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뉴턴

불신감에 가득찬 고독한 독신, 3명의 여자에게만 예외


뉴턴
 

위대한 과학자의 지적 재능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리라 짐작하기 쉽다. 그러나 뉴턴은 정반대였다. 그의 생부는 동네에서 '거칠고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고 소문나 있었다. 37세에 겨우 이웃 농가의 딸(뉴턴의 생모)과 결혼하고 몇달 후 사망했는데, 글을 모르는 탓에 유언장에 서명 대신 엄지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뉴턴 생후 3개월 때의 일이었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농장일을 평생의 천직으로 받아들였고, 뉴턴 역시 농부로 자라기를 바랄 뿐이었다.

뉴턴이 3세 때 어머니는 근처에 살던 목사와 재혼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뉴턴을 데리고 가지 않은 탓에 뉴턴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뉴턴은 마을 학교에 다니던 시절 성적은 좋았지만 늘 침울한 성격이었다. 혼자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았고, 풍차나 물레방아와 같은 복잡한 모형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뉴턴을 지루한 생활로부터 탈피하게 만든 사람은 아버지의 친척들이었다. 농사를 짓는 일 외에 약제사나 의사처럼 새로운 지식을 쌓고 도시에 진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뉴턴의 재능을 알아차 리고는 뉴턴을 마을 근교인 그랜섬의 학교에 입학시켰다. 뉴턴이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수행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진출할 수 있던 계기였다.

그러나 뉴턴의 일생은 고독의 연속이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생애의 대부분을 대학 기숙사에서 보냈다. 점점 자폐성을 띠게 됐고, 새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강한 불신감을 나타냈 다. 머리 속에는 늘 '저 사람이 내 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뉴턴은 3명의 여성에게는 예외적으로 헌신적인 애정을 보냈다. 제1순위는 어머니였다. 재혼한 남편과 사별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뉴턴에게 와서 농장일이나 도우라고 다구쳤고, 뉴턴은 아무 불평 없이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왔다. 이를 끈질기게 말린 아버지 친척 덕택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지만, 뉴턴은 대학교수 시절에도 자주 농사일을 거들었다.

뉴턴이 애정을 쏟은 또다른 여인은 여동생의 딸이었다. 뉴턴은 그녀를 무척 귀여워한 나머지 말년에는 그녀의 가족을 데리고 살았으며, 조폐국 소장직을 그만 둘 때 그녀의 남편을 후임으로 앉혀 생활이 안정되도록 도왔다.

마지막으로 그랜섬 학교 시절 하숙한 약국의 양녀가 있다. 그녀가 결혼한 후 닥친 경제적 위기를 여러차례 도와준 사람은 바로 뉴턴이었다. 흔히 뉴턴의 숨겨진 사랑 상대로 알려진 여성이다.

하지만 뉴턴의 이성애는 달콤한 것이었다기 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일방적 헌신에 가까웠다. 뉴턴이 왜 이들에게만 헌신적인 애착을 보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들이 고독감에 가득찬 천재 과학자의 일생에 마음의 안식처를 제공한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불신감에 가득찬 고독한 독신 3명의 여자에게만 예외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8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김훈기 기자

🎓️ 진로 추천

  • 역사·고고학
  • 심리학
  • 문화인류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