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과 연애는 동시에 이룰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큰 시험을 앞둔 사람들이 연애감정에 빠지면 "두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지 마라"는 조언을 들려주는게 일반적인 관례다.
그러나 연애가 오히려 연구에 활력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파동이론, 즉 전자가 원자의 핵둘레에 산재한 점(입자)이 아니라 파동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을 밝혀 20세기 물리학에 커다란 획을 그은 슈뢰딩거가 대표적 예다.
슈뢰딩거는 일생 동안 수많은 여자와 열정적으로 연애했다. 그에게 연애와 과학적 탐구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던진 고백에서 이런 면면이 잘 드러난다. "내 삶을 진실되게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자 관계에 대한 언급을 삭제해서는 너무 공허한 요약이 될 것 같아 안되겠고, 여자 관계를 다룰 경우 한갓 추문으로 가득한 요약이 되거나… 진지한 기록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슈뢰딩거는 32세 때 9살 연하의 여자와 결혼했다. 부인은 교육을 별로 못받고 별다른 능력이 없는 평범한 여자였다. 그녀는 슈뢰딩거의 외모, 성격, 지적 능력을 열정적으로 존경했다. 이에 비해 슈뢰딩거는 그녀를 '하인 부리듯' 하대했으며, 늘 새로운 여자와 사귀고 다녔다.
슈뢰딩거가 파동방정식을 처음 떠올린 때는 1925년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이었다. 슈뢰딩거는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와 스위스 알프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슈뢰딩거는 예전에 푼 적이 있는 한 공식의 원리가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휴가를 마친 후 그는 방정식을 만들어내는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파동방정식의 영감이 애인과의 밀월여행에서 떠오른 셈이다.
하지만 부인은 슈뢰딩거의 '탈선' 때문에 속은 상했지만 드러내놓고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슈뢰딩거가 새로운 여자와 사귀는 것을 돕기도 했다. 슈뢰딩거가 한 여자와 관계를 맺고 딸을 낳았을 때도 마찬가지 태도였다(슈뢰딩거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부인은 슈뢰딩거가 사망하는 순간까지 옆에서 지키며 헌신했다. 이런 헌신성 때문에 이들 부부는 이혼하지 않고 평생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을 유지했는지도 모른다.
슈뢰딩거는 왜 부인에게 이런 태도를 보였을가. 젊은 날 슈뢰딩거가 실패한 첫사랑에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슈뢰딩거는 1914년 모교인 비엔나 대학의 사강사 자리를 잡으면서 학자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바로 이때 그는 한 여인 때문에 학자의 길을 포기하려 했다.
슈뢰딩거는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낸 8살 연하의 소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할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여자 집안에서 강하게 반대했다. 그녀는 당시 몇 안되는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 이 집안으로서 는 월급이 얼마 안되고 집안도 별볼일 없는 사위감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슈뢰딩거는 대학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까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극구 말리는 바람에 포기했다.
결국 둘의 관계는 깨지고 슈뢰딩거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후 슈뢰딩거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높은 사회계층에 속한 여자와는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어쩌면 슈뢰딩거는 자신의 상처를 부인에 대한 하대와 자유분방한 연애를 통해 보상받으려 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