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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탄생한 컴퓨터

튜링의 생각하는 기계


현대 컴퓨터와 생각하는 기계(인공지능 컴퓨터)를 고안했던 튜링.


1939년 2차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과학자들은 거리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비밀리에 모인 곳은 거대한 빅토리아식 영지가 자리잡고 있는 런던 근교의 블레츨리 파크. 이곳에서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직까지도 일급비밀이다, 확실한 것은 그곳에 암호를 다루는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

27살의 앨런 튜링(1912-1954)도 이곳으로 불려온 과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37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유학하던 시절 오늘날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튜링머신’을 수학적으로 고안해냈다. 튜링머신은 명령어와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이는데, 튜링은 구멍 뚫린 종이테이프에 필요한 명령을 입력하면 마치 자동기계처럼 컴퓨터가 작동할 것이고 설명했다. 헝가리 출신의 프린스턴대학 수학교수인 폰 노이만(1903-1957)이 그의 아이디어를 보고 프린스턴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지만, 튜링은 미국에서 일할 생각이 없었다.

1938년 박사학위를 받고 영국으로 돌아오자 튜링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폴란드 출신의 젊은 공학자 레빈스키였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쫓겨난 그는 독일의 암호제조장치인 에니그마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2차대전이 발생하자 튜링과 레빈스키는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사령부에 배속됐다.

1943년 12월 영국은 콜로서스(거인이라는 뜻)라는 세계 최초의 연산컴퓨터를 만들었다. 이것은 2천4백개의 진공관을 이용해 암호만을 전문적으로 깨는 컴퓨터였다. 초당 5천자의 암호문이 종이테이프를 타고 들어가면 콜로서스는 에니그마의 암호와 일치할 때까지 암호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암호를 풀었다. 흔히 세계 최초의 디지털컴퓨터라고 알려진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에니악은 알고보면 콜로서스보다 2년 늦게 제작된 것이다.

1944년 봄 영국은 콜로서스를 이용해 독일 서부를 지키는 룬슈테트 사령관과 베를린사령부와의 교신을 청취해 그 암호를 푸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6월 6일(‘D데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옴) 2차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콜로서스의 존재는 1970년대 후반까지 비밀이 누설되지 않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 덕에 에니악은 최초의 컴퓨터라는 지위를 누렸다.

2차대전이 끝나자 튜링은 국립물리학연구소와 더불어 자동계산기를 연구했다. 그러나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곤경에 처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매우 역사적인 논문을 썼다. 1950년에 발표한 ‘컴퓨터와 지능’이란 논문이다. 이것은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동일한 질문에 대해 컴퓨터와 인간이 똑같은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곧 컴퓨터가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의 생각은 30여년 뒤인 1980년대에 이르러 인공지능을 활용한 전문가시스템으로 부활했다.

천재수학자였던 튜링의 생애는 자살로 끝났다. 동성연애 때문에 풍기문란죄로 기소된 그는 무기력증을 견디지 못하고 청산가리가 든 사과를 베어문 것이다.

컴퓨터의 아버지는 누구?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계산하는 기계를 처음 생각한 사람은 영국의 수학자인 배비지(1792-1871)였다. 그는 1822년 표계산하는 소형 미분기를 발명한 바 있다. 그해 6월 왕립천문학회에 참석한 그는 최초의 자동계산기를 만들어 보겠다고 장담했지만 끝내 완성하지는 못했다.

배비지의 생각을 처음 실현한 것으로 흔히 1944년 하버드대학 교수인 에이킨(1900-1973)이 만든 ‘마크 1호’를 꼽는다. 평소 배비지의 정신적인 후계자임을 자임했던 그는 IBM과 더불어 대형계산기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마크 1호는 비록 전기기계 방식의 컴퓨터였지만, 프로그램에 의해 훌륭하게 계산을 해냈다. 마크 1호의 성능은 4명의 전문가가 3주 걸려야 풀 문제를 19시간 만에 해결하는 정도.

최초의 진공관 컴퓨터는 1946년 2월에 공개된 에니악(ENIAC). 1만7천여개의 진공관을 사용한 30t의 괴물인 에니악은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모클리(1907-1980)와 에커트(1919-)가 미육군의 포탄과 미사일의 탄도계산을 하기 위해 발명했다. 에니악은 훗날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했다. 에니악의 결점은 기억장치가 없다는 것. 이러한 미국 중심의 컴퓨터 역사는 그동안 일급비밀로 감춰졌던 영국의 콜로서스가 공개됨에 따라 무너졌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아타나소프(1903-) 교수가 자신이 최초의 컴퓨터 발명가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1937년 컴퓨터에 관한 몇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 중에는 컴퓨터의 부품으로 진공관같은 전자부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메모리와 2진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담겨 있다. 그는 전기기계식방식이 1초에 수백번밖에 점멸할 수 없지만, 진공관은 1초에 수천번을 깜빡거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처음으로 메모리라는 말을 사용했고, 전기회로의 점멸을 1과 0으로 나타냈다.

아타나소프는 1939년 11월 제자인 베리와 함께 ABC(아타나소프와 베리의 컴퓨터)라는 컴퓨터를 만들었다. 이 컴퓨터는 3백개의 진공관과 메모리 충전장치까지 갖췄지만, 옆에서 카드천공기를 돌릴 사람이 필요하다는 약점을 지녔다. 여하튼 아타나소프는 1950년대 초반부터 ‘누가 최초인가’를 놓고 에니악의 특허권자에 시비를 걸었다. 결국 이것은 법정소송으로 번졌으며 1973년 10월에야 결말이 났다. 승리자는 아타나소프였다.

한편 지금까지의 얘기를 뒤집는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독일의 콘라트 쥬제(1910-)이다. 그는 1938년 2진법 연산장치, 메모리 숫자 명령 등의 흐름을 관리하는 제어장치, 천공테이프에서 명령을 읽을 입력장치, 결과를 보여주는 출력장치를 갖춘 ‘Z1’이라는 컴퓨터를 완성했다. 한편 그는 1945년 ‘플란칼쿨’이라는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하기도 했다.

1999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홍대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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