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정자와 난자가 없으면 수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많이 바뀌고 있다. 정자와 난자의 아버지뻘에 해당하는 원시세포를 이용해 무정자증과 무난자증을 치료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청년, 중년, 노년을 거치는 것처럼, 정자와 난자에게도 자라나는 단계가 있다. 완전히 성숙한 정자와 난자가 만나야 수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들 생식세포가 미성숙한 탓에 임신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1996년 9월 서울 영동제일병원에서 ‘무정자증’으로 판명된 아버지가 쌍둥이를 출산케 해서 화제를 모았다. 이어서 1997년 12월 대구하나병원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성공했다고 발표됐다. 성숙한 정자가 만들어지기 직전 단계의 원형정세포(round spermatid)를 정소에서 추출해 부인의 난자에 직접 주입함으로써 임신에 성공한 경우다. 세포의 모양은 이름 그대로 둥글기만 할 뿐 정자와 달리 머리와 꼬리가 분화되지 않았다. 성숙한 정자 대신 원형정세포를 사용했다는 점만 ICSI와 다르다.
정자가 정소에서 만들어지는데는 70여일이 소요된다. 정자는 정원세포에서 제1정모세포, 제2정모세포, 그리고 원형정세포를 거친 후 만들어진다. 이 기간 동안 일어나는 일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염색체수를 일반 세포에 비해 절반으로 줄이는 일이다.
사람의 세포에는 46개의 염색체가 존재한다(일반 염색체 44개, 성염색체 X·Y). 아기가 46개의 염색체를 가지기 위해서는 아버지(정자)와 어머니(난자)로부터 각각 23개의 염색체를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정자와 난자가 성숙하는 과정에서 염색체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야 한다. 정자의 형성에서 23개 염색체를 가지기 시작하는 단계는 제2정모세포부터이며, 국내에서 시술에 성공한 원형정세포는 정자와 가장 가깝게 분화된 상태다.
이처럼 원형정세포를 난자에 직접 주입하는 방법을 ROSI(ROund Spermatid Injection)라고 한다. 성숙한 정자처럼 머리와 꼬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전달하려는 유전자만 제대로 전달하면 되는게 아니냐’는 것이 ROSI의 착안점이다. 현재 과학자들은 제2정모세포도 같은 방법으로 이용하려는 실험을 동물을 대상으로 수행하고 있다. 머지않아 제2정모세포를 활용한 불임치료가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는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아버지 불임이 유전될 가능성
이전까지 정자를 하나도 만들지 못하는 남성의 경우 타인의 정자를 제공받아야 임신이 가능했다. 하지만 ROSI의 등장으로 무정자증을 정복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됐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다. 이 세포로 태어난 아기가 남성일 경우 아버지처럼 무정자증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의 일부 부국가에서는 ROSI의 사용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여성의 난자는 정자와 유사한 단계를 밟으며 성숙해진다. 즉 난원세포, 제1난모세포, 제2난모세포를 거쳐 난자가 생성된다. 그런데 여성은 태아 시기에 모든 난원세포(약 2백만개)가 제1난모세포 단계로 변한다. 사춘기에 이르기 전 이 가운데 4분의 3이 퇴화하고, 초경이 시작되면 남은 것 중에 하나가 선택돼 매달 성숙한 난자로 배출된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성숙한 난자로 자랄 수 있는 수는 4백-5백개에 머문다).
만일 난자의 성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생식세포는 제1난모세포 단계에 그대로 머문다. 이때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치료책은 성호르몬제를 주입해 성숙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성호르몬제를 써도 효과가 없거나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여성의 경우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즉 미성숙한 난자를 일단 추출하고 이를 시험관에서 성숙시키자는 발상이다. 여기에 ICSI나 ROSI를 통해 정자와의 만남을 추진하면 수정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방법은 이미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30%에 가까운 임신성공률을 보이는 불임클리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