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옛소련)가 1957년 10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한데 이어, 1961년 3월 인간을 처음으로 우주로 보낸 일은 공산주의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미국인들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44세의 젊은 나이로 대통령에 오른 혈기왕성한 J. F. 케네디(1917-1963)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그해 5월 “60년대가 끝나기 전 달에 인간을 보내고, 이들을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겠다”고 선언하면서, 달정복만은 러시아에게 양보해선 안된다며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부추겼다. 이는 사실상 러시아에 대해 달전쟁을 해보겠다는 미국의 선전포고였다.
당시 미국은 1인승 머큐리우주선을 이용해 겨우 15분 정도의 우주비행 경험만을 쌓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구를 한바퀴 돌 수 있는 90분 이상의 우주비행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미국이 러시아보다 유리했던 것은 케네디가 달정복 계획을 발표할 즈음 러시아는 공식적인 유인 달착륙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뿐이었다.
케네디의 선언은 우주개발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긍정적인 측면은 국가적 차원에서 우주개발에 엄청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함으로써 미국의 우주기술을 급성장시켰다는 것.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동안 차분히 준비해온 우주개발 순서가 뒤죽박죽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미국은 애초 지구궤도에 우주정거장을 만든 다음 달정복에 도전하려고 했다. 달착륙계획은 우주개발 순서에서 마지막 단계였다. 그런데 달착륙계획이 우선시되면서 정해진 시한 안에 범국가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주정거장 건설과 우주왕복선 개발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케네디의 선언으로 달정복이라는 큰 목표를 세우긴 했지만, 어떻게 달에 갈지에 대한 기술적인 측면은 백지상태였다.
미국이 아폴로계획을 수립할 무렵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첼로메이(1914-1984)를 중심으로 UR-500 로켓(후에 ‘프로톤’으로 불림)과 1명의 우주비행사가 달을 선회비행할 수 있는 LK1 우주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4년까지 확실한 달착륙계획은 수립하지 못했다. 그동안 미국은 강력한 로켓엔진인 F1을 겹쳐서 다단식 로켓인 새턴V를 만들고, 엄청난 돈과 최고의 과학기술자들을 모아 아폴로계획에 투입했다.
1964년 11월 러시아에서는 흐루시초프가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첼로메이 대신 그의 경쟁자였던 세르게이 코롤료프(1906-1966)가 들어서서 본격적인 달착륙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첼로메이의 UR-500로켓보다 훨씬 강력한 N1로켓 개발에 착수했다. 러시아는 미국보다 2년이나 늦게 달착륙방식을 결정했고, 예산도 적었다. 더욱이 NASA와 같은 강력한 중앙조직도 없었다. 따라서 26개의 관련 정부기관과 5백여곳의 조직을 일원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아폴로와 루나는 닮은 꼴
그런데 이상한 것은 미국이 세운 아폴로계획과, 코롤료프가 소유즈 캡슐을 변형해 만든 달착륙선 루나가 참으로 비슷했다. 그래서 소유즈 캡슐이 당시 제너럴일렉트릭에서 제안한 아폴로 캡슐의 설계도를 빼돌려 제작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비행과정도 같았다. 먼저 달궤도선을 이용해 승무원을 달궤도에 진입시킨 후 승무원 중 일부가 달착륙선에 옮겨 탄 후 달 표면에 내린다. 임무가 끝나면 다시 달궤도선으로 돌아와 이를 타고 지구로 돌아온다. 다만 차이는 미국은 3명의 우주비행사를 보내 2명이 달에 착륙하지만, 러시아는 2명의 우주비행사를 보내고 1명만이 달에 착륙한다는 것.
두 나라가 모두 하나의 우주선으로 달에 직접 착륙하는 방식보다 다소 복잡한 ‘달궤도 랑데부’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궤도선은 지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대기 재돌입 캡슐로서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반면 달착륙선은 공기가 없는 달 표면에서만 사용하는 것이므로 공기역학적인 고려를 할 필요가 없다. 또 단계마다 사용 후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무게를 극한까지 줄일 수 있다.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방식이 성공하려면 랑데부와 도킹, 우주선 밖을 나가는 우주유영, 달궤도 비행 등의 우주기술이 확보돼야 한다. 모두가 어렵고 힘든 기술이었다. 미국은 이런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2인승 제미니를 마련했고 러시아는 2인승 보스호드와 소유즈를 마련했다.
미국은 1966년까지 제미니 4호에 의한 우주유영과 제미니 7호에 의해 달에 가고 오는데 필요한 시간보다 많은 3백30시간의 우주체류기록을 세웠다. 또 훗날 최초의 달 착륙 우주인이 될 암스트롱이 탑승한 제미니 8호가 세계 최초의 우주도킹에 성공함으로써 달에 가기 위한 모든 기술을 확보했다. 이제 달궤도 비행만 남은 셈이다. 이때부터 미국이 러시아를 앞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보스호드 2호로 우주유영기술 한가지만 확보했고 나머지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우주선 발사는 기술적인 문제로 지연되고 있었다. 1965-1966년 동안 미국은 제미니 3-12호를 이용해 9번의 유인우주비행을 체계적으로 실시한데 비해, 러시아는 단지 보스호드 2호만 발사했을 뿐이다. 특히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했고 가가린을 우주로 보냈던 러시아 우주개발의 아버지 코롤료프가 1966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러시아의 달착륙 계획은 큰 차질을 빚는다.
