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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활이다. 빠른 속도와 정확성을 자랑하는 편전, 보통의 화살촉이 10g 남짓한 데 비해 240g이라는 무거운 촉을 단 육량시, 여진족의 장궁과 조선의 단궁이 눈에 띈다.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활쏘기 기법을 구사하며 궁술이 갖는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
낸다.
미사일이 시속 800km로 지구를 돌아 날아다니는 현대에, 순간 최고속력이 시속 250km 정도 불과하며 최대 사거리가 몇 백m 남짓한 활은 ‘최종병기’처럼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활은 구석기 시대부터 사용된 유서 깊은 무기다. 유교문화에서는 군자가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육례(六禮) 중 하나로서 심신수련의 방편이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여성을 포함한 일반 백성들도 널리 사용하면서, ‘적중’, ‘목적’, ‘한량’, ‘효시’처럼 널리 쓰이는 언어 표현을 만들어 내는 데 기여했다. 세계사적 맥락에서 보면 총이 등장하기 전에는 활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예컨대 백년전쟁의 와중인 15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아쟁쿠르 전투는 수적으로 매우 열세였던 영국군이 활을 적절히 이용해 압승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의 전쟁사학자인 존 키건은이 전투에서 활이 철갑으로 무장한 프랑스군을 살상하는 데는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5000여 발이 동시에 날아가면서 수 분 만에 상대편의 전열을 교란시켰다. 이는 영국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전투를 시작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고 키건은 말했다.
우리나라의 무예사에서도 궁술의 의미는 각별하다. 고구려의 주몽, 조선의 태조처럼 국가 창시자들은 뛰어난 명궁이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이수광이 지은 백과사전 ‘지봉유설’에서는 중국의 창법, 일본의 조총, 그리고 조선의 편전이 천하제일의 무술이라는 일본의 견해를 인용하며 적고 있다. 이렇듯 궁술은 한국을 대표하는 무예다. 그 명맥은 현대 양궁에서 한국 선수들이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며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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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주인공 남이의 누이동생. 청나라 군사에 잡혀 갔지만 의연한 모습으로 자신을 지킨다. (우) 병자호란이 끝나고 50만명의 조선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영화는 이 때를 배경으로 삼았다.]
남이의 무기는 조선의 비기 ‘애깃살’
영화는 꼼꼼한 고증을 통해 조선시대의 활쏘기 기법을 탄탄하게 재현한다. 시위를 풀고 곧게 펴면 2m에 달하는 장궁을 주로 사용하는 영국이나 일본과 달리, 한국을 대표하는 활은 대나무와 소의 힘줄, 물소의 뿔과 자작나무 껍질, 민어 부레풀 등 복합적인 재료를 사용해 짧은 길이로도 큰추진력을 만들어 내는 단궁이다.
역학적으로 보면 활의 기본 기능은 활의 탄성을 통해 근력을 저장했다가 화살의 운동에너지로 변환하는 것이다. 따라서 활의 탄성이 클수록 화살은 더 빨리 날아가고, 화살이 빨리 날아갈수록 더 먼 거리를 더 안정적으로 날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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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남이. 신묘한 활쏘기로 동생을 구한다.]
길이가 긴 장궁은 대개 시위를 풀었을 때 곧게 펴지는데 반해 한국의 각궁은 말발굽 모양으로 둥그렇게 휘어진다. 시위는 활이 휘어진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매기 때문에, 굽은 활은 M자 모양으로 휘어진다. 왜 이런 구조를 만드는 것일까. 궁수가 활을 당길 때, 시위에 걸린 장력에 보태 활이 원래 휘어진 방향으로 복원되려 하는 탄성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굽은 활은 시위를 짧은 거리만 당겨도 비교적 큰 운동에너지를 화살에 전달할 수 있고, 그 덕분에 활의 길이를 비교적 짧게 만들 수 있다. 긴 활에 비해 짧은 활이 갖고 다니기도 편리하고 화살을 새로 재는 속도도 빠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단궁의 장점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남이가 영화의 후반부에서 사용하는 애깃살, 즉 편전은 조선에 특유했던 비장의 기술이다. 편전은 화살 길이의 대나무를 반으로 갈라 시위에 재고, 그 안에 일반 화살의 1/2에서 1/3가량 되는 짧은 화살을 장전해 쏘는 것이다. 화살이 가벼워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살이 활을 떠나기 전까지 대통 안에서 곧은 방향으로 더 오래 힘을 받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다. 편전은 전장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 조선의 비기였다. 따라서 조선의 군대는 그 기법을 기밀로 유지하기 위해 편전을 보이는 곳에서 연습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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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청나라 군대의 모습. 상세한 고증으로 당시 청나라 군사의 모습을 훌륭히 재현했다. (우) 사진의 자세에서 시위에 화살을 얹는 부분인 오늬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 쥐면 더 강하게 활이 날아간다.]
