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 학파 - 무리수 존재 발설하면 죽음
고대 수학자이며 철학자, 그리고 신비주의자로 알려진 피타고라스. 그를 신처럼 따르던 추종자들은 비밀 집회를 통해 수학을 비롯한 피타고라스 지식의 정수를 전수받았다. 현재 알려진 피타고라스의 가장 큰 수학적 업적은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내용의 ‘피타고라스 정리’다. 그런데 바로 이 내용 때문에 피타고라스 추종자들의 신념에 커다란 동요가 일고, 급기야 동료 한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얘기가 전해진다.
피타고라스는 에게해의 사모스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섬을 지배하던 군주의 폭정을 혐오한 나머지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크로토네로 이주하고, 여기서 비밀 공동체 조직을 창설하기도 했다.
피타고라스는 이미 당대에 신비한 인물로 인식됐다. 아폴로 신의 아들과 동정녀 피타이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소문이 돌았을 뿐 아니라 각종 기적을 행하고 마신들과 대화를 나눈다고 알려졌다. 추종자들은 피타고라스를 신에 가까운 존재로 여겨 그리스의 영적 지주로 추앙했다고 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數)를 만물의 근본으로 파악했다. 이들은 자연계의 물질을 삼각형이나 사각형 같은 기하학적 도형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각 수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했다. 예를 들어 홀수는 선하고 짝수는 악하다고 규정했으며, 6은 결혼의 수로서 여성수 2에 남성수 3을 곱한 값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수가 오로지 1,2,3과 같은 자연수만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만일 $\sqrt{2}$(=1.414…)와 같은 무리수가 발견된다면 학파를 지탱하는 신념의 기반이 흔들리는 셈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
피타고라스는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을 제외한 두 변의 비율이 3 : 4일 경우 빗변의 값은 5라는 사실을 발견했다(사실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 아니면 선대의 지식인지 불명확하다). 현대의 공식으로 표현하면 3² + 4² = 5²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이 대발견을 기념해 황소 1마리(1백마리라고도 함)를 신의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이었다. 만일 빗변을 제외한 두 변의 비율이 1 : 1이라면 빗변의 길이는 $\sqrt{2}$에 해당한다. 자연수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에 가득찬 학파로서는 커다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피타고라스 추종자들은 일단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어떻게든 $\sqrt{2}$를 자연수로 표현해보려 애썼다. 이런 와중에 추종자의 한 사람인 히파수스가 비밀을 외부인에게 누설시켰다. 그러자 분개한 동료들이 히파수스를 바닷물에 던져 사망시켰다고 한다. 신념 때문에 새로운 과학 지식을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모한 행태를 벌인 일화다.
발렌티누스 - 돼지 음식을 동료에게 약으로 처방
과학실험 중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이 전혀 뜻밖의 결과를 낳는 경우가 종종 있다. 15세기 수도승이자 연금술사인 비르길리우스 발렌티누스는 동료들이 원인을 모른채 시름시름 앓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운 약을 처방했다가 오히려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버렸다.
발렌티누스는 연금술사답게 당시의 화학적 지식을 빠짐 없이 기록하고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동료 수도승 중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몸이 몹시 야윈 사람들이 많았다. 발렌티누스는 이들의 건강을 회복시킬 약초를 찾았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발렌티누스는 쓰레기더미에서 해결책을 떠올렸다. 당시 쓰레기는 문이나 창문을 통해 거리와 집주위 빈터에 버려져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발렌티누스 역시 자신의 방에서 실험이 끝나면 남은 물건을 창문 아래로 던져버렸다. 창밑에는 점점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수도원의 또다른 진풍경은 돼지나 닭이 마음대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모습이었다. 당시 수도승들은 직접 밭을 갈고 가축을 기르면서 자급자족하는 분위기였다. 수도원 속에 풀어놓온 가축들은 1년 내내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아다녔다.
