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에 털이 난 코뿔소, 고릴라만한 여우원숭이, 매머드 등 대형동물들이 맹위를 떨치던 빙하시대. 그러나 빙하시대 최고의 주인은 인간이었다. 빙하시대는 지금과 어떻게 달랐으며, 인간은 어떻게 빙하시대를 거치면서 진화해 왔을까.
빙하기란 기온이 낮아 지구 표면에 넓게 얼음이 뒤덮여 있던 시기를 말한다. 흔히 ‘빙기’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빙하기는 수천만년에 이르는 빙하시대를, 빙기는 수만년의 짧은 기간을 일컫는다.
지구 역사에는 수많은 빙하기가 있었다. 최근의 것은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2백50만년-1만년 전)에 시작됐으며, 그 안에 귄츠(60만년-55만년 전), 민델(45만년-38만년 전), 리스(24만년-15만년 전), 뷔름(7만년-1만5천년 전) 등 네차례의 주요 빙기가 있었다. 빙기의 구분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알프스의 뷔름 빙기는 북아메리카의 위스콘신 빙기에 해당된다. 빙기와 빙기 사이에는 기후가 온난한 간빙기가 있었는데, 우리는 지금 간빙기에 살고 있다.
빙하 퇴적물에 들어 있는 유기물을 탄소동위원소를 이용해 연대를 측정하면 가장 가까운 뷔름 빙기는 지금으로부터 1만8천년 전에 최대기를 맞았다(그림1). 당시의 연평균 기온은 지금보다 10℃ 가량 낮았고, 설선고도(눈이 쌓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경계선 높이로 적도지방으로 갈수록 높아짐)도 3백60-4백20m 정도 낮아졌다.
당시 그린란드,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의 북유럽, 캐나다와 미국 북부 등의 북아메리카, 그리고 남극대륙 주변에는 얼음이 광범위하게 덮고 있었다. 또 아시아, 남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지의 고산지대도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그런데 1만1천년 전부터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얼음으로 덮인 지역이 남극대륙, 그린란드, 히말라야와 안데스의 고산지대로 축소됐다. 현재 빙하는 육지면적의 약 11%를 덮고 있으며, 그 중 86%는 남극대륙에, 11%는 그린란드에 있다.
빙하기의 원인으로는 대륙의 위치 변동과 융기,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감소로 인한 온실효과 감소, 지구 공전궤도나 자전축의 주기적 변화 등 많은 가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아시아인
빙기가 되면 바닷물이 눈과 얼음 형태로 육지에 쌓여 해수면이 낮아진다. 리스 빙기와 뷔름 빙기에는 해수면이 각각 1백59m, 1백33m 정도 내려갔다. 따라서 바다가 얕은 곳에서는 빙기가 되면 육지가 연결되고, 간빙기가 되면 육지가 분리되는 일이 일어나 생물의 분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은 수심이 낮은 베링해협이 아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 대륙을 갈라놓고 있지만, 빙기 때만해도 해수면이 내려가 두 대륙은 서로 연결돼 있었다. 이 연결통로를 따라 많은 생물들이 이동했음은 물론이다. 북아메리카에서 진화한 낙타나 말은 아시아로 이동했고, 매머드, 들소, 사향소 등은 반대로 아시아에서 북아메리카로 이동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약 3만년 전에 아시아에서 북아메리카로 이동했다.
빙기와 간빙기가 되풀이되면서 기후가 온난한 때(간빙기)에는 온대종이 북상하고, 한랭한 때(빙기)에는 한대종이 남하해 육상 동·식물의 분포형태가 크게 변화했다.
빙기에는 기온이 내려가고 건조해지므로 식물상도 바뀐다. 우선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지대가 적도 쪽으로 축소됐다. 빙상 주변지역은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이끼나 지의류가 뒤덮인 툰드라지대가 됐다. 한때 북아메리카에서는 툰드라지대의 위도가 뉴욕시 부근까지 확장됐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영국, 프랑스 북부, 독일, 폴란드 일대에 툰드라지대가 형성됐다.