미국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제미니계획이 끝나고 불과 2달 후인 1967년 1월, 승리에 도취해 너무 서두른 탓인지 최초의 아폴로 캡슐을 지상시험하는 도중 3명의 우주비행사가 화재로 사망했다. 이 사고로 아폴로 캡슐의 수많은 문제점이 밝혀졌으며, 이로 인해 아폴로계획은 18개월이나 연기됐다.
러시아 역시 달우주선 소유즈의 최초 유인비행이 1967년 4월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달비행에 필요한 예비훈련을 위해 발사된 소유즈 1호는 기술적인 문제로 임무를 중단한 채 귀환하는 도중 마지막 착륙과정에서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아 1명의 우주비행사가 사망했다. 이러한 잇딴 사고는 먼저 달을 정복하겠다는 두나라 과학기술자들의 스트레스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러시아에서는 미국을 앞질러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고, 미국 우주기지에서는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이혼하고 떠나는 여자들이 늘어났다.
잘못 설계된 N1 로켓
아폴로 1호의 사고 이후 미국이 무인우주선을 이용해 달탐사를 계속하는 동안, 러시아는 1968년 3월 존드 4호로 알려진 무인 소유즈를 달까지 보낸 다음 지구로 회수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미국을 앞질러 유인 달 선회비행이 가능할 것 같았다. 앞으로 2번의 무인 소유즈비행이 완벽하게 이뤄진다면 1968년 말 유인 달선회 비행을 할 예정이었다.
9월에는 존드 5호가 달을 돌고 왔는데, 여기서 사람의 목소리가 감지돼 미국을 놀라게 했다. 이것은 통신시스템을 시험하기 위한 녹음장치 때문에 발생한 해프닝이었다. 그 속에 진짜로 탑승한 것은 거북이와 파리였다. 이제 11월의 존드 6호만 성공한다면 12월의 비행에는 사람이 탈 수 있었다.
러시아의 유인 달 선회비행이 가까워지자 CIA는 NASA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NASA는 재빨리 비행계획을 재조정하고, 달을 선회하는 유인 아폴로캡슐을 1968년 12월에 발사하기로 결정했다. 달로켓 새턴V을 이용한 최초의 유인비행이고, 불과 3번째 아폴로 비행에서 바로 달을 향하겠다는 모험을 시도하는 것은 당시의 달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목숨을 건 우주여행이었다.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존드 6호가 무사히 달을 돌고 왔지만 탑승한 동물들이 착륙 실패로 모두 죽고 말았던 것. 이 결과로 보면 12월의 유인비행은 취소돼야 하지만, 불타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은 달로 보내줄 것을 상부에 요청했다. 이들은 미국보다 먼저 날아갈 준비를 위해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로 이동했지만 발사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아폴로 8호의 우주비행사들이 달을 먼저 돌았다. 아폴로 8호가 성공하자 러시아는 모든 유인 달 선회 계획을 보류하고 말았다.
이제 승부는 어느 나라가 먼저 달에 착륙하느냐로 넘어갔다. 이를 위해서는 달로켓이 완성되어야만 한다. 미국의 달로켓은 폰 브라운에 의해 개발된 새턴V 로켓이다. 러시아는 코롤료프의 N1로켓을 발전시켜 개발하기로 한다. 그런데 미국은 1967년 11월에 새턴V 로켓의 발사에 성공했지만, 러시아의 달로켓 N1은 1968년 여름 처음 발사대에 세워지긴 했지만 곧 수리를 위해 거대한 조립빌딩으로 되돌려지고 만다.
한편 발사체 개발과 관계없이 1968년 3월 달착륙을 위한 우주비행사 훈련이 모스크바의 스타시티에서 시작됐다. 달보행 시뮬레이터가 체육관에 마련됐고, MI-8 헬리콥터를 개조해 달 착륙훈련이 진행됐다. 1969년 1월에야 소유즈 4호와 5호가 지구궤도에서 만났고 우주유영을 통해 달에서 입을 새로운 우주복을 시험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대로는 미국을 따라 잡을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로봇을 달착륙선에 태워 보내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아폴로가 달에 착륙하기 전 무인탐사선을 보내 달의 흙을 가지고 지구로 돌아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달에 사람을 보낼 의도는 애초에 없었으며, 값싸고 안전한 무인탐사선을 보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69년 승리의 여신은 미국에게 미소를 지었다. 미국은 3월에 아폴로 9호로 달착륙선을 시험했고, 5월에는 아폴로 10호로 달착륙을 제외한 모든 과정을 완벽히 점검했다. 남은 것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뿐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2월에 실시한 첫번째 N1로켓 발사실험이 실패하고,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출발하기 불과 13일 전인 7월 3일 두번째 N1로켓을 발사대에 세워지만 2백m도 올라가지 못하고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 사고로 N1 발사장은 불바다가 됐고, 발사장을 재건하는데 2년이 소요됐다.