어느날 발렌티누스는 자신이 버린 쓰레기더미에서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돼지가 쓰레기더미를 파헤치며 무엇인가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발렌티누스는 돼지의 건강 상태가 나빠질 것이라 짐작하고 몇달 동안 돼지를 관찰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돼지는 살이 더 찌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발렌티누스는 돼지로부터 얻은 경험을 사람에게 적용시키려고 마음먹었다. 이 쓰레기가 병에 걸린 수도승들을 낫게 해주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는 싫다는 수도승들을 겨우 설득해 실험실 쓰레기의 일부를 먹게 만들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건강이 회복되기는 커녕 수도승들의 몸은 더욱 야위어 갔고, 심한 경우 쓰레기의 독성을 견디지 못해 죽은 사람도 있었다.
한 설명에 따르면 놀란 발렌티누스는 앞으로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이 쓰레기에 이름을 붙였다. 현재 원소기호 51번으로 알려진 안티몬(antimony)이었다. 여기서 안티는 ‘반(反)하다’ 몬은 ‘수도승’의 뜻이므로, 안티몬은 ‘수도승을 괴롭힌다’는 의미를 지녔다.
이후 발렌티누스는 안티몬을 신중히 연구한 결과 안티몬이 소량으로 투여되면 약효를 보인다는 점을 밝혔다. 그의 연구 결과는 1470년경 ‘안티몬의 개선마차’에 수록됐다.
베이컨 - 겨울밤 강행된 무리한 눈실험
과학자는 아니지만 과학이 인류에 기여하는 막대한 역할을 설파해 같은 시대와 후대의 과학자들의 활동을 크게 고무시킨 인물이 있다. 영국 왕실 대신의 아들로 태어나 철학자이며 정치가로 이름을 떨친 프란시스 베이컨이다. 그는 자연을 이해하고 지배하는데 경험과 실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는데, 바로 자신이 강조한 정신에 충실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목숨을 잃었다.
베이컨은 인류의 물질적 생활조건들을 향상시켜줄 온갖 기술들이 과학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그는 과학이 모든 생명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즉 낙원으로 이끌어준다고 생각한 낙관론자였다. 그의 대표작 ‘신아틀란티스’(1627)에서는 이런 유토피아 세계가 자세히 묘사됐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연구소는 보일이나 뉴턴과 같은 유수한 과학자들을 낳은 영국 왕립학회를 설립하는데 모델로 작용했다.
‘신아틀란티스’의 얘기는 주인공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이상한 섬의 해안에 도착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이 섬에는 36명의 과학자가 활동하는 ‘솔로몬의 집’이라는 연구소가 있다. 연구의 목적은 ‘사물의 원인과 은밀한 움직임에 관한 지식’을 발견하고 이를 인류 제국의 경계를 넓히며 가능한 모든 것을 성취하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솔로몬의 집’에서 연구되는 내용의 대부분은 바로 현대에 실현되고 있는 첨단 과학기술이다. 하늘을 나는 기계나 잠수함과 같은 온갖 동력기관이 등장하고, 난치병 환자를 치료하며 수명을 연장시키는 의약품이 만들어진다. 지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난을 예견하는 장치도 있다. 또 동물들을 잡종교배해 괴물을 만들거나, 본래 종보다 크게 또는 작게 만드는 유전자조작술이 소개된다. 인체에 사용할 약의 효능과 안전성을 판단하기 위해 실험 동물이 사용되기도 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실험이 연구소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베이컨 자신은 과학적 지식을 갖추지 못한 탓에 실제로는 실험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어느날 그는 고기가 부패하는데 눈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알기 위해 무리한 실험을 감행했다. 암탉 한마리를 사서 눈 속에 묻은 후 밤새 떨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한 것이다. 베이컨은 이때 얻은 급작스런 오한으로 기관지염에 걸려 앓다가 1626년 4월 9일 사망했다.