빙기 때 번성한 식물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남하해온 빙하와 한랭한 기후에 잘 적응한 이끼류와 담자리꽃나무(Dryas octopetala). 이들은 콩과식물처럼 뿌리에 공생박테리아를 가지고 있어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해 영양분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빙기의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랐다.
빙기가 지나가고 땅이 모습을 드러내자, 새로운 식물들이 재빠르게 이 불모의 토지를 정복해 푸르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알래스카 글래시어(빙하)만에서는 빙하가 녹아 땅이 드러나자, 10년 만에 이끼가 자라고 풀이 나기 시작했다. 수십년이 지나자 키 작은 나무와 덤불들이 자랐으며, 1백여년이 흐르자 가문비나무와 같은 키 큰 나무들이 숲을 이뤘다. 대표적인 식물의 천이과정을 보여주는 셈이다.
간빙기에 대형동물 멸종
3만년 전 빙하기에는 대형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유럽에는 거대한 사슴, 몸에 털이 난 코뿔소, 매머드, 사자들이 살았고,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코뿔소만한 유대류와 거대한 파충류가 살았다. 마다가스카르섬에는 고릴라만한 여우원숭이와 타조의 3배나 되는 날지 못하는 새가 살았다.
그러나 1만5천년 전 빙기가 간빙기로 바뀔 때 많은 대형동물들이 멸종했다. 물론 전에도 기후변동으로 동물들이 큰 피해를 입은 적은 있었지만 이때처럼, 특히 대형동물이 전지구적인 규모로 피해를 본 적은 없었다. 그 후로 멸종은 계속 이어져 4천년 전에는 마지막 매머드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단지 화석만이 한때 거대한 동물들이 살았음을 알려줄 뿐이다. 왜 대형동물들이 멸종했을까.
기후변화설에 따르면 간빙기가 되면서 중위도 지역의 기온이 올라가자 초원에 풀 대신 나무가 자라게 됐다. 점차 초원의 면적이 줄어들자 먹이부족으로 대형 초식동물이 멸종하게 됐고, 뒤따라 이를 잡아먹던 대형 육식동물들도 멸종했다. 앨프리드 월리스(1823-1913)는 찰스 다윈(1809-1882)과 함께 자연도태에 의해 진화가 이뤄진다는 진화론을 주창한 영국의 박물학자다. 그는 대형동물들의 멸종 원인이 간빙기가 도래하면서 생태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에 인간에 의해 멸종됐을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과학자들은 아직 기후변화설과 인간멸종설 사이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 인간에 의한 멸종설이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현재도 지구상에 남아있는 고래나 코끼리와 같은 대형 육상동물이 인간에 의해 멸종 위기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는 빙하기 때 캘리포니아지역에서 살았던 동·식물의 화석을 볼 수 있는 페이지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박물관 근처의 타르웅덩이에서 발견된 59종의 포유동물과 1백35종의 새 등 6백60종이 넘는 생물들의 화석을 전시하고 있다.
타르웅덩이는 원유가 지각의 갈라진 틈으로 스며 나와 기름의 휘발성분은 증발해버리고 끈적끈적한 아스팔트와 같은 액체만 남아 만들어진다. 처음 사람들은 이곳에서 가끔 발견되는 뼈가 실수로 빠진 가축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901년부터 시작된 과학적인 조사는 꽤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지금은 멸종된 매머드와 마스토돈(매머드와 흡사함), 긴뿔 들소, 스밀로돈(칼이빨 고양이) 등의 대형동물의 뼈가 발견된 것이다. 특히 스밀로돈의 뼈가 매우 많아 당시 이 동물이 남·북아메리카에 폭넓게 분포했음을 보여줬다.
