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와 반대로 첫사랑의 실패가 오히려 일생에 도움을 준 경우가 있다.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뒤 방사능에 대한 연구 업적을 쌓아 2개의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마리의 어린 시절은 경제적으로 불우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7년제 여중을 수석으로 졸업했지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하고 돈많은 집의 가정교사 일을 했다. 여기서 번 돈은 자신의 생활뿐 아니라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 언니의 학비로 쓰여졌다.
이 시절 몇해 동안 마리는 첫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상대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남자의 부모는 마리가 별볼일 없는 집안이라는 생각에 둘의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남자 역시 그 뜻을 거역하지 못해 둘은 헤어졌다.
마리는 언니가 프랑스 소르본대 의대를 졸업하고 나서야 비로소 같은 대학 이학부에 들어갔다. 24세의 나이였다. 대학 시절 마리는 남자를 사귈 생각이 전혀 없었는 듯하다. 한 남학생이 마리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려 자신의 마음을 알리려고 아편을 삼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마리는 냉담하게 “당신이 우선이 될 차례는 없어요”라고 말했다. 마리에게 최우선은 학문이었다.
마리는 1894년 8살 연상의 피에르 퀴리와 만났다. 고등물리화학연구소 실험을 지도하던, 가난하지만 평판이 좋은 화학자였다. 둘은 금방 서로 호감을 가졌다. 마리는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자마자 곧 친해졌다. 조국은 달랐지만 그의 생각과 사고방식은 놀라우리만치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마리와 피에르는 이듬해 결혼식을 올리고 학문의 동반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후에 퀴리는 첫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돈많은 집의 아들과 결혼했다면 리듐은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첫사랑은 잊혀질 수 없는 것이지만 만약 같은 길을 걷는 남성과 만나게 된다면 첫사랑을 잊고 결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