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감정이 기의 흐름을 막으면 병이 된다고 했다. 한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에는 ‘사기결’(思氣結)이라 해 ‘생각이 많으면 기를 맺히게 한다’고 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며느리나 스트레스가 많은 직장인들이 많이 걸린다는 울화병, 혹은 홧병도 여기에서 멀지 않다. 마음에 쌓인 앙금이나 화나는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꾹꾹 눌러 참는 일이 반복되면 그것이 병이 돼 여러가지 신체의 이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을 드러내고 감정을 풀지 못한 채 담아두고만 살다가 종국에는 병이 되는 것이다. ‘연정에 사로잡혀 생기는 병’이라는 상사병도 마찬가지.
처음 사랑할 때와 같다면
중국 남조시대 송나라의 한 선비가 화산기라는 고장을 지나다가 객사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는 첫눈에 반했는데 어찌할 수 없자, 돌아와서 곧 상사병(相思病)이 났다. 선비의 어머니는 사정을 듣고 당장 화산기로 달려가 그 여자에게 아들의 사정을 얘기했다. 여자는 자신의 치마를 벗어주며 선비의 요 밑에 깔아줄 것을 권했다. 어머니가 돌아와 그렇게 하자 선비는 씻은 듯이 나았다. 그런데 병상에서 일어나 이불을 개자, 요 밑에 여자의 치마가 있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또다시 여자의 생각으로 치마를 부둥켜안고 있다가 그것을 삼키고 자살해버렸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어머니에게 자신의 상여가 화산기를 거쳐가도록 부탁했다. 상여가 여자의 집 앞에 이르자 신기하게도 상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를 전해들은 여자는 목욕재계하고 단장한 다음 “화산기에서 당신은 나 때문에 죽었는데, 홀로 누굴 위해 살겠어요. 기쁨이 처음 사랑할 때와 같다면 날 위해 관뚜껑을 열어주세요”하고 노래했다. 이윽고 노래 소리에 관뚜껑이 열리자 순식간에 여자는 관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이 여자를 구하려고 해보았지만 관뚜껑은 결코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둘을 합장해주었다.
진짜로 아픈 꾀병
상사병. 특정한 이성을 지극히 애탐 하지만 그를 소유할 수 없을 때, 안타까움으로 몸져눕는 병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어릴 때부터 이상화된 대상이 내면에 잠재돼 있다가 사춘기나 성인이 된 후 동일시되는 대상을 발견하면서 이에 집착하게 되는 병. 많은 경우 부모의 상이 이상화된 경우가 많다. 흔히 남자에게는 어머니를 닮은 여자나 어머니의 느낌을 갖게 하는 여자가 대상이 된다.
집착은 심리적인 불안정을 낳고, 심리적인 불안정은 신체적인 이상을 수반한다. 바로 한의학에서 말하는 ‘칠정울결’(七情鬱結), 감정이 기를 맺히게 해 병이 되는 것이다. 정신과에서는 이렇게 심리적인 불안정의 결과로 신체에 나타나는 장애를 ‘신체화 장애’라고 한다. 흔히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고, 걷지를 못한다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 등 증상은 다양하다. 마음이 쓰리고 욕구가 채워지지 못할 때 생활이 흐트러지면서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으나, 많은 경우 원인이 없고, 대상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타까움을 알리는 방편으로 나타나는 신체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귀염받고 자라던 어린 아이가 동생이 태어나자 이유 없이 동생을 꼬집고 때리는 등 폭력스러워지거나, 다리를 저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자신에게 전해지던 부모의 사랑을 빼앗아간 동생에 대한 미움이, 혹은 부모의 애정을 되돌려보려는 마음이 신체화 장애로 나타난 것이다.
학교에 가기가 싫어 꾀병을 앓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방학 때는 건강하게 잘 지내던 아이가 학교 갈 때가 가까워 오면 배가 아프다며 운신을 못한다. 그러다가 ‘학교 가지 말라’고 하면 씻은 듯이 낫는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꾀부리는 아이들이 많아 ‘꾀병’이라고 하지만, 많은 경우 실제로 몸에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시험 보는 날 아침만 되면 배가 아프고 눈이 안 보이는 것들도 모두 매한가지로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나타난 신체화 장애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의 경우는 어려서, 혹은 부끄러워서 마음의 짐이 된다고 하지만, 상사병을 앓는 사람들은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병을 앓는다. 대부분 심약하고 내성적이어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앓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어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내부에 어떠한 형태로든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신감이 없어 자연스럽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만 생각을 키워가면서 대상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단오와 발렌타인데이
만일 이런 사람의 애달픔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상사병의 증상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상대와 관련된 물건을 지니게 하면 오히려 증세를 악화시킬 수 있다. 화산기 일화에서 여인이 남자에게 치마를 전해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남자는 상대방의 마음이 열린 것으로 착각하고 더욱 집착하게 되며, 결국 상대의 냉담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자 더욱 심한 좌절감으로 자살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일시적인 방편 대신 막힌 마음을 자연스럽게 열고 자신을 표현하도록 권한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풍속에 기대어 자연스럽게 자신을 보일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예로부터 단오나 칠석 같은 축제는 자연스런 사교의 장이 되지 않았던가.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가 쑥스럽고 용기 없는 마음을 누르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중을 내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듯 싶다. 남들도 다하고, 특히 오늘은 흉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이다.
3세기 경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는 원정에 징집된 병사들이 출병 직전 결혼을 하면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해 결혼을 금지했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을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한 남녀는 열렬히 사랑하게 됐고, 그들을 안타까워한 발렌타인 신부는 몰래 결혼을 허락하고 주례를 했다. 후에 이 일이 발각돼 발렌타인은 처형됐는데, 그날이 서기 270년 2월 14일이었다.
처음에 발렌타인데이는 부모와 자식들이 감사의 카드를 교환하는 날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변했다. 일설에는 이때가 들새들이 발정을 시작하기 때문에 남녀간의 연정과 관계 있는 풍습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지혜의 이
발렌타인데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굳어져버렸다. 초콜릿 선물 풍습은 일본의 초콜릿 제조회사의 상업적인 농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이날만 되면 너나 없이 더 멋지고 비싼 초콜릿을 구하기 위해 온 나라가 시끄러울 지경이다. 보다 더 좋은 것을 선물하면서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야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겠지만, 그러다가 정작 전해야 할 마음은 잃어버리고 초콜릿만 전해주게 되지 않을까.
사랑니가 나려면 참으로 아프다. 마치 첫사랑을 앓듯이 몹시 아프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이 이빨이 나면서 지혜가 생긴다고 해서 지혜의 이라고 불린다. 사랑은 사랑니가 날 때처럼 흔히 아픔을 동반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아픔은 지혜를 얻는 길이기도 하다. 가슴에 품은 연정은 사랑니처럼 아프게 속살을 뚫고 나와야 지혜를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