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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유인력을 처음으로 이해한 한국인 최한기

최한기는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가장 선구적으로 서양의 근대과학 지식을 이해하고 소개했다. 그는 물리학, 박물학, 천문학, 의학, 화학에 이르는 수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을 기(氣)라는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는 꿈을 지닌 철학자였다.

혜강 최한기(1803-1877)는 1803년(순조3년) 아버지 최치현과 어머니 청주 한씨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이 몇 대에 걸쳐 개성에서 뿌리내리고 살았는데, 아마도 그가 태어난 곳도 개성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서울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어린 시절이나 성장기는 물론 일생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그는 큰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집안은 본래 양반가문이기는 했지만, 그의 직계 조상 중에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거의 없는 평범한 가문이었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 때에 무관이 돼 가문이 힘을 얻는 듯 했으나 그리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최한기 자신도 거의 평생을 생원이라는 변변하지 못한 양반으로 지냈다. 최한기는 1825년 23세때 생원시에 합격했다.

생부와 양부가 모두 학문을 가까이 했기 때문에 최한기는 자연스레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그는 책을 읽다가 심오한 뜻을 만나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스스로 이해하고 연구했다고 하니 상당히 사색적이고 탐구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책을 사랑한 책벌레

최한기는 서울에서 주로 활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30대에는 서울의 남대문 부근에서 살았고, 40대 후반에는 경복궁 근처에 살았다. 그는 양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아 식자층에서는 꽤나 알려진 부자였다. 당시 조선에는 중국에서 나온 새로운 서적이나 서양과학의 번역서들이 많이 수입되고 있었다. 일반인들이 구하기 쉽지 않은 책들을 최한기는 누구보다도 먼저 구입해서 탐독했다.

최한기는 이미 20대 후반부터 상당한 정도의 학문적 식견으로 주위에 알려져 있었다. 그는 기존의 성리학이 아닌 새로운 학문에 심취해 저술에 힘썼는데, 중국으로 유입된 서양의 과학기술서적을 탐독하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저술을 20대 후반부터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동안 1천권 이상의 책을 지어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것은 1백20권 정도로 명남루전집(明南樓 全集), 명남루총서(明南樓叢書) 등으로 묶여있다.

그는 최신의 서적과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료학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를 쓴 이규경도 많은 서적을 소유한 것으로 유명했지만, 그마저도 최한기의 서재를 구경하고 나서 “정말로 희귀하고 중요한 서적이 많다”고 부러워할 정도였다. 최한기는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란 책은 모두 사들였기 때문에 전국의 서적상들이 앞다투어 최한기에게 책을 팔기 위해 모여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특히 조선에 들어오는 중국 서적은 먼저 최한기의 손을 거쳤다고 하니, 그의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 번은 책값이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는 지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책을 지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천리라도 불구하고 찾아가야 하지만, 지금 이 책으로 나는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그를 만날 수 있으니, 식량을 싸 가지고 먼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그는 당시의 유수한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쓴 이규경과의 교유가 특별하다. 김정호와의 교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최한기는 특히 지리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는 많은 서양 지리서적을 읽고 서양의 사정을 당시의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저작에는 그가 섭렵한 중국서적으로부터 얻은 세계지리에 대한 많은 자료들을 묶어놓고 있다. 또한 그는 개화파의 거두였던 김옥균과도 깊이 사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작살은 앞쪽으로 던져야