타르가 아닌 얼음 속에 묻혀 화석이 되는 경우도 있다. 얼음 속에서는 미생물이 번식하기 힘들어 뼈는 물론이고 근육과 같은 연한 부분이 잘 보존된다. 시베리아 툰드라지대의 얼음 속에서 발견된 매머드는 상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돼, 발굴단을 따라간 개들에게 살점을 던져주었더니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발견 당시 그 매머드는 뼈의 일부분이 부러져 있었고 피가 나 있으며 입에는 먹다 만 먹이를 물고 있었다. 먹이를 먹다가 갑자기 얼음구덩이로 빠졌던 모양이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서는 최근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해 코끼리의 암컷에서 매머드를 출산시킬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정자는 얼음 속에 있던 수컷 매머드에서 얻고, 난자는 암컷 코끼리의 것을 사용한다는 것. 머지않아 사라졌던 매머드가 시베리아에 다시 출현해 ‘쥬라기 공원’이 현실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매머드는 유라시아뿐 아니라 북아메리카에서도 발견된다. 1974년 미국 사우스다코다주의 핫스프링스에서는 약 2만6천년 전에 구덩이에 빠져 죽은 두 종류의 매머드가 발견됐다. 한 종은 콜럼비아 매머드(Mammuthus columbi)로 알래스카에서 미국의 중서부를 거쳐 멕시코와 중미에 살았다. 이것은 1백만년 전 베링 해협이 육지였을 때 아시아에서 북아메리카로 들어간 매머드(Mammuthus meridionalis)의 후손이다. 키는 4m, 몸무게는 8-10t에 이르고 하루에 2백kg이 넘는 식물을 먹어 치웠다. 콜럼비아 매머드의 수명은 50-80년으로 추정되며 여태까지 51마리가 확인됐다.
또 다른 종은 긴털 매머드(Mammuthus primigenius)로 콜럼비아 매머드에 비해 몸집이 작았다. 키가 3.3m, 몸무게는 6-8t 정도. 과학자들은 2만6천년 전 빙하가 사우스다코다주까지 발달했을 때 이 매머드가 이동해온 것으로 생각한다. 매머드화석이 발견된 곳에는 매머드 사이트라는 박물관이 세워졌다. 이 박물관이 올해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개관 25주년 기념행사를 연다고 한다.
빙하기 속에서 커온 인류
현재까지 발견된 모든 인류화석은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 지층에서 나왔다. 플라이스토세 전기인 도나우 빙기(1백만년 전)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열대지방에 살고 있었다. 귄츠-민델 간빙기에서 리스 빙기에 걸치는 플라이스토세 중기에는 호모 에렉투스(‘직립인’이라는 뜻)가 생존했고, 그 사이에 뇌가 발달하고 얼굴 모습이 크게 진화했다. 이 시대에는 인류의 분포범위도 상당히 확대됐다.
플라이스토세 후기인 리스-뷔름 간빙기에서 뷔름 빙기의 중기에는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다. 뷔름 빙기의 중기에서 후기 사이에는 현대인과 아주 흡사한 크로마뇽인이 나타났다. 뷔름 빙기가 끝날 무렵 인류의 구석기시대도 마감했다. 그리고 간빙기가 시작되자 신석기문화가 들어서면서 인류문화는 급속히 발달했다.
‘인류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신생대 제4기의 대부분을 점하는 플라이스토세는 찬 기후가 지구를 지배하는 빙하기였다. 빙기와 간빙기가 교대하면서 대부분 지역이 온대에서 한대, 한대에서 온대로 기후변화를 겪었다. 이에 따라 무더위와 홍수, 추위와 가뭄이 번갈아 일어났다. 기후변화는 오히려 인류의 적응능력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류는 극심한 기후변화를 피해 살기좋은 곳을 찾아 옮겨다녔다. 해수면이 낮아져 대륙 사이, 대륙과 섬 사이에 통로가 생기자 많은 동물들이 도처로 이주했고 인류도 이들을 따라나섰다. 마지막 빙기에 아시아인이 베링해협을 통해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것이 한 예이다. 활발한 이주로 인해 지구상에 인류가 살지 않는 곳은 거의 없게 됐다. 또한 지역간 생물들의 활발한 교류는 지역적으로 고립된 진화를 막았다. 한편 인류 상호간의, 인류와 다른 동물간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짐에 따라 이에 적응하지 못한 생물들은 빠른 속도로 자연도태의 길을 걸었다.
