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선전포고도 없이 짓밟으면서 시작됐다. 1차대전 이후 겨우 독립한 폴란드는 유대인들의 천국. 폴란드 정부는 3백만명(인구의 15%)이 넘는 유대인들을 위해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시민권과 자치체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유대인들의 씨를 말리려고 했던 히틀러와 나치스에게 폴란드는 눈엣가시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이 유대인의 씨 말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40년 4월. 폴란드 남부 오슈비엥침(독일어로 아우슈비츠)에 ‘죽음의 공장’으로 불리는 아우슈비츠강제수용소(독일은 아우슈비츠 외에도 여러 곳에 강제수용소를 둠. 아우슈비츠는 그곳의 대표격.)를 세운 뒤부터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나치스의 친위대(SS)와 국가비밀경찰(게슈타포)의 우두머리였던 하인리히 히믈러(1900-1945)가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기 위해 과학적으로 설계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약 4백만명. 3분의 1은 유대인이고, 나머지는 폴란드인, 집시, 동성연애자였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을 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는 7천6백여명에 불과했다.
아우슈비츠에 기차가 도착하면 잡혀온 사람들은 3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첫번째 그룹은 몇시간만에 독가스실로 보내진다. 이렇게 사라지는 사람들은 하루 2만명에 이른 적도 있다. 두번째 그룹은 공장 일꾼. 아우슈비츠에 끌려와서 공장 일꾼으로 일한 사람은 40만명이었는데, 34만명이 기아, 질병, 매 등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 물론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독일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1908-1974)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 사람도 있었다. 그래봤자 고작 1천여명이었다. 마지막 그룹은 실험용으로 쓰일 쌍둥이와 난쟁이들로 ‘죽음의 천사’로 불린 요제프 멩겔레(1911-1985?)에게 넘겨졌다.
아우슈비츠 포로들 사이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사람은 나치스 친위대 의사였던 멩겔레다. 그는 기차에서 내리는 포로들을 제일 먼저 맞이했다. 그리고 줄을 선 그들 앞에서 권총을 좌우로 흔들었다. 왼쪽이면 독가스실, 오른쪽이면 강제노동소로 향해야 했다.
특히 멩겔레는 쌍둥이 어린이 실험으로 유명하다. 그는 2백여쌍의 일란성 쌍둥이들을 모아 그 행동을 관찰하고, 필요하면 그들의 손을 붙잡고 즉시 해부실로 향했다. 그의 실험 중 특이한 것은 홍채 실험. 어린아이들의 눈에 메틸렌 블루를 주사해 눈의 색깔을 푸른색으로 바꾸는 실험이다. 멩겔레가 이와 같은 실험을 통해 꿈꾸는 것은 인종 바꾸기. 다른 인종을 푸른 눈을 가진 아리안 인종으로 새롭게 창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에는 거세(去勢) 방법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호르스트 슈만. 그는 히믈러로부터 매일 3천-4천명 포로들의 생식능력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X선 불임장치. 그는 포로 중에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선발한 다음 그들을 발가벗기고 5-8분 동안 X선을 쐬었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작은 기구를 항문으로 집어넣고 남자의 전립선을 건드려 억지로 사정하게 만들고, 여자의 나팔관 끝에서 난소를 잘라냈다. 물론 실험조건을 변화시키지 않기 위해 마취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개발한 그의 거세장치는 매일 1천명의 사람들을 처리해냈다.
클라우베르크 박사 역시 여자들에게 주사할 불임약을 개발했다. 그는 방부제로 쓰는 포르말린이나 마취제로 사용하는 노보카인을 여성의 나팔관에 주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실험에 참가한 여자들은 자궁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겪었지만 독가스실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실험에 적극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믈러는 이 방법을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
멩겔레, 슈만, 클라우베르크 등 아우슈비츠에서 생체실험에 참가한 의사들은 꽤 많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전범으로 감옥에 간 사람은 20여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도망치거나 이름을 감춘 채 활약했다.
멩겔레는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브라질 등을 전전하면서 산부인과 의사로 활약했다. 슈만은 아프리카로 건너가 수단, 가나 등을 돌면서 병원장 노릇을 했다. 그리고 클라우베르크는 연합국에 체포되자 자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사들은 전승국인 미국과 러시아로 건너갔다.
2차대전이 끝나자 미국과 러시아는 독일이 개발한 갖가지 첨단장비와 과학자들을 먼저 차지하려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독일이 보유했던 의학, 로켓, 비행기, 전자공학 등에 관한 지식이 탐났던 것이다.
미국이 독일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세운 비밀계획은 ‘페이퍼클립’(Paper Clip). 이를 통해 미국은 1955년까지 7백60여명의 과학자들을 흡수했다. 물론 이들에게는 미국시민권이 주어졌고, 동시에 나치스에 협력했던 경력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페이퍼클립 계획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간 대표적인 사람은 로켓과학자인 폰 브라운(1912-1977)과 항공우주의학의 선구자인 슈트루크홀트(?-1986)이다. 폰 브라운과 슈트루크홀트는 미국이 달을 정복하는 아폴로 계획을 추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페이퍼클립 계획은 1957년 옛서독이 제지할 때까지 계속됐다.