케플러 - 천체에서 들리는 음을 악보로 제작
피타고라스가 신비주의자로 불리는 이유의 하나는 자신이 우주의 화음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에 따르면 천구의 행성들은 움직이면서 고유의 음(音)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독특한 우주론에 영향을 받아 우주의 화음을 악보로까지 제작한 천문학자가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면서 행성들이 원이 아니라 타원의 형태로 움직인다고 주장한 독일의 근대 천문학자 효하네스 케플러다.
피타고라스는 태양과 달, 그리고 5개 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지구 주변에 원을 형성하며 돈다는 천동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태양이나 행성이 자신의 궤도를 움직일 때 마치 하프 현을 퉁기는 듯한 음악의 조화를 만들어낸다는 것. 이처럼 아름다운 화음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주는 완벽한 질서를 갖추며 유지된다고 했다.
피타고라스는 이 ‘천체의 화음’이 매우 커다란 소리인데도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계속 이 소리를 들어와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피타고라스 자신은 별들의 음악이 들린다고 주장했다.
중세까지 이어진 천동설은 16세기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지동설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케플러는 독일 튀빙겐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코페르니쿠스 신봉자인 한 교수로부터 수학과 천문학을 배운 후 커다란 감화를 받았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와 달리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원이 아니라 타원 궤도로 움직인다는 점을 과감히 주장해 천문학 분야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을 발전시켜 우주의 화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일을 시도했다.
케플러에 따르면 우주는 원형의 현을 갖춘 모양의 거대한 현악기이며, 천체가 움직이면 마치 현을 퉁겼을 때처럼 공기가 진동되며 소리를 낸다는 것. 합주의 지휘자는 태양. 이 천체의 합주로 하늘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흥미로운 점은 어떤 방식을 이용했는지 모르지만 케플러는 각 행성이 운동할 때 내는 선율을 구별해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지구가 내는 선율은 ‘미, 파, 미’에 해당한다. 케플러는 미(mi)는 괴로움(miseria), 그리고 파(fa)는 기아(fames)의 약자로 해석했다. 그래서 지구에는 늘 근심과 굶주림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케플러는 자신이 이룩한 천문학적 업적에 비해 당대에 이렇다 할 명성을 얻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하지만 그는 이 점에 대해 크게 연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천체의 신성한 조화음을 들은 것만으로도 커다란 만족감을 느꼈을 테니까 말이다.
놀레 - 전기 실험 위해 소년을 공중에 매달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서 전기제품을 다루다가 감전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몸이 전기에 잘 통한다는 점은 별도로 배우지 않고도 익히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전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시작되던 17-18세기에는 사람에게 직접 전기를 흘려보고서야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건강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약한 전기였다.
영국의 스티븐 그레이(S. Gray, 1670-1736)는 물질 중에서 전기를 통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던 중 사람의 몸이 전기를 통하는지가 궁금해졌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기가 전해지는지 알기 위해서는 몸이 공중에 뜬 상태로 유지돼야 했다.
그레이는 건장한 젊은 급사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길고 튼튼한 명주끈 두가닥을 준비한 후 양 끝을 천장에 매달아 두개의 고리를 만들었다. 고리 하나에 급사의 양쪽 발을 걸고, 다른 하나에 양어깨를 걸었다. 그리고는 끈을 끌어 올려 급사가 수평한 자세로 공중에 뜨도록 만들었다.
그레이는 먼저 유리막대를 마찰해 대전시킨 후 이를 급사 발바닥에 댔다. 그리고 급사의 머리에 손을 대보니 짜릿한 자극이 느껴졌다. 이로써 전기가 사람의 몸을 통해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해진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18세기 프랑스 장 안토니 놀레 신부는 이 실험을 좀더 객관적으로 수행했다. 그레이 실험과 비슷하게 소년을 명주끈으로 매달았다. 단지 다른 점은 소년의 손 가까이에 작게 자른 얇은 금속 조각들을 던져놓았다는 점. 만일 대전한 막대를 소년 몸에 댔을 대 손까지 전기가 통한다면 바닥에 놓인 금속들이 튀어올라 소년 손에 붙을 것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놀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전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동료 과학자를 수평으로 매단 후 같은 실험을 반복했다. 이때 놀레 신부는 자신의 손을 동료 얼굴에서 2-3cm 되는 곳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둘 다 핀으로 찔린 것 같은 가벼운 아픔을 느꼈다. 캄캄한 방에서 실험을 되풀이한 결과 불꽃이 동료과학자 얼굴에서 놀레 신부 손으로 튀는 현상이 관찰됐다. 인간 몸에서 처음으로 불꽃을 끌어낸 실험이었다.