곡사의 비밀은 ‘궁사의 모순’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기법이 있다. ‘곡사(曲射)’라고 일컫는 기술이다. 화살이 휜 경로로 날아가게 만들어 궁사가 은신처에 몸을 숨긴 채로도 활을 쏘거나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숨길 수 있다. 화살, 총알, 대포알 등 무기로 사용되는 물체들은 중력의 영향을 받아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 궤도는 성이나 요새 같은 구조물을 공격하는 데 실제로 유용하다. 포신을 하늘 방향으로 올려 쏘는 곡사포는 대표적인 장치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곡사법은 흥미를 더하기 위해 고안된 가상의 기술인것처럼 보인다. 화살이 중력으로 인해 떨어지는 수직 방향이 아니라 수평 방향으로 휘어지며 날아가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야구공에 적절한 회전을 주어 공이 휘어진 경로로 날아가게 하는 투구법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극중 남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화살에 경구로 적혀 있기도 하지만, 국궁을 쏘는 중요한 기법 중 하나는, 시위에 걸리도록 화살의 끝을 파놓은 부분인 오늬를 반시계 방향으로 비틀어 쥐는 것이다. 이 기법은 본래 활을 치켜들 때 실수로 화살을 떨어트리는 것을 막으려는 절차이지만, 활을 떠날 때 비틀어 쥔 것과 반대 방향, 즉 시계방향의 회전력을 주어서 화살이 안정적인 궤적을 따라 날아갈 수 있게 해준다. 목표물을 뚫는 힘을 강화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총신 내부에 나선형 구조를 만들어 총알에 회전력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더 중요한 사실은 화살이 본래 수평 방향에서 약간 비틀어진 궤도를 날아간다는 점이다. 이는 ‘궁사의 모순(archer′s paradox)’이라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화살은 활을 겨눌 때 화살촉 부분이 활과 맞닿는 부분인 줌통(정확히는 출전피)을 스치면서 날아간다. 화살이 조준된 방향은 활의 두께 때문에 줌통을 쥔 손과 시위를 당긴 손이 이루는 힘의 직선 방향과 약간 어긋나게 된다. 이 차이 탓에 화살은 활을 떠날 때 출전피를 스치면서 시위를 당긴 것과 반대 방향으로 살짝 휘게 되고, 이렇게 휜 화살은 다시 화살 자체의 복원력 때문에 조금 더 휜다. 즉 화살은 원래 조준한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휘어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목표물을 맞히려면 화살의 탄성 역시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 영화 속의 궁수들이 적을 맞춘 화살을 다시 뽑아 사용하는 것은 갖고 다닐 수 있는 화살의 개수가 한정돼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한 화살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활뿐만 아니라 화살 역시 고도의 제작 기술을 필요한 도구다.
활을 쏘는 순간에는 바람도 고려해야 한다. 화살깃이 필요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물체가 공중을 비행할 때 그 물체의 무게중심을 흔드는 공기를 비롯한 여러 힘이 작용한다. 화살깃은 무게중심이 흔들릴 때 공기저항을 증가시켜 본래 겨냥한 방향으로 날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그 힘은 활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의 바람에 따라 다르다. 남이가 쏘는 활이 신묘한 까닭은 바람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주변의 상황을 순간적으로 감지해 계산하는 감각을 바탕으로 쏘는 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