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우주론에 따르면 우주는 무(無)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어떻게 무에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이 생겨났을까. 또 우주는 탄생한 후 지금까지 어떤 변화를 거쳐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시공간을 휘게 한다는 일반상대성이론의 결과를 우주론에 적용시켜 모든 은하들의 중력이 우주공간 전체를 휘게 만드는 우주의 모습을 생각해봤다. 그가 그린 우주는 전혀 진화하지 않는, 정적인 우주였다. 이는 그가 이론을 세울 당시 우주가 팽창하는 동적인 존재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우주는 정적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은하들은 서로 당기기만 할 뿐 밀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한 개의 은하를 가지고 정적인 우주를 엮어놓으면, 그 우주는 중력에 의해 한 곳으로 모여들어 바로 붕괴해야 한다. 즉 아인슈타인의 우주는 극도로 불안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 즉 은하들 사이에는 끌어당기는 힘인 중력 이외에도 서로 미는 척력이 작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서로 잡아당겨서 붕괴하는 은하들 사이에 ‘버팀목’을 집어넣어 그 붕괴를 막아보겠다는 발상이었다. 혹 책이나 잡지에서 ‘아인슈타인의 실수’, ‘아인슈타인의 고집’ 등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제목이 눈에 띄면 바로 이 척력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우주척력은 의외로 간단히 만들어졌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 방정식에 상수(Λ)를 갖는 항을 집어넣으면 거리에 비례하는 우주척력이 기술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상수( Λ)를 우주상수, 이 상수를 포함하는 항을 우주항이라고 부른다. 우주항의 매력은 단순히 상수 하나를 끼워 넣은데 있는데, 이는 방정식에서 상수가 추가되는 일은 흔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결과가 간단할수록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1920년대 말 미국의 천문학자 허블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발견함으로써 우주가 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자,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어졌다. 우주상수를 넣은 것을 실수라고 치고 빼면 됐기 때문이다.
동적인 우주의 운명은 평균밀도가 어떤 값보다 크면 팽창을 방해하는 중력이 거세지므로 다시 수축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어떤 값보다 작다면 팽창을 저지하지 못해 우주는 영원히 팽창한다. 이 두 경우의 경계가 되는 밀도는 1m³ 당 수소원자 1개 정도가 존재하는, 인간의 기술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완벽한 진공의 밀도에 해당된다. 우주론가들은 현재의 우주밀도를 위 경계값으로 나눈 것을 밀도계수(density parameter, ${Ω}_{0}$)라고 부른다.
즉 우주에 물질이 하나도 없으면 밀도계수는 0이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우주는 감속할 이유가 없으므로 영원히 일정한 속도로 팽창하게 된다. 그런데 밀도계수가 0보다 크고 1보다 작은 경우(0<${Ω}_{0}$<1)와 밀도계수가 1인 경우(${Ω}_{0}$=1)는 물질의 양이 작으므로 우주는 영원히 팽창한다. 밀도계수가 1보다 크면(${Ω}_{0}$>1) 물질의 양이 크므로 우주는 팽창하다가 팽창을 멈추고 다시 수축하게 된다(표1)
그런데 현재의 관측결과는 밀도계수가 1에 수렴하고 있음(${Ω}_{0}$≃1)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양성자나 중성자 같은 중입자(baryon)로 만들어진 빛나는 천체들의 평균밀도는 겨우 ${Ω}_{0}$≃0.04±0.01에 불과하다. 이것은 우리 눈에 밝게 보이는 은하들은 이 우주에 ‘있어야 하는’ 질량의 10%가 채 되지 않음을 뜻한다. 결국 거의 소경이나 진배없는 천문학자들이 우주를 바라보며 연구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이리하여 문제는 심각해졌다.
${10}^{30}$배의 인플레이션
관측결과 이외에도 우리는 ${Ω}_{0}$≃1가 옳다고 믿지 않으면 안될 입자물리학적 이유가 있으니, 태초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이 바로 그것이다. 인플레이션 우주는 우주배경복사가 완벽하게 등방적(isotropic)이라는 관측 사실과 몇가지 다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이는 우주의 한 방향을 관측하나 그 반대 방향을 관측하나 우리가 받는 정보는 똑같다는 뜻으로, 우주론가들을 괴롭혔다. 왜냐하면 배경복사는 모두 우주에서 가장 빠른 속도인 광속으로 우리에게 접근해 왔기 때문이다. 즉 전화나 전보가 없던 조선시대 두 전령이 함흥과 광주로부터 그 당시 가장 빠른 운송수단인 말을 타고 최대한 빨리 달려와 왕에게 올린 정보가 완벽하게 똑같다면 이해가 갈 수 있겠는가?
이러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앨런 구스는 인플레이션 우주론을 도입했다. 인플레이션이라는 말은 (표2)에서 보는 것처럼 태초 어느 순간 우주가 갑자기 엄청나게 커진 것을 의미한다. 즉 처음에는 느리게 팽창하다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부쩍 더 빨리 팽창한 후 다시 느린 팽창으로 돌아갔다는 말이 된다.
코비(COBE, 우주배경탐사선)라고 명명된 관측위성은 1989년 우주공간에 올려지면서 우주배경복사가 완벽에 가깝게 등방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줬다. 코비 이전에도 우주배경복사의 등방성은 관측됐지만, 코비가 가장 현대적인 장비로 결정적인 관측자료를 제공한 것이다.