한편 1740년경까지 과학자들은 전기에 관한 실험을 할 때마다 유리막대를 일일이 손으로 문질러 전기를 얻어야 했다. 이런 불편한 일은 충전지(라이든병)가 발명되면서 사라졌다. 이제 과학자들은 좀더 활발하게 전기가 전달될 수 있는 거리와 물질의 종류, 전기가 움직이는 속도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놀레 신부 역시 빠지지 않았다. 하루는 프랑스 왕과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백80명 근위병들이 서로 손을 잡고 둥근 원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이때 한 곳을 떼어놓고 병사 두명에게 충전된 라이든병을 잡게 했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심한 쇼크를 받고 하나같이 하늘로 펄쩍 뛰어올랐다.
놀레 신부는 과학실험에 흠뻑 빠진 나머지 인간에게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은 ‘잔인한’ 과학자였다. 그는 수도원장을 역임한 후 1738년 파리 대학 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프랭클린 - 손으로 잡은 번개
벼락을 피하기 위해 건물 지붕에 뾰족하게 세운 피뢰침은 과학자가 아니라 정치가에 의해 고안된 걸작품이다.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활동하며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기초위원 중 한사람인 벤자민 프랭클린이다. 그는 40살이 넘어 전기 실험에 몰두해 번개와 전기가 같은 성질을 가진다는 사실을 밝혔다. 목숨을 담보로 잡고 행한 위험한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1752년 6월 비오는 어느날 프랭클린은 아들을 데리고 한적한 오두막을 찾았다. 손에는 번개의 성질을 알아내기 위해 직접 제작한 연이 들려 있었다.
얼핏 보면 연의 모습은 평범해보였다. 가늘고 긴 나무막대 두개를 십자형으로 만들고 큰 손수건으로 네 귀퉁이를 묶은 형태였다. 하지만 세로축 나무에 긴 철사를 잡아매고 연꼭대기에서 30cm 정도 튀어나오도록 만든 점이 특이했다. 하늘에서 번개를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장치였다. 철사는 전기가 통하는 긴 삼끈과 연결됐기 때문에 번개의 충격이 철사와 삼끈을 통해 손으로 전달될 수 있다.
그러나 번개의 위력이 손에 직접 전달된다면 위험천만이다. 프랭클린은 손 부위에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우선 삼끈 끝에 전기가 통하지 않는 부도체인 명주 리본을 연결했다. 또 명주리본과 삼끈 사이에 쇠로 만든 열쇠를 매달았다. 열쇠 가까이 손가락을 가져가면 전기가 흐르는지 여부를 느낄 수 있게 만든 장치다.
프랭클린 부자는 명주리본과 열쇠가 젖지 않도록 오두막 문가에서 비를 피하며 연을 올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어 포기하고 돌아설 무렵 손에 어떤 느낌이 왔다. 프랭클린이 손가락 마디를 열쇠에 대자 불꽃이 튀었다. 그는 열쇠를 충전지(라이든병)에 연결시켰다. 그러자 이 충전지는 보통의 충전지와 똑같은 효과를 나타냈다. 전기와 번기가 같은 성질이라는 점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프랭클린은 이 실험 내용을 실용화시키려고 마음먹었다. 가는 쇠막대의 한끝을 축축한 땅에 묻고, 다른 끝을 건물 지붕 위에 솟게 장치하자는 생각이었다. 벼락이 지붕 위 뾰족한 끝에 끌려 막대를 타고 지면으로 흐르기 때문에 건물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피뢰침의 원리였다.
