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유명했던 ‘스타로봇’의 계보는 1956년작 영화 ‘금지된 행성’에 나온 로비에서 시작된다. 20여년 뒤 ‘스타 워스’의 R2-D2와 C3PO가 등장하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다시 80년대 들어서는 악당 터미네이터와 로보캅이 나왔다. 터미네이터는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자 90년대 들어서 ‘액체 로봇’에 악역을 넘기고는 착한 로봇으로 탈바꿈했다. 아무리 냉혹하고 무자비한 로봇도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 인간적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은 문화사적으로 흥미로운 주제다.
1920년대 ‘강제 노동’ 의미로 등장
‘로봇’(Robot)이라는 말은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카렐 차펙이 발표한 희곡 ‘로섬의 만능로봇’(RUR, Rossum’s Universal Robot)에서 처음 등장했다. 어원은 체코슬로바키아어 robota라는 단어로서 ‘강제적인 노동’이라는 뉘앙스가 들어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RUR이라는 희곡은 1925년 한국어로도 번역됐다.
그러나 로봇이라는 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자동인형’(automata) ‘살아 움직이는 인형’(animated doll)등의 말로 로봇의 개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19세기 막바지에 발명돼 20세기 초부터 광범위한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한 매체인 영화에 힘입은 바가 크다.
세계 최초의 영화는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로부터 불과 2년 뒤 로봇을 등장시킨 영화 ‘어릿광대와 꼭둑각시’가 프랑스의 멜리에스에 의해 제작됐다. 그 뒤로 영화와 문학에서는 로봇을 소재나 주제로 삼은 작품들이 많이 발표됐다.
로봇을 등장시킨 최초의 흥행성공작으로는 1900년 프랑스의 멜리에스가 만든 ‘자동인형 코펠리아’가 꼽힌다. 당시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영국에서도 ‘인형제작자의 딸’이라는 비슷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미국 최초의 로봇 영화는 1907년의 ‘기계인형’이며, 1914년에는 독일에서 ‘골렘’ 영화가 만들어졌다. 골렘이란 유태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움직이는 진흙인형을 뜻하는데, 흔히 로봇의 시조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한편 무성영화 시절의 최고걸작 SF중 하나로 꼽히는 ‘앨리타, 로봇들의 반란’이 1924년 러시아에서 제작됐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만 해도 로봇의 이미지는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다.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괴물, 기분 나쁘게 인간을 닮은 인형, 또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기계라는 식의 인식이 퍼져서 사람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한 예로 1926년 독일에서 발표된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노동계급과 귀족계급의 갈등이 극적인 구성으로 펼쳐지면서, 자본가의 사주를 받은 과학자가 여성 로봇을 만들어내 노동자들에게 침투시키고 이들을 폭력적으로 선동한다. 이 작품의 여성 로봇 디자인은 오늘날의 감각으로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세련된 모습이다. 50여년 뒤에 나온 ‘스타 워스’의 인간형로봇 C3PO는 ‘메트로폴리스’의 여성 로봇과 매우 흡사한 외형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1938년 미국의 SF작가 레스터 델 레이가 ‘사랑스러운 헬렌’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로봇도 나름대로의 ‘인격’을 부여받는 전기가 마련됐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과 똑같은 지성과 감정을 지닌 여성 로봇이 등장해 인간과 사랑을 나눈다.
이듬해인 1939년 역시 미국의 SF작가 엔도 바인더가 ‘아담 링크’라는 로봇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살인누명을 쓰게 된 로봇이 뜻을 함께 하는 몇몇 사람들의 도움으로 혐의를 벗고, 일반인들이 로봇에 대해 가지고있는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없애려 노력한다는 내용이다. 이 두 작품은 이후의 SF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쳐, 아시모프를 비롯한 많은 SF작가들이 걸작 로봇소설을 발표하게 된 단초를 남겼다.
1940년대 로봇의 윤리 선언
1940년 무렵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던 청년작가 아시모프는, 그를 비롯한 여러 훌륭한 SF작가들을 키워낸 편집자 존 캠벨과 작품 구상을 토론하던 중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오늘날 아시모프를 ‘로봇공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만든 유명한 ‘로봇공학의 3원칙’이 바로 이때 태어났다. ‘로봇의 윤리헌장’이라고도 불리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되며, 위험에 처해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된다.