인플레이션 우주론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기 전 모든 물질이 잘 뒤섞일 만큼 충분히 작았다. 그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10}^{30}$배 이상 부쩍 커진 우주에서 퍼지기 시작한 우주배경복사는 이제는 등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을 겪은 우주는 평평한 공간의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다. 풍선을 엄청나게 크게 불면 그 표면은 평면에 가까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앞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0<${Ω}_{0}$<1 인 경우는 말안장 모양, ${Ω}_{0}$=1인 경우는 평면모양, ${Ω}_{0}$>1인 경우는 공모양의 공간을 기술하므로, 인플레이션을 겪은 우주는 ${Ω}_{0}$≃1, 즉 ${Ω}_{0}$=1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림 1).
입자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플레이션은 우주가 시작된 지 1초 이내에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고체가 액체로, 액체가 기체로 바뀌는 것을 ‘상전이’(phase transition)라고 표현하는데, 이와 원리적으로 비슷한 일들이 태초에 벌어진다.
예를 들어 -5℃인 얼음을 가열하면 온도가 서서히 올라 0℃가 된다. 하지만 계속 가열해도 온도는 0℃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녹아서 물이 되는데 열이 소모되고 있기 때문이다. 얼음이 물로 다 녹은 뒤에야 비로소 온도는 다시 상승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상전이 자체가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태초의 상전이 에너지가 공간으로 방출되면 공간은 급속하게 팽창하게 된다는 것이 인플레이션 우주의 이론이다.
상전이 현상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연못에 물이 어는 경우 온도가 0℃가 정확히 되는 순간 물이 한번에 얼음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온도가 내려감에 따라서 연못 여기저기에서 얼음의 결정이 생기고 번져서 마침내 연못 전체가 얼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플레이션도 전 우주공간에서 일제히 시작되고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경우는 우주의 다른 부분에서 인플레이션이 모두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 부분에서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는 경우이다. 1980년대 초 일본의 가츠히코 사토와 옛소련의 린데는 이 경우 아기우주가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 믿기 어려운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는 우주’(self-producing universe)는 인플레이션 우주론의 필연적인 결과다. 필자도 아기우주가 태어나는 과정에 관련된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수치계산으로 풀어 논문을 낸 바 있는데, 아기우주가 태어나는 데에는 불과 몇 플랑크 시간(${10}^{-43}$초)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결과를 얻었다.
우주가 인플레이션하는 동안은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Λ)가 0이 아닌 경우와 완전히 같다. 즉 우주척력이 작용해 팽창을 아주 효과적으로 진행시켰다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최소한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우주항이 결코 억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상수는 도대체 어떤 물리량에 관련된 상수일까? 믿거나말거나, ‘진공’(vacuum)에 관련된 상수인 것이다.
우주 탄생의 비밀은 진공
입자물리학이 밝힌 우주 탄생에 대한 최선의 해답은 우주가 ‘저절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에너지의 요동 속에서 높은 진공에너지를 갖는 여러 개의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즉 입자물리학에서의 진공이란 우리가 보통 말하는 진공이 아닌 것이다. 시공간은 덩어리 속에서 같이 태어나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개념조차 없다. 우주가 언제 태어났다고 설명하면, 그러면 그 이전은 뭐냐고 질문하고 싶은 독자가 꽤 있을 텐데, 이 질문은 성립조차 되지 않는 것임을 밝혀둔다. 이는 절대온도 0도보다 더 ‘추운’ 온도는 없는가 하고 묻는 것과 같다.
탄생한 높은 진공 에너지 덩어리 중 일부는 확률적으로 살아 남는다. 에너지 덩어리 내부의 온도는 약 ${10}^{-43}$초가 지났을 때 약 ${10}^{32}$K로 떨어진다. 이 짧은 시간을 플랑크(Planck) 시간이라고 부른다. 이때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네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은 한가지 형태로 통일되어 있었다고 믿어진다. 이 짧은, 정말 짧은 이 시간 동안을 기술할 물리학을 우리는 아직 소유하지 못했다.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여생을 이 연구에 바치겠노라고 말한 바 있다. 플랑크 시간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이다.
우주가 탄생한 후 플랑크 시간이 지나자마자 제일 먼저 중력이 독립해 일반상대론의 적용을 받기 시작한다. 남은 세 힘은 그때부터 우주가 탄생한 후 약 ${10}^{-35}$초가 지나 온도가 약 ${10}^{27}$K로 떨어질 때까지 대통일이론(GUT; Grand Unified Theory)에 의해 통일되어 있다. 영어로 ‘good’과 발음이 같은 GUT은 비교적 잘 수립되어 있는 이론이다.
우주가 탄생한 후 약 ${10}^{-35}$초가 지나자마자 강한 핵력이 독립한다. 또한 이 때부터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기 시작해 약 ${10}^{-24}$초가 지날 때까지 계속된다. 인플레이션은 온도가 떨어짐에 따라 우주가 높은 진공에너지에서 낮은 진공에너지로 상전이하기 때문에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 높은 진공에너지, 낮은 진공에너지란 원자 내에서 높은 에너지를 갖는 전자 궤도, 낮은 에너지를 갖는 전자 궤도와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높은 진공에너지를 갖는 덩어리에서 부분적으로 낮은 진공에너지를 가진 거품이 발생하면서, 즉 상전이를 하면서 그 거품이 인플레이션을 한다.
우주에는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이 존재한다. 하지만 암흑물질의 기여도는 ${Ω}_{0}$≃0.3±0.1 정도다. 그렇다면 우리는 ${Ω}_{0}$≃0.65±0.1에 해당되는 양을 진공에너지에 기댈 수밖에 없고, 우주상수의 역할은 중요해질 가능성이 커졌다. 그렇다면 우주항은 아인슈타인의 실수가 아니었던가? 아인슈타인의 억지는 다른 형태로 부활하게 되는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Ω}_{0}$≃1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1998년 초신성을 이용해 우주의 크기를 연구하던 두 그룹의 천문학자들은 생각보다 우주가10-15%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주장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즉 우주 팽창은 약간 가속되고 있고 우주상수의 역할은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