최초의 유인달착륙계획이 힘들게 되자 러시아는 아폴로 11호보다 먼저 달에 가기 위해 7월 13일 프로톤로켓을 이용해 로봇탐사선인 루나 15호를 발사했다. 루나 15호는 성공적으로 달궤도에 진입했지만 달에 착륙할 때 충돌해 부서지고 말았다.
고요의 바다에 착륙한 독수리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선인 ‘독수리’(eagle)가 고요의 바다에 착륙한 것은 7월 20일(한국시간으로 7월 21일 오전 5시 17분). 착륙 후 6시간 반 뒤 착륙선에서 내려 달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1930-)은 곧바로 달흙을 집어 우주복에 있는 주머니에 넣었다. 만약 착륙선이 긴급히 이륙해야 할 때를 대비해 조그만 샘플이라도 지구로 가져가기 위한 것이다. 암스트롱이 달표면에 내려선지 10분후 버즈 올드린도 착륙선 밖으로 나왔다.
이들은 90분 동안 함께 일하면서 22kg의 돌과 흙을 수집했다. 그리고 달경쟁 도중 사망한 3명의 미국 우주비행사를 기리기 위한 아폴로 1호의 견장, 2명의 러시아 우주비행사를 기리는 메달, 23개국 수뇌들의 축하 메시지를 담은 지름 3.8cm의 실리콘 디스크, 그리고 명패를 달에 남겨두었다. 명패에는 “1969년 7월 여기 지구에서 온 인간들이 첫발을 내딛는다”며 “우리는 모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왔다”고 적혀있었다.
달에서 21시간 36분을 보낸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은 총 1백95시간 동안 우주에 머물다가 지구로 돌아왔다. 귀환 후 이상한 달 병원체를 옮겨왔을 가능성 때문에 3주간 격리돼 종합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 어떤 생명체나 유기물질이 발견되지 않아 달은 ‘죽은 별’로 판명났다.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공식적인 표명과는 달리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이 아폴로계획을 취소한 이후에도 러시아는 달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N1 로켓과 새로운 유인우주선 개발을 위한 연구를 계속했다. 달궤도선인 소유즈 LOK와 달착륙선인 LK의 시험도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1971년 6월 21일 3번째 N1로켓을 발사대에 세웠다. 그러나 30개의 엔진이 점화되고 2백50m쯤 비행했을 때 제어에 문제가 생기면서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두동강난 N1의 한쪽은 그 자리에서 폭발해 버렸고 한쪽은 30km를 날아 15m 깊이의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1972년 11월 4번째의 N1로켓도 1백초 간의 비행 후 원인 모를 진동과 함께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며 폭발하고 말았다.
그동안 미국은 1972년 12월까지 13호를 제외하고 17호까지 18명이 달궤도를 돌았고 이중 12명이 달에 발을 디뎠다. 달에서 골프도 쳤고 달자동차를 이용해 드라이브도 즐겼다. 이제 더 이상 달 착륙은 미국 국민들에게는 뉴스거리도 되지 못했다. 결국 중단 여론에 밀려 20호까지 준비되었던 새턴V 로켓과 아폴로우주선은 폐기될 운명에 놓였다. 이후 NASA는 이 장비들을 개조해 우주정거장인 스카이랩계획을 추진한다.
러시아는 또 다른 N1 발사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1974년 코롤료프의 후임 바실리 미신이 물러나고 코롤료프의 경쟁자였던 발렌틴 글루슈코가 책임자로 임명되자마자 N1계획을 전면 중단시킨다. 제작 중이던 N1로켓은 해체돼 창고에 쌓였으며 발사대도 창고 짓는 재료로 사용됐다. 이로써 완전히 미·러의 달경쟁은 끝났다.
그동안 N1의 실패는 철저히 감춰졌고 유인달착륙계획이 러시아에 있었다는 것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달계획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1989년 옛소련의 몰락과 개방화로 러시아의 달계획에 관한 전모가 밝혀졌다. 미국은 아폴로계획에 24억달러를, 러시아는 달계획에 4억5천만달러를 지출했다.
미·러 달경쟁을 촉발시켰던 케네디는 1962년 9월 라이스대학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달에 가려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이다. 이 도전을 우리는 받아들일 것이며, 연기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아폴로 11호의 성공은 3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아도 정말 놀라운 승리이다.
오늘밤 다시 한번 달을 보자. 달착륙이라는 인류의 도전을 위해 노력했던 미국과 러시아의 과학기술자들을 생각하면서. 어제와는 다른 달을 보자. 단순히 한 인간이 달에 깃발 하나를 꽂고 온 달이 아니고 물의 발견으로 새롭게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달을 말이다. 그리고 잊혀졌던 달기지 건설의 부활을 꿈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