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고대) 동물사냥 작전회의

울산의 고래그림 '세계 포경업사 첫장' 장식


울산 바위그림의 일부. 고래, 호랑이, 사슴 등의 동물이 새겨져 있다. 특히 왼쪽에 몰려있는 고래는 당시 포경의 실태를 잘 알려주는 자료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아득한 원시 시대로 갔다고 상상해보자. 사냥이 중요한 생존수단이던 시절 원시인들은 짐승을 찾아 여기저기로 떠돌아 다녔다. 이들과 함께 생활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일까. 말이 안통한다는 점일 것이다.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짐승을 잡으려면 우선 짐승의 생태를 알아야 한다. 가장 영양가 있는 짐승은 어떤건지, 그리고 사람보다 얼마나 힘이 센지 알아야 ‘마음 놓고’ 덤빌 수 있다. 이 지식을 빠른 시간 내에 전수받으려면 말이 통해야 한다. 하지만 원시 시대에 글자가 있을리 만무하다. 이때 가장 효과적인 의사소통 수단은 바로 그림이다.

실제로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 시대까지(기원전 3만5천년-4천년) 아프리카와 유럽의 원시인들은 동굴에 많은 그림을 남겼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 남서부의 라스코 동굴 벽화, 그리고 스페인 북부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다. 이 벽화들의 공통적인 소재는 바로 원시인들의 주요 사냥감인 들짐승이다.

1940년대에 발견된 라스코 벽화에서 가장 박진감이 넘치는 것은 ‘황소들의 전당’이다. 실물보다 커다란 들소와 말이 벽과 천장 곳곳에서 맹렬히 질주하는 모습이다. 전당 길이 21m 정도. 기원전 1만5천년 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1879년 발견된 알타미라의 경우 동굴의 길이, 그리고 벽화의 내용이 라스코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그림에서 풍기는 중량감과 입체감이 훨씬 강하다. 기원전 1만 3천년 경의 그림으로 생각된다.

이들 그림은 아마도 수세기 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번 원래의 그림을 고치거나 새롭게 추가된 결과물일 것이다. 고대인들은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깊은 동굴 속에서 원시적인 등불을 만들어 이 웅장한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왜 그랬을까.

동굴 벽화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다. 일부 학자는 원시인들이 제례의식을 치르기 위해 벽화를 그렸다고 추정한다. 라스코 벽화의 경우 동물 옆에 창(槍)을 표시한 듯한 그림이 있다. 이를 단서로, 동물을 능가하는 힘을 얻고 사냥에 성공하도록 빌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해석이 추론됐다. 또 죽은 동물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의식을 치르려고 벽화를 그렸다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벽화에 그려진 동물들이 원시인들의 생존을 위한 주요 식량이었고, 이를 실물 모양 그대로 기록해 남겼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젊은이들에게 사냥 과정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수단이 아니었을까. 무리를 지어 거칠게 달리는 들소를 잡기 위해 어떤 작전을 짜야 하는지 의논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그림의 일부에서는 들소의 발이 묶인 채 쓰러져 있는 것도 발견된다.

해석이 어떻든 동굴의 벽화들은 글자가 없던 시절 필요한 정보를 서로에게 전달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학자들은 알타미라와 라스코의 그림을 ‘예술의 시초’라기 보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여명’으로 표현하는데 대체로 동감한다.

원시인 그림의 목적이 ‘교육’에 맞춰졌다는 점이 보다 확연하게 드러나는 예가 있다. 바로 한국 경남 울산 대곡리에서 발견된 바위그림이다. 약 5천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 이 바위그림에는 수많은 물짐승과 뭍짐승이 표현돼 있다. 가로 약 9m, 세로 약 2.5m의 규모다.

물짐승의 대부분은 주로 고래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는 고래를 사냥하는 방법과 고래의 생태가 상당히 자세히 기록돼 있다. 예를 들어 해면에서 물을 뿜어내는 모습, 고래잡이 배의 모습, 심장 부위에 정확히 작살이 박힌 고래가 몸을 비틀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됐다. 새끼를 훈련시키기 위해 어미고래가 새끼를 업고 있는 장면도 보인다.

고래는 몸집이 워낙 크기 때문에 웬만한 뭍짐승에 비교될 수 없을만큼 중요한 식량이다. 하지만 원시적인 도구만을 가지고 물에 사는 동물을 잡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고래사냥을 떠나기 전에는 들소나 사슴을 잡을 때보다 훨씬 치밀한 작전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울산의 바위그림은 단지 고래사냥에 대한 것 뿐 아니라 분배 방식이나 제례 의식과 같은 사회적 관습과 규칙을 종합적으로 상세히 기록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에스키모나 노르웨이 지역에서 고래 그림이 가끔 발견되긴 하지만 이렇듯 ‘대서사시’로 등장하는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그래서 울산 바위그림은 “세계 포경업사의 첫장을 장식했다”고 평가된다.


신들의 제왕 제우스. 손에 번개를 들고 있다.


아이콘 용어의 기원

손에 번개 들면 제우스
아이콘(icon)이란 말은 ‘그림’을 뜻하는 그리스어(eikoon)에서 비롯됐다. 그리스인은 인간의 생활을 신화에 빗대어 곧잘 설명했다. 이들은 각 신이 상징하는 의미를 단순화시켜 그림이나 조각으로 만들어 표현했다. 이 형상들이 바로 그리스 시대의 아이콘이다.

예를 들어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는 손에 번개를 든 채 위엄에 가득차 있으면서도 불쾌감을 주지 않는 얼굴이다. 또 덩굴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머리에는 덩굴이 표현돼 있다. 의로운 전쟁의 여신 아테나는 투구를 쓴 모습이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폭풍을 일으키는 삼지창을 들고 있다(삼지창의 세가지 가지는 각각 구름, 비, 바람을 의미한다). 빛의 신 헬리오스의 머리는 태양의 형상으로 표현돼 있다.

1999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김훈기 기자

🎓️ 진로 추천

  • 역사·고고학
  • 문화인류학
  • 미술사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