사실 프랭클린의 실험은 커다란 행운이 따른 것이었다. 1753년 한 교수는 구름에서 얻는 전기에 관해 연구하던 중 벼락을 맞아 즉사했다. 벼락이 실험장치와 불과 30cm 정도 거리의 교수 머리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만일 프랭클린의 연으로 거대한 벼락이 떨어졌다면 프랭클린이 과연 무사할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영국 왕립학회 - 1백℃ 넘는 찜방에서 몸 반응 관찰
18세기 유럽의 과학자들은 열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사람의 평균 체온(36.5℃)보다 높은 41℃에 이르면 몸의 생리 기능에 이상이 생겨 죽음의 위험에 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뜨거운 공기에 노출됐을 때 몸은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을까가 관심사였다.
1775년 1월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은 다소 위험스런 실험 계획을 세웠다. 뜨거운 방에 들어갔을 때의 생체 반응을 몸소 체험해보자는 내용이었다. 방에 난로를 피우고, 마루 밑을 통하는 연통으로 뜨거운 공기를 집어넣었다. 가로 4.2m, 세로 3.6m의 작은 방이었다.
내부 온도가 거의 물의 끓는 점(1백℃)에 달했을 때 과학자들은 옷을 입은채 한사람씩 방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상태를 관찰했다. 손과 얼굴이 불로 쪼이는 듯한 느낌이 왔고, 맥박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흠뻑 땀에 젖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참가자들 모두 예상치 못한 이상한 현상을 겪었다. ‘하’ 하고 입김을 불자 온도계 수은주가 내려간 것이다. 또 시계줄을 만지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이에 비해 자신의 피부에 손을 대니 ‘시체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몸이 걱정이 돼 온도계를 혓바닥 밑에 넣고 정말 체온이 떨어진 것인지 확인했다. 그러나 기록된 체온은 정상이었다. 이 현상은 공기의 온도가 체온보다 높기 때문에 발생한다.
보통의 방안이라면 체온은 공기나 실내 물체보다 온도가 높다. 그래서 겨울에 추운 방에서 ‘하’ 하고 입김을 손에 불면 따뜻한 느낌이 온다. 온도계의 경우 수은주는 올라가기 마련이다. 입에서 나온 공기가 손의 피부나 방 공기보다 따뜻하기 때문이다. 또 쇠붙이를 만지면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쇠붙이가 몸에 비해 공기의 온도를 쉽게 전달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운 방에서는 쇠붙이가 차갑게 느껴지고, 더운 방에서는 반대 현상이 벌어진다(사우나실 안의 온도가 체온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라).
2차대전 때 연구 활발
왕립학회 회원들의 ‘몸을 던진’ 실험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끓는점보다 높은 온도에서 견디는 실험을 행했다. 이들은 몇가지 요리 재료를 가지고 들어가 방안 온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줬다. 20분 후 달걀이 익고, 47분 후 고기가 바삭거릴 정도로 구워지는 뜨거움이었다.
물론 이들의 실험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 차원에서 실행된 것이었다. 학회의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동물의 몸이 체온보다 훨씬 높은 온도에서 견딜 수 있는 놀라운 힘을 가졌다고 믿었고, 이를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이들이 더 오래 방에서 머물렀다면 체온이 상승해 사망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체온이 올라가면 뇌는 체온을 떨어뜨리기 위해 몸에서 땀을 방출시킨다. 땀이 수증기로 변하면서 피부의 열을 빼앗는 원리다. 하지만 밀폐된 방에서 수증기가 꽉 차면 몸의 땀은 더이상 수증기로 변할 수 없다. 그 결과 체온은 서서히 올라가 목숨을 위협하기 십상이다.