그는 한마디로 1830-1870년대까지 이 땅에서 서양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열심이었던 학자였다. 그가 33세의 젊은 나이(1836년)에 지은 ‘추측록’(推測錄)과 ‘신기통’(神氣通)이라는 책은 한국의 철학사에서 경험철학의 가장 대표적인 명작으로 꼽힌다. 그가 젊은 나이에 이렇게 독창적이고 중요한 저술을 할 수 있었던 배경도 일찍부터 섭렵해왔던 서양과학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최한기는 서양의 근대적인 물리학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이해하고 다시 소개한 사람으로 과학사에서 주목을 끈다. 그는 초기 저작에서부터 빛, 소리, 온도, 습도에 대한 서양의 근대과학지식을 소개하고, 이것을 자신의 기철학을 세우는 과학적 기초로 활용했다. 그는 음파의 진행원리를 원용해 전통의 유학에서 제시된 기(氣)의 원리를 설명했다. 소리가 공기중에 퍼져나가는 원리를 소리가 기 속에서 진동해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파동을 훈(暈)이라고 표현했는데, 소리의 파동을 성훈(聲暈)이라고 했다. 그는 음파의 진행원리로부터 세상의 모든 정보들이 파동을 통해 진행된다는 데까지 생각을 확장했다. 그리고 소리뿐 아니라 냄새와 색깔에도 이와 비슷한 파동이 있다고 설명하고, 심지어는 인간의 생각도 파동(暈)에 의해 전달되고 퍼져나간다고 보았다.

그는 서양 과학서적에서 읽은 망원경, 온도계, 습도계 등의 원리도 자신의 철학에 원용했다. 그의 책에는 빛의 굴절현상에 대해 써놓은 부분이 있다. 이를 보면 그는 청년시절에 이미 오목렌즈와 볼록렌즈의 원리를 알고 있었고, 매질에서의 빛의 굴절현상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작살을 던져 고기를 잡을 때는 작살을 물고기보다 조금 아래쪽을 향해 던져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물 속에 보이는 것이 굴절현상으로 인해 우리 눈에 약간 떠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대기굴절로 천체들이 지평선 부근에서 떠 보이는 현상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달이나 별은 실제보다 수평선 위로 떠올라 보이는데, 이유는 지구 둘레를 감싸고 있는 몽기(蒙氣) 때문이라고도 썼다. 몽기는 지금의 대기에 해당한다.

그의 저작에서 보이는 과학지식들을 종합해볼 때 그는 1850-60년대까지 중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의 근대과학지식을 거의 섭렵하고 있었다. 천문학, 지리학, 의학, 물리학, 박물학 등 서양과학이론들을 중국에서 활동한 서양선교사들의 저작과 중국인들의 저작을 통해 조선의 누구보다 먼저 접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들 과학이론들을 때로는 수긍하고 때로는 비판하며 자신의 철학을 세우는데 이용했다. 예를 들어 그는 알폰세 바그노니(Alponse Vagnoni, 중국명 高一志)의 ‘공제격치’(空際格致)라는 책에서 언급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자신의 기철학에 비추어 비판했다.

기체의 성질과 기의 성질

흙, 물, 불, 공기의 근본물질로 우주의 변화를 설명했던 4원소설은 하나의 기가 운동하고 변화한다는 그가 세운 기철학적 원리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는 우주에 있는 근원적인 기가 변해 흙, 물, 불, 공기를 만들 수 있으므로 4원소를 근본물질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우주의 모든 운동을 관통하는 근본으로서의 기에 대한 그의 강조는 전통의 유가철학에 그 연원이 있지만, 그는 기의 운동이나 성질을 증명할 수 있는 논리를 서양과학지식에서 찾았다. 그는 온도계, 습도계, 공기총의 원리를 통해 기체의 성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를 기를 설명하는 논리로 활용했다. 플라스크 안의 공기가 차가워지면 수축하고 더워지면 팽창한다는 사실을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운동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몸이 온기와 한기를 느끼는 것도 외부 공기와의 온도차 때문이라는 과학적인 사실을 바로 신체의 기와 외부의 기가 소통할 수 있고, 이것이 기가 우주 내에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한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를 증험할 수 있는 실험을 여러 가지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토리첼리의 기압계 실험이었다. 또한 방안에 앉아서 동쪽 창문을 닫으면 서쪽 창문이 열리는 것도 기가 방안에 가득 차서 서로 부딪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한기는 호박과 지푸라기 사이에 정전기가 일어 끌어당기는 현상도 기가 교감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자석이 서로 밀고 당기는 것도 서로의 기가 교감해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서양과학을 역수학(曆數學 천문학과 지구과학), 물류학(物類學 박물학), 기용학(器用學 과학일반)의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이러한 과학을 배우는 것은 기를 인식하고 기를 변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자연과학을 세상에 존재하는 기의 운동과 성질을 탐구하는 도구로 생각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과학기술의 실질적인 힘과 역할을 인정하기도 했다. 과학자들은 일상에 필요한 기계에 옛날에 있지 않았던 새로운 제품을 창출해 백성의 이용후생으로 삼기 때문에 후세를 위해 좋은 것이라고 하면서 과학자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최한기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청동제 지구의.