인류의 문명은 빙하기로 말미암아 발달했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공동으로 작업했던 것은 빙하기와 같이 전지구적으로 찾아온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환경변화와 이에 대한 적응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까지도 열대에서 원시생활을 하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지구역사를 보면 인류문명이 시작되고 거대한 동물이 멸종된 간빙기는 언젠가 끝나고 빙기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간빙기는 이미 1만년이 지났기 때문에 과거의 간빙기가 8천년-1만2천년 동안 계속됐음을 볼 때 빙기가 찾아올 날은 그리 멀지 않다(우리 세대에 찾아오지는 않겠지만).
다시 빙기가 온다면 인간들은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현재 극지방에 살고있는 생물들이 그 지혜를 가르쳐줄지 모른다. 남극대륙에는 이끼나 지의류를 제외하고 육상식물이 거의 없다. 따라서 이곳의 생태계는 주로 바다에 있는 식물플랑크톤이 광합성을 해 만든 유기물에 의존하게 된다. 생물이 살 것 같지 않은 빙산에도 박테리아, 미세 조류, 원생동물, 작은 무척추동물 등 2백여종이 넘는 생물들이 부착해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남빙양의 바닥에도 말미잘, 갯지렁이, 옆새우, 불가사리, 성게, 해면, 조개 등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저서생물들이 살고 있다(한국해양연구소 홈페이지(www.kordi.re.kr)를 참고하면 남극생물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음).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추위에 적응하는 방법을 개발해 진화해 왔다. 남빙양에 살고 있는 어류는 저온에서도 효소를 이용해 대사작용을 유지할 수 있다. 또 당펩티드를 가지고 있어 해수 온도가 -1.86℃까지 내려가도 체액이 얼지 않는다.
또한 북극곰은 먹이를 먹지 못하면 혈액 중의 요소와 크레아티닌의 상대적인 비율을 떨어뜨려 생리적으로 동면상태를 유지해 에너지를 절약하며 활동한다. 이와 같이 추운 곳에 사는 생물들은 생리 메커니즘을 조절해 환경에 적응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빙하기 때의 한반도 - 황해가 육지로 변해
플라이스토세 빙하기 때 한반도의 모습은 어땠을까. 우선 해수면이 내려갔기 때문에 한반도 주변환경이 지금과 사뭇 달랐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당시에는 수심이 1백m 이내인 황해가 육지로 변해 한반도가 중국 대륙과 연결돼 있었다. 동해는 부산과 쓰시마섬 사이의 대한해협, 일본 본토와 훗가이도섬 사이의 쓰가루해협, 훗가이도섬과 사할린섬 사이의 소야해협, 사할린섬과 러시아 사이의 타타르해협 등의 수심이 낮아지는 바람에 인근 대양으로부터 해수가 유입되는 것이 제한됐다.
이러한 사실은 부유성 유공층을 연구한 결과가 뒷받침한다. 동해의 울릉분지에서 발견되는 단세포 동물플랑크톤에 속하는 유공충은 수온이 낮으면 껍질이 왼쪽으로 감겨있는 개체가 오른쪽으로 감겨있는 개체보다 많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퇴적층에서 왼쪽으로 감겨있는 것이 더 많았다. 이는 빙기 동안에 수온이 높은 쓰시마해류의 유입이 적었음을 뜻한다.
한반도 주변의 대륙붕에 쌓인 퇴적물은 제4기의 마지막 빙기 때 형성된 것이다. 이 퇴적물을 조사하면 당시의 환경, 지리, 해류의 흐름 등을 이해할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연구는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