18세기의 상황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에는 높은 온도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일이 실제로 매우 중요했다. 전쟁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고온의 환경에서 버텨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열대지방의 바다를 항해하는 영국 해군의 경우 좁고 뜨거운 엔진실이나 보일러실에서 일해야 했다. 또 육군은 70℃에 이르는 사막 한복판에서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전투에 임했다. 고온과 함께 축축한 습기로 사람을 괴롭히는 정글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과학자들은 사람이 더위에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높은 온도로 가열되는 실험방을 만들고 지원자들을 모아 다양한 실험을 수행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심한 일을 할 때 땀을 많이 흘려야 체온이 유지되지만 30분 이상 많은 땀을 흘리면 몸에 심한 무리가 온다. 또 30분 이내라 해도 평소 체력을 단련하지 않았다면 생리기능에 이상이 올 수 있다. 사람에 따라 땀흘리는 정도나 더위에 견디는 능력이 다르다는 점도 밝혀졌다.
쉘레 - 꼼꼼한 성격 탓에 독극물 중독
과학자 중에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채 독학으로 실험에 임해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 많다. 독일의 대실험가 칼 빌헬름 쉘레는 불
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만사를 제쳐두고 화학 실험에만 몰두한 결과 당대의 학자들과 어깨를 견줄 정도의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화학물질을 일일이 맛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꼼꼼한 성격 탓에 수은중독에 걸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쉘레는 11형제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가정이 풍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14살부터 10여년 간 약재상 집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당시 약재상들은 병에 효과가 있는 성분을 추출해 약국에서 직접 제조하곤 했다. 쉘레로서는 화학 분야에 관한 실제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770년에서 1773년까지의 4년은 쉘레의 연구에서 황금기를 이룬 시기였다. 한 광물학자로부터 자신에게 부족한 이론 교육을 받은 한편 동시대 어떤 화학자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원소나 물질을 발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업적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예를 들어 쉘레는 진한 황산에 이산화망간이 포함된 광석가루를 섞어 용기 속에 넣고 가열함으로써 새로운 기체를 발생시켰다. 이 기체를 다른 유리병에 옮긴 후 불붙인 초를 넣으니 눈부시게 밝은 빛을 발했다. 산소가 최초로 발견된 순간이었다.
쉘레는 자신의 연구 내용을 ‘공기와 불에 대한 화학 논문’이란 제목으로 출판하려 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출판사가 4년간 출간을 미뤄 1777년에야 책이 발행됐다. 하지만 이미 2년 전 영국의 프리스틀리가 산소를 발견했다고 발표한 후였기에 쉘레의 업적은 인정받지 못했다(현재는 두명 모두 산소 발견자로 불린다). 이 외에도 염소, 질소, 망간, 바륨 등 수많은 원소에 대해 연구했지만 늘 프리스틀리를 비롯한 다른 화학자에게 간발의 차이로 선수를 빼앗겨 빛을 못봤다.
쉘레가 일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기는 1775년 약국 관리인을 맡은 때였다. 평생 처음으로 누구의 간섭 없이 화학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연구에 미친 나머지 약국운영에 소홀한 탓에 빚이 늘어 가게를 정리할 상황이 닥쳤다. 다행히 그를 존경한 시민들이 쉘레를 구하자는 캠페인을 벌여 채권자들은 쉘레 가게에 손을 대지 못했다.
하지만 불행은 끊이지 않았다. 쉘레는 어릴 때부터 선천적인 류머티즘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이를 무시하고 연구에만 몰두하자 신경통은 한층 악화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죽음을 맞은 것은 자신이 취급한 화학물질을 반드시 맛을 보고 확인하던 습관 때문이었다. 비산, 염화제2수은, 청산과 같은 독극물까지 맛을 본게 화근이었다. 그는 43살의 젊은 나이에 수은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보먼트 - 위 뚜껑 열고 소화작용 관찰
내시경이 발명되기 이전 위가 음식을 어떻게 소화시키는지 알아내는 위해서는 직접 위 속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의 위를 꺼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건강에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배에 구멍을 뚫고 위 속을 관찰한다면 어떨까. 실제로 19세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총기사고로 우연히 발생한 사례다.