미국은 나치스 과학자들을 전범으로 처형하지 않고 비밀리에 흡수한 것처럼, 일본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에 참여한 의사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세균실험
유럽에서 독일의 나치스가 맹위를 떨치고 있을 무렵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선언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만주를 삼킨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이 특별히 관심을 갖는 무기는 생물학무기. 그래서 1936년 만주를 침략할 때부터 세균전에 대비해 만주 하얼빈 남쪽 20km 지점에 관동군 산하 세균전비밀연구소를 세웠다. 그 이름은 전염병을 옮기지 않는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방역급수부대’라고 은폐됐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8월 ‘만주 731부대’(731부대 외 100부대도 같은 역할을 함)로 명칭을 바꾸었다.
731부대는 의사 출신의 이시이 중장이 이끌었다. 그의 부대는 히로히토 천왕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어떤 외부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비록 만주에 주둔하는 일본군이라고 할지라도 접근시에는 죽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731부대는 오랫동안 베일 속에 묻혀 있을 수 있었다.
731부대에는 바이러스, 곤충, 동상, 페스트, 콜레라, 식물 등 생물학무기를 연구하는 17개 연구반이 있었다. 각각의 연구반에서는 이를 연구하기 위해 ‘마루타’(껍데기만 벗긴 통나무라는 뜻의 일본어)라고 불리는 인간을 생체실험용으로 사용했다. 이들은 대부분 만주와 한반도에서 잡혀온 중국인과 조선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학실험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된 실험들은 눈을 뜨고 볼 수 없고 귀를 열고 들을 수 없을 만큼 잔인했다.
고속원심분리기에 사람을 넣어 생피를 짰고, 혈관에 말의 피를 넣는가 하면, 인체의 70%가 수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루타를 한증막에 넣고 수분을 짜냈다. 또 정맥에 공기를 불어넣거나 거꾸로 매달아 몇시간 만에 죽는지를 알아보는 기상천외의 실험들도 이뤄졌다.
세균을 감염시킨 환자들을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막사에 넣고 전염병이 얼마나 빨리 번지는지를 지켜보는 일도 다반사였다. 물론 그러한 실험은 죽을 때까지 진행됐다.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은 채. 나중에 731부대 옆에는 커다란 뼈무덤(骨塚)이 생겼는데, 이는 세균을 옮겨놓고 피부와 내부기관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를 살피기 위해 해부하고 남는 뼈들을 버린 곳이다.
만주에 진출한 일본군들은 동상에 걸리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동상치료법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동상 연구는 요시무라반에서 이뤄졌다. 이곳에 속한 의사들은 마루타를 영하의 날씨에 세워두고 손발에 물을 뿌려가며 동상이 걸리는 메커니즘을 연구했다. 이 마루타의 손발은 얼다못해 나중에는 툭툭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말았다. 이 실험을 위해 동원된 마루타들은 아이를 둔 여자들로, 강한 모성애를 악용해 실험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최근 보도된 바에 따르면 731부대뿐 아니라 일본 의대에서도 조선인 마루타를 이용해 생체실험을 했다고 한다. 그들이 마루타로 동원한 사람 중에는 항일시인 윤동주(1917-1945)의 이름도 보인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731부대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살아남은 1백50여명의 마루타들을 모두 처형했다. 그렇다고 그 만행이 덮어질리 없건만, 2년 6개월 동안 8백여 차례에 걸쳐 치러진 도쿄전범재판에서 731부대원들이 처벌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731부대의 생체실험 자료를 미국이 갖는 대신 관련자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비밀 ‘빅딜’(big deal)이 있었던 것이다.
UFO 신드롬의 출발점 로스웰사건
1947년 6월 24일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주 미네럴 상공을 날던 케네스 아놀드는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이상한 비행물체들을 목격했다. 그는 접시처럼 생긴 이 비행물체를 '비행접시'라고 불렀다.
같은 해 7월 2일 뉴멕시코주 로스웰에서는 원반형 비행물체가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수사에 착수했던 로스웰 육군항공기지는 7월 8일 "소문으로 나돌던 비행접시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밝혔지만, 이 발표는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기상관측기구가 추락한 것이라고 번복됐다.
이번에는 목격자들이 나타나 비행접시와 함께 탑승했던 외계인들을 봤다고 진술하면서, 로스웰은 UFO와 외계인의 성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봤다는 외계인은 회색인종. 키는 1백5m, 몸무게는 23kg, 손가락과 발가락은 각각 4개, 그리고 성은 구별할 수 없었다.
로스웰 사건 이후 미확인비행물체(UFO)를 보고 외계인들을 만났다는 증언이 전세계적으로 줄을 이었다. 1948년 1월 8일 미항공 방위사령부 소속 맨텔대위가 UFO를 추적하다가 추락했다는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실리는가 하면, 1952년 7월 19일 비행통제지역인 백악관 상공에 UFO가 출현했다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UFO와 외계인에 대한 관심은 1995년 정점에 이르렀다. 로스웰에 비행접시가 추락했을 때 수거된 외계인을 검시했다는 '로스웰필름'이 공개된 것. 그러나 필름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손가락이 6개인점 등 목격자의 진술 내용과 달라 UFO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한편 UFO와 외계인들을 믿는 신앙도 생겨났다. 1997년 3월 26일 집단자살극을 벌였던 미국의 '천국의 문' 이라는 종교단체가 대표적. 당시 천국의 문 신도들은 헤일-밥혜성이 접근하자 그 꼬리에 UFO가 숨어있다고 생각하고 그들과 조우하기 위해 육신을 벗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