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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현장취재] 진화가 해본 진화 게임, 컴퓨터 게임으로 장내 미생물 진화 연구?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 한 소리 들은 적 있나요? 이때 게임도 쓸모 있다고 반박할 명분이 생겼습니다. 2024년 4월 컴퓨터 게임 ‘보더랜드 사이언스’를 이용해 미생물의 진화를 밝혔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거든요. 열심히 게임을 즐겼을 뿐인데 과학 연구에 참여할 수 있다니! 게임의 ‘ㄱ(기역)’자도 모르는 김진화 기자가 직접 보더랜드 사이언스를 체험해 봤습니다.

 

금속으로 둘러싸인 어둑한 우주선 내부. 홀로 서 있는 evolution1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다. 터벅터벅 천천히 걸음을 떼다가 점점 속도를 높여 달려간다. 마침내 눈앞에 게임기 하나가 나타난다. 칙칙한 우주선 구석에서 홀로 핑크색 빛을 내뿜고 있다. 발걸음을 멈추고 게임기 앞에 선다. 게임기를 바라보고 E키를 누르자 퍼즐 게임 화면으로 전환되고, ‘보더랜드 사이언스’라는 픽셀 글자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픽셀 글자 바로 밑에 있는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곧 미니게임이 시작된다. 게임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주어진 간격 타일을 이용해 격자에 쌓인 네 종류의 캐릭터 타일을 위로 움직여 정해진 행에 배치하면 된다. 목표 점수를 넘은 뒤 다음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퍼즐 완료 화면이 뜨면서 한 게임 캐릭터가 “미생물 자식을 조져버렸군!”이라며 다소 과격한 칭찬을 해준다.

 

‘보더랜드 3’는 2023년 8월 기준 전 세계적으로 1800만 장 이상 팔린 인기 슈팅 게임입니다. 네 명의 캐릭터 중 한 명을 선택해 새로운 지역을 탐험하며 적을 쓰러뜨리면 이기는 게임이죠. 위 장면은 제가 직접 보더랜드 3에 들어있는 미니게임 ‘보더랜드 사이언스’를 플레이한 모습입니다. 어쩌다가 슈팅 게임에서 갑자기 미생물 이야기가 튀어나온 걸까요?

 

2020년 4월 출시된 보더랜드 사이언스는 제롬 발디스풀 캐나다 맥길대 컴퓨터과학과 교수팀, 스위스 시민과학 게임 스타트업 ‘MMOS(Massively Multiplayer Online Science)’, 보더랜드 시리즈 개발사인 ‘기어박스 소프트웨어’,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의 시민과학 미생물 연구 프로젝트인 ‘마이크로세타 이니셔티브’가 함께 개발한 시민과학 게임입니다. 시민과학은 일반 시민들이 데이터 수집이나 분석을 통해 과학 연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장내 미생물을 연구하기 위해 보더랜드 사이언스를 만들었습니다.

 

최근 발디스풀 교수를 주축으로 한 공동연구팀은 보더랜드 사이언스를 활용한 연구 성과를 국제학술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에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400만 명이 넘는 플레이어가 100만 종이 넘는 장내 미생물의 진화를 추적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내용이었죠. 해당 논문 저자 목록에도 보더랜드 사이언스 플레이어가 적혀 있습니다. doi:10.1038/s41587-024-02175-6

 

보더랜드 사이언스 게임 방법
 
개수가 제한된 간격 타일을 이용해 격자에 있는 캐릭터 타일을 타일 가이드에 맞게 이동시킨다.
 
캐릭터 타일을 누르면 간격 타일 한 개가 끼워지면서 한 칸 올라간다. 타일 가이드와 일치하면 점수가 오른다.
 
위로 올라가야 하는 캐릭터 타일을 눌러 간격 타일을 끼워 넣는다. 목표 점수에 도달하면 성공!
 

퍼즐을 풀면 미생물의 가계도가 보인다

 

 

장내 미생물은 박테리아, 곰팡이, 바이러스 등 소화관 내에 존재하는 모든 미생물을 말합니다. 원래부터 소화관에 존재하던 미생물도 있지만, 절반 이상은 외부에서 들어옵니다. 이들은 소화 기능뿐만 아니라 면역 기능, 대사 기능에도 관여하면서 사람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당연히 장내 미생물의 종류와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의학 연구에도 중요하겠죠. 그러려면 장내 미생물들의 정확한 가계도를 알아야 하지만, 종류가 많고 복잡해서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이크로세타 이니셔티브는 전 세계 수만 명의 자원봉사자로부터 대변 표본을 받아 장내 미생물의 염기 서열을 분석했습니다. 염기는 DNA나 RNA 같은 유전자의 구성 성분으로 A(아민), T(티민, RNA의 경우 U(우라실)), G(구아닌), C(사이토신) 총 네 종류가 있습니다. 염기가 배치되는 순서에 따라 생명체의 생물학적 특성이 달라지는데, 이를 염기 서열이라 합니다. 서로 다른 두 미생물의 염기 서열이 유사하면 유전적으로 가깝고, 차이가 크다면 유전적으로 멀다고 추측할 수 있죠.