코페르니쿠스 태양중심설 수용

최한기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에 입각한 자전과 공전의 의미를 이해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1857년에 지은 ‘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이해하고 옳은 이론으로 수용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1757년 교황청의 금서목록에서 해제되고 난 다음, 중국에는 1767년 서양선교사 브노아(Michel Benoit, 중국이름 蔣友仁)에 의해 뒤늦게 알려졌다. 최한기는 브노아의 ‘지구도설’(地球圖說)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지구전요’에서 최한기는 서양의 천문학자들은 대부분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따르고 중국인 중에서도 천문학에 정통한 사람들은 그의 설을 따른다고 강조하면서 자신도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1857년까지만 해도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접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천체의 자전과 공전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다만 우주 안에 퍼져 있는 기의 자연스런 운동이 이러한 천체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부득불 그러한 세’라고 표현했다.

1860년대에 들어와 최한기는 윌리엄 허셜의 천문학 책 ‘천문학개론’(The Outline of Astrono-my)을 한문으로 번역한 '담천'(談天)을 통해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을 접했다. 그리고 이 책을 토대로 1867년에 지은 ‘성기운화’(星氣運化)에서 천체 운동에 대한 독창적인 자신의 이론을 제시했다. 즉 ‘인간으로부터 우주에까지 일관되게 관철되는 기의 운동’이라는 기철학적 설명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의 저작에는 수준 높은 천문학 이론과 기술 지식들이 망라돼있다.


중력의 원인을 기륜으로 설명

그에 따르면, 모든 천체는 둘레에 지구의 대기권과 같은 공기층인 기륜(氣輪)이 있어 이들이 항상 상호작용하고 있다. 그는 우주 공간의 어디에서든 기가 없는 진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없는 진공이란 변화와 생성이 없는 죽은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최한기는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 우주의 운동을 잘 설명하고 있지만, 그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뉴턴이 원인을 밝히지 않은 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중력의 작용을 가정한 것을 정확히 간파했던 것이다. 최한기는 중력의 작용이 천체들을 둘러싸고 있는 기륜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구에 대기권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천체에 지구와 같은 대기권이 있다고 믿었다. 또한 이러한 대기권은 각 천체의 경계부분에까지 넓어져서 서로 접하고 있다. 그는 지구에 조석이 생기는 것도 지구와 달의 기륜이 서로 접촉하고 상호작용 한다는 증거라고 여겼다. 그가 생각하기에 만유인력의 원인은 기의 상호작용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최한기의 기륜설을 보면 뉴턴이 만유인력을 제시할 당시 데카르트를 비롯한 프랑스 입자철학자들의 주장을 연상시킨다. 최한기와 마찬가지로 18세기 프랑스 입자철학자들은 뉴턴이 원인을 밝히지 않은 채 만유인력을 상정한 것은 불완전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현상에서 원인이 규명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은 중력의 원인을 세상을 꽉 채우고 있는 입자들의 소용돌이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입자들은 끊임없이 소용돌이 운동을 하면서 천체를 형성하고 자연의 모든 변화들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뉴턴은 오히려 그들의 그러한 설명이 쓸모 없는 가설이며,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주장하는 독단이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의 일반주석에서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듯이 현상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없는 것들은 모두가 가설이었다.

이러한 뉴턴의 입장에서 보면 최한기의 기륜설은 18세기 프랑스 입자철학자들의 소용돌이이론과 마찬가지로 가설에 입각한 것이다. 그것은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최한기는 서양과학을 이해하고 수용하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을 근원부터 끝까지 기라는 일관된 원리와 현상으로 설명해내고자 했던 기철학자였다. 그는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가장 선구적으로 서양의 근대과학 지식을 이해하고 소개했지만 자신이 과학자가 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1999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전용훈 기자
  • 사진

    박해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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