18세기 중엽까지 음식이 위에서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위의 근육이 움직여 음식을 혼합시킨다는 설명, 또는 음식이 위 속에서 단지 썩을 뿐이라는 해석 등등 여러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위에 대한 과학적인 관찰 기회는 우연히 찾아들었다. 1822년 북미 지역에서 산탄총이 잘못 발사돼 19세 청년이 중상을 입은 사고가 발생했다. 곧바로 달려온 의사 윌리엄 보먼트는 가망이 없어 보이는 청년을 1년 넘게 치료하면서 정상인으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남았다. 총맞은 자리가 아물지 않아 지름 1cm 정도의 구멍이 남은 것이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붕대로 압박하지 않으면 위에 들어간 음식이 구멍으로 스며나와 불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구멍에는 자연적으로 얇은 막이 생겼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안쪽으로 밀려들어가는 형태였다. 일종의 ‘위 뚜껑’인 셈이었다.
보먼트 박사는 이 ‘위 뚜껑’을 보고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만일 이곳에 음식을 넣고 들여다보면 위의 소화작용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1825년 8월 1일 보먼트 박사는 몇가지 음식을 명주실에 매달아 구멍으로 넣은 후 1시간이 지나서 이를 꺼내 조사했다. 그러자 양배추와 빵은 반쯤 소화됐고, 고기조각은 변하지 않았다. 다시 1시간이 지나자 양배추와 빵은 완전히 소화되고 고기조각의 형태가 조금 변했다.
한편 보먼트 박사는 위액을 채취해 시험관에 넣고 실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시험관의 온도를 몸 속 온도와 동일하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몸 속 온도를 정확히 측정할 필요가 있었다. 보먼트 박사는 구멍으로 온도계를 넣고 위액의 온도를 측정했다(37.8℃). 다음에 위액을 30g 정도 채취한 후 시험관에 넣고 가열해 같은 온도를 유지시켰다. 남은 과정은 각종 음식을 넣고 위액의 작용을 관찰하는 일뿐이었다.
위액이 항상 존재하는지 아니면 음식을 먹었을 때만 분비되는지 알아보는 실험도 행해졌다. 보먼트 박사는 위가 비었을 때 빵 부스러기를 위의 내벽에 닿게 했다. 그러자 맑고 투명한 액체 방울이 생기는 현상이 관찰됐다. 위액은 음식이 위에 도달할 때 분비가 시작되는 것이다. 오발사고를 겪은 한 환자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호기심 많은 한 학자의 우연한 만남이 의학 지식의 발전에 중요한 발판이 됐다.
줄 - 신혼여행 가서 폭포 온도 재는데 혈안
과학자의 호기심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곧잘 발동한다. 열역학 제1법칙을 발견한 영국의 제임스 프레스코트 줄은 신혼여행을 떠날 때 자신의 생각을 실험으로 확인하기 위해 온도계를 지참했다. 비록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문제에 대해 새롭게 도전하는 자세가 결국 열역학 제1법칙을 낳게 했다.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열과 일은 같은 종류의 에너지이고, 이들이 서로 변환될 수 있으며, 이들의 합은 보존된다. 사실 이 법칙을 발견한 사람은 줄뿐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의 마이어(R. Meyer, 1814-1878)와 헬름홀츠(H. Helmholtz, 1821-1894)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이 열역학 제1법칙을 발견한 방식은 제각기였다. 예를 들어 마이어는 사변적인 독일과학의 영향을 받아 형이상학적 방식으로 법칙에 도달했다. 이에 비해 줄은 경험과 실험적 연구가 활발한 영국과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실험을 통해 열과 일이 변환되고 그 합이 일정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줄의 지칠줄 모르는 실험정신은 신혼여행의 일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줄은 열과 일에 관한 연구에 골몰하던 중 스위스 알프스산맥으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머리 속에서 이론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히던 시기였다. 남은 문제는 실험을 통한 증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혼여행의 달콤한 꿈’은 줄의 관심 밖이었다. 줄은 신혼여행지에 폭포가 있다는 점을 떠올리고 엉뚱한 실험을 구상했다. 폭포의 온도를 여러 높이에서 재면 자신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폭포의 물이 떨어지는 것은 일에 해당한다. 폭포의 위치가 내려갈수록 물이 행하는 일의 양은 늘어날 것이다. 이때 전체 에너지가 보존된다면 소모된 일의 양만큼 열은 늘어나 결국 온도가 증가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줄의 시도는 다소 무모한 것이었다. 폭포 주변에 이는 심한 물보라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줄은 포기하지 않고 또다른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러던 중 물 속에 물갈퀴를 넣어 돌리면서 온도를 재는 장치를 고안했다. 이 장치를 통해 물갈퀴가 돌아가면 일이 발생해 온도가 올라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줄은 생전에 학계로부터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다. 1850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으로 추대될 때까지 학자들은 그의 이론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결국 줄은 자신이 꿈꾸던 대학교수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여생을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양조장을 경영하며 보냈다. 현재 교과서에서는 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일의 단위(J)로 사용하고 있다.
