아이에게 소아마비 예방 백신약을 먹이는 장면. 소아마비는 과거에 잠깐 사라졌다 해도


에이즈 바이러스의 변신?

한편 관개수로, 수자원 개발, 습지의 인공적 개발로 인한 생태계 파괴는 질병을 매개하는 동물, 특히 모기와 야생 설치류의 생태를 교란시킨다. 그 결과 이들에 의해 바이러스가 인간 집단으로 새롭게 유입되도록 만든다. 바이러스는 아니지만, 세포 하나로 이뤄진 원충의 일종인 말라리아의 재등장에서 이런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한 보도에 따르면 한국에서 그동안 사라졌던 말라리아 환자가 1998년에만 4천여명이 다시 발생했으며, 올해에는 이번달에만 이미 59명의 환자가 보고되고 있다. 이는 한반도 내, 특히 북한지역의 자연 파괴와 기근 등으로 인해 구세대의 병이 새롭게 등장했음을 알리는 사례다. 무서운 점은 말라리아가 모기를 매개로 전염되기 때문에 모기를 통해 바이러스가 함께 옮겨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인간의 침범이 없었던 밀림이나 높은 산, 나아가 외계로의 인간 침투는 과거에는 상상도 못한 바이러스와의 만남을 우려하게 만든다. 또 현재 과학자들이 바이러스를 조작하는 기술을 습득하고 있어, 인조 바이러스의 등장을 상상할 수도 있다. 물론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이렇게 새로 등장하거나 변조된 바이러스와의 첫번째 전쟁은 어느 한쪽이 치명적 손상을 받는 백병전이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전쟁을 현명하게 조절해야 한다. 즉 백병전을 치른 바이러스의 일부는 점차 사람과 협상도 하고 냉전도 하면서 공생을 꾀한다.

성급한 희망이지만 혹시 에이즈 바이러스가 백병전 전술을 바꾼게 아닌가 하는 상상을 가능케 한 일이 있다. 농구계의 마술사라 불리는 미국의 매직 존슨 선수가 농구 묘기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많은 농구팬들은 그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재능에 감탄과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시청자 중에는 또다른 의미로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에이즈 감염자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움직임에는 농구 귀재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으며, 그의 외모 또한 대중매체를 통해 보아온 흉칙스런 에이즈 환자의 외모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전문인이 아니라면 약간의 혼돈감 마저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치료제를 통한 효과 외에도 사람의 감수성 차이, 그리고 바이러스의 순화라는 두가지 가능성으로 풀이될 수 있다.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해서 모두 같은 증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감수성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에이즈 감염자는 각각 환자로 변하는 시간이 다르고, 그 증상도 사람에 따라 또는 감염한 바이러스의 특성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아마도 그 농구 선수의 에이즈가 그런 행운의 경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이미 사람을 공격하는 강도를 낮추어 사람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터득하는 방향으로 진화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진화가 계속된다면 에이즈도 감기 바이러스처럼 사람 사회에 끼어 사는 대수롭지 않은 병으로 남을 수도 있다.

절충식 적대관계

바이러스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람과의 다툼이 불가피하지만, 바이러스가 인간을 전멸하는 일방적 승리는 있을 수 없다. 사람의 방어 수단이 전무하다 해도 사람의 전멸은 곧 바이러스의 멸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바이러스는 사람과의 전쟁을 현명하게 아끼며 유지하고, 사람이라는 집단이 적절한 숫자로 유지되도록 ‘절충식 적대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는 곧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사람이 존재하는 한 끝이 없다는 뜻도 된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사람이 백신개발을 비롯해 다양한 방어수단을 발전시키지만 바이러스도 끊임없이 진화하며 새롭게 무장하고 인류사회에 도전할 것이 틀림없다.

인간을 공격하는 바이러스는 그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 중에는 사람이라는 집단과 아직 만나지 못한 것도 많다. 이들은 언제고 새 바이러스로 나타날 수 있다. 미래란 현재 시간의 연장일 뿐이다. 21세기라고 해서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급격한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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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이원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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