 

연구팀은 미생물들이 유전적으로 얼마나 가까운지 분석하는 일을 퍼즐 게임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먼저 마이크로세타 이니셔티브가 분석한 미생물의 염기를 네 종류의 캐릭터 타일로 표현했습니다. 그 다음 격자의 한 열에 각각의 미생물의 염기 서열을 배치했습니다. 보더랜드 사이언스 플레이어가 간격 타일로 위치를 조정해 왼쪽에 제시된 목표 염기 서열(타일 가이드)과 같게 정렬하면 미생물 간의 염기 서열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게임 데이터가 쌓이면 서로 다른 미생물의 유사 정도를 파악해 미생물의 가계도를 그릴 수 있게 됩니다.

 

보더랜드 사이언스는 출시된 지 3년 만에 400만 명의 플레이어가 참여해 1억 3500만 회의 게임 데이터를 얻었습니다. 다니엘 맥도날드 마이크로세타 이니셔티브 연구책임자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를 통해 “전 세계 플레이어들의 노력으로 미생물들의 미묘한 차이를 정교하게 구분해 낼 수 있었다”며 “게다가 자원봉사자들의 대변에서 나온 장내 미생물과 사전에 남긴 설문지를 비교해 건강이나 생활 습관에 따른 장내 미생물의 차이를 분석할 수도 있게 됐다”고 전했습니다. 

 

▲DNA Puzzles
보더랜드 사이언스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시민과학 게임 ‘파일로’의 화면. 파일로는 포유류의 염기 서열을 다루는 반면 보더랜드 사이언스는 미생물에 집중한다. 제롬 발디스풀 캐나다 맥길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는 “보더랜드 사이언스의 가장 큰 차이는 매력적인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보더랜드 사이언스는 게임 제작사와 함께 만들어 오락성이 훨씬 높다.

 

보더랜드 사이언스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

 

 

발디스풀 교수와 MMOS는 각각 ‘파일로’와 ‘이브 온라인’이라는 시민과학 게임 개발에 참여한 전적이 있습니다. 파일로는 유전학, 이브 온라인은 외계 행성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연구를 돕는 게임입니다. 특히 파일로는 목적이나 게임 방법면에서 보더랜드 사이언스와 유사한데요. 놀라운 점은 파일로가 10년 동안 수집한 데이터보다 보더랜드 사이언스가 출시 당일 수집한 데이터가 5배 더 많았다는 겁니다.

 

아틸라 잔트너 MMOS 대표는 5월 2일 화상 인터뷰에서 “기존의 시민과학 게임은 연구에 필요한 플레이어를 모으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래서 게임 업계와 협력하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전했습니다. 보더랜드 사이언스는 수많은 사용자를 보유한 보더랜드 3에 힘입어 과학에 관심이 없던 대중들도 시민과학 게임에 끌어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게다가 게임 시장을 잘 알고 있는 게임 제작사와의 협업은 기존 시민과학 게임의 한계를 깨뜨렸습니다. 이전의 시민과학 게임은 과학 연구에 초점이 맞춰져 오락용 게임과는 거리가 멀었죠. 게임이 아닌 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 참여했기 때문에 플레이어 수가 현저히 적었습니다. 잔트너 대표는 “기어박스 소프트웨어는 자신의 게임을 가장 잘 파악하고 미학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적절한 난이도, 플레이 시간 등을 잘 알고 있었다”며 “간격 타일에 제한을 걸고 목표 점수를 설정하는 등 사소한 변화로 훨씬 더 즐겁고 매력적인 게임이 됐다”고 밝혔습니다.

 

보더랜드 사이언스에는 보더랜드 3 플레이어를 유혹하는 두 가지 장치가 숨겨져 있습니다. 먼저 인기 드라마 ‘빅뱅이론’에 에이미 역할로 나오는 배우 마임 비아릭이 게임 설명 영상을 더빙했어요. 그리고 보더랜드 사이언스 퍼즐을 풀어야만 보더랜드 3 내에서 캐릭터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는 토큰을 줬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더랜드 사이언스에 접속한 445만 명의 플레이어 중 400만 명 이상이 10분간의 튜토리얼을 듣고 적어도 한 판의 게임을 완료했습니다. 90%의 참여율입니다. 이는 과거 파일로의 참여율(10%)에 비해 훨씬 높은 수치입니다.

 

보더랜드 사이언스를 활용한 미생물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인공지능(AI)을 사용하면 더 빠를 텐데 굳이 인력을 써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발디스풀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AI는 아직 해당 작업을 제대로 수행할만큼 데이터 훈련이 되지 않아 실수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며 “보더랜드 사이언스를 통해 쌓은 데이터를 이용해 오류를 자동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AI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답했습니다. 즉, 시민과학의 힘으로 AI의 빈틈까지 메울 수 있다는 뜻이죠. 맥도날드 연구책임자는 “시민과학 게임은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해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중요한 장벽을 없앤다”며, “시민과학 게임의 혁신은 21세기 과학의 큰 특징이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발디스풀 교수에게 마지막으로 시민과학 게임이 꼭 필요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대개 학계에 고립돼 다른 사람들과 단절돼 있습니다. 시민과학 게임은 시민들을 과학에 다시 끌어들일 수 있도록 벽을 허물고 있어요. 게임 산업이 때때로 여러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게이머도 사회의 일원이며 세상에 많은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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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김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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