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노벨 화학상은 양자화학의 실용화에 기여한 미국 노스웨스턴대 화학과의 존 포플 교수(73)와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대 물리학과의 월터 콘 교수(75)에게 주어졌다. 포플 교수는 양자화학의 계산 방법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콘 교수는 '밀도범함수이론'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포플 교수는 캐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으로 건너가 화학자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가진 영국인이다. 콘 교수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물리학자이다. 이들의 공동 수상 소식은 학문 분야간 교류가 활발하지 못한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이지만, 화학이 자연과학의 다른 분야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소식이기도 하다.
물질의 성질은 분자에서
우리 주변에는 수 없이 다양한 물질이 있다. 이들은 다양한 상태와 다양한 색깔, 냄새를 가지고 있으며, 심한 독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 물질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물질은 왜 고유한 물리적, 화학적 특성과 기능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성질과 기능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포플과 콘은 바로 이런 의문을 해결하는 현대 화학적 방법과 이론을 개발했다.
우리 주변의 물질은 10²³개라는 엄청난 수의 '분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의 모든 성질은 분자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분자는 1억분의 1cm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원자들의 '화학결합'으로 만들어진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분자의 모습을 우리 눈이나 전지현미경으로 직접 보는것은 아직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양자역학이 확립되면서 분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해하게 됐다. 분자는 원자핵 주위에 음전하를 가진 전자가 구름처럼 분포하고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분자의 고유한 성질의 대부분이 그런 전자의 분포 모양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분자에서의 전자 분포는 '파동함수'라는 수학적인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양자역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슈뢰딩거 방벙식에서 얻어지는 파동함수는 전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담고 있고, 파동함수를 제곱하면 전자의 분포를 나타내는 '확률 밀도'가 된다. 그래서 학자들은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풀어내면 물질의 성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29년 폴 디랙은 "물리의 많은 부분과 모든 화학 분야에 필요한 법칙은 완전히 확립됐고, 이제 복잡한 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찾는 일만 남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림의 떡' 분자 오비탈
그러나 분자의 경우에 전자들 사이의 반발력이 있어 이를 포함한 슈뢰딩거 방정식을 푸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1930년대에 하트리, 폭, 슬레이터 등의 노력으로 전자들의 사이 반발력을 근사적으로 취급하는 방법(HF방법이라 함)이 개발됐고, 1951년 로탄에 의해서 '분자 오비탈'(MO라고 부름)의 개념이 도입돼 양자화학의 이론적 배경이 완성됐다. 그러나 분자 오비탈을 얻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어서 분자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라는 양자화학의 약속은 여전히 '그림의 떡' 이었다.
1960년대에 IBM 등에 의해서 고성능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양자화학의 실용적 이용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시험해보게 되었다. 수학 분야의 배경을 가진 포플은 정규분포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우시안 (Gaussian) 함수를 이용해서 분자 오비탈을 표현하면 컴퓨터로 슈뢰딩거 방정식을 쉽게 풀 수 있다고 제안했다.
포플이 1970년에 그의 첫 프로그램인 가우시안-70을 발표하고 무료로 프로그램을 나누어주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양자역학은 극소수의 이론화학자들만의 흥미거리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집적회로를 이용한 컴퓨터의 연산속도와 그래픽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고 포플의 프로그램도 발전을 거듭해갔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플의 가우시안을 개인용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포플은 그동안 2-3년마다 새로운 이론과 계산 방법을 보완한 가우시안을 공개해왔다. 이제는 그 계산의 정확도가 실험을 넘어설 정도가 됐고, 단순히 분자의 성질뿐만 아니라 화학반응의 과정과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무상으로 공개하던 포플의 프로그램도 이제는 상품화가 됐지만, 그의 가우시안은 전세계의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의 중요한 연구 도구로 쓰이고 있다.
실험 전에 컴퓨터에게 물어봐야
한편, 물리학자인 콘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어서 얻는 수학적인 파동함수 대신에 물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전자의 밀도함수를 이용하는 이론을 개발했다. 콘은 1964년에 분자의 전자에너지를 바닥상태의 전자 밀도만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증명했고, 1965년에는 바닥상태의 전자밀도를 알려주는 콘-샴 방정식을 유도했다. 파동함수 대신 전자의 밀도함수를 직접 이용하는 콘의 이론은 '밀도 범함수 이론'(Density Functional Theory)으로 발전해 다양한 분야에서 유용한 계산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다. 물론 포플의 가우시안 프로그램에서도 콘의 이론을 이용한 계산을 할 수 있다.
포플과 콘의 업적으로 이제 분자의 색깔을 비롯한 간단한 물리적, 화학적 성질은 물론이고 분자의 반응성과 생체에서의 기능, 새로운 의약 물질의 효능,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분자의 성질, 그리고 화학 물질이 환경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컴퓨터로 손쉽게 알아낼 수 있게 됐다. 이제 분자를 합성하기 위해서 무조건 실험실로 달려가던 화학자들도 컴퓨터에게 그 분자가 합성이 가능하고 원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보게 된 것이다. 올해 노벨화학상은 1981년 미국의 호프만과 일본의 후쿠이의 공동수상에 이어서 양자화학 분야에 주어진 두번째의 상이다. 특히 포플의 업적은 그 동안 실험이나 이론과는 다르게 여겨져왔던 컴퓨터 프로그램의 개발을 중요한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