케쿨레 - 두차례 행운의 꿈으로 분자구조 해명
어느 누구라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부닥치면 자나깨나 그 문제에 매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꿈에서 시원한 묘책을 듣는 경우가 가끔 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케쿨레는 두번의 백일몽을 통해 아무도 풀지 못한 분자의 구조를 밝힘으로써 화학사상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케쿨레는 처음에 기센대학 건축과에 입학했지만, 당시 대화학자 리비히로부터 수업을 받고 감명을 받아 화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1850년대까지 분자 구조를 나타내는 방법은 단순히 각 원자의 수를 일정한 순서로 기술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물은 H₂O, 초산은 CH₃COOH였다.
케쿨레는 건축학에 관심을 가졌던 탓에 원자가 어떤 모양으로 연결돼 분자를 이루는지가 궁금했다. 당시 화학자들은 각 원자에 그것이 결합하는 힘을 나타내는 수, 즉 원자가를 할당했다. 예를 들어 수소에는 결합력 1, 산소는 2, 질소는 3, 탄소는 4라는 방식이다. 이들이 어떤 형태로 결합하는지가 케쿨레의 관심이었다.
1854년 케쿨레는 행운의 첫번째 꿈을 꿨다. 영국에 있는 어느 교수의 화학 조수로 파견됐을 때의 일이다. 친구 집에서 돌아오던 밤 버스에서 졸던 케쿨레의 머리에서 여러 원자가 ‘깡총깡총’ 뛰어다니며 빙빙 춤추다 사슬을 엮는 모습이 나타났다. 케쿨레는 꿈에서 깨자마자 이를 스케치했다. 원자가를 원자끼리 결합시키는 사슬의 수로 표시한 형태였다. 예를 들어 물의 경우 수소 결합 사슬은 1개, 그리고 산소 결합 사슬은 2개이며, 산소 양쪽으로 수소가 하나씩 결합하는 방식이다.(H - O - H)
그런데 또다른 난제가 찾아왔다. 당시 한창 개발되고 있는 합성염료의 주요 성분인 벤젠(C6H6)의 구조였다. 벤젠분자에 포함된 탄소의 수는 6개이므로 사슬의 수는 모두 24개다. 그런데 수소 원자는 6개뿐이다. 이들이 어떻게 결합하고 있을까.
두번째 행운의 꿈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1864년 벨기에의 긴대학에서 초청교수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케쿨레는 집 서재에서 교과서를 집필하던 중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아 펜을 놓고 의자에 앉아 선잠에 들었다. 이번에도 원자가 깡충깡충 뛰어다녔는데, 많은 기다란 열이 서로 달라붙으며 휘감기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마치 한마리의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빙빙 회전하는 모습 같았다.
케쿨레는 뱀이 꼬리를 무는 장면에서 힌트를 얻어 긴 고리의 양 끝을 연결해 닫힌 사슬 구조를 연상해냈다. 이 고리 구조는 이후 X선 검사를 비롯한 근대적 검사법에 의해 옳다는 점이 증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