제2원칙: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에 거스를 경우는 예외다.
제3원칙: 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과 제2법칙에 거스를 경우는 예외다.
이전까지 SF에나 등장하며 신비스런 차원에 머물렀던 로봇은 이 3원칙에 의해 비로소 나름대로의 자립성을 획득하게 됐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제 SF뿐 아니라 공학적 고려의 대상이 돼, 기계설계자나 엔지니어들에게도 이 3원칙은 유념해야 할 사항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스스로 판단해가면서 3원칙을 준수하는 인공두뇌를 만들기는 아직 요원하지만, 오늘날 이 로봇공학의 3원칙은 이른바 ‘가전제품의 3원칙’으로 변용돼 우리 생활에 실제로 적용되고 있다. 일본의 어느 SF팬이 정리했다는 ‘가전제품의 3원칙’은 다음과 같다.
제1원칙: 위험하지 않아야 한다
제2원칙: 사용하기 쉬워야 한다
제3원칙: 튼튼하고 수명이 길어야 한다
아시모프는 자신이 창안한 로봇공학의 3원칙이 SF장르에서 널리 통용되자 나중에 ‘제0원칙’이라는 새로운 항목을 추가했다. “로봇은 인류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되며, 위험을 간과함으로써 인류에게 위해를 끼쳐서도 안된다”는 내용이다. 제1원칙에서는 로봇이 영향을 미치는 대상이 개별 ‘인간’ 수준이었는데, 제0원칙에서는 그 대상을 인간 전체, 즉 ‘인류’로 확장시켰다.
아시모프는 이 원칙을 이용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인간’을 로봇이 처단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제0원칙 역시 가전제품의 원칙대로라면 ‘인류에게 위험이 되지 않아야 한다’ 정도로 풀이될텐데,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를 종말의 길로 몰고가지 않도록 경고하는 의미로서 알맞다. 만약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컴퓨터들이 이 제0원칙을 알았다면 암울한 미래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일본작가 고마쓰 사쿄는 ‘보미사’라는 단편을 써서 로봇공학의 아버지인 아시모프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보미사’(vomisa)란 로봇들이 신처럼 떠받들며 늘 주문 외우듯 읽는 이름인데, 바로 아시모프(asimov)를 거꾸로 뒤집은 말이다.
20세기 후반 휴머니즘에 대한 질문
1951년에 이르러서 로봇과 관련된 흥미로운 영화 ‘지구가 멈춘 날’이 발표됐다. 외계인이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에 날아와 인류의 호전성을 경고한다는 내용으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고전 걸작 SF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이 외계인을 죽여버리고는 로봇에게 “네 주인을 죽여서 미안하다”라고 하자, 로봇은 “아니다, 내가 그의 주인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아이디어는 1979년에 나온 ‘스타 트렉’ 극장판 영화에서 더 발전해, 기계만으로 이루어진 고도의 외계문명체가 신을 찾아 지구로 날아온다는 설정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1968년에 발표된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에서는 인간과 컴퓨터의 갈등이 섬뜩하게 펼쳐져 주목을 끌었다. 우주선의 중앙통제 컴퓨터가 승무원들 몰래 비밀 명령을 부여받고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자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한다. 인공두뇌의 사고나 행동양식에 관한 중요한 본보기가 되는 작품이다. 이와 비슷한 설정이 1979년작 ‘에일리언’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상업우주선에 탑승한 인조인간 승무원이 회사측의 방침에 따라 인간 동료들을 따돌리고 비밀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대머리 명배우 율 브린너가 로봇 총잡이로 나오는 1973년작 ‘웨스트 월드’는 오늘날 잘 알려진 인기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이 직접 쓰고 감독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일단 결정된 임무는 완수될 때까지 냉혹하게 수행하는 로봇의 무자비함을 매우 실감나게 묘사했다. 1984년에 등장한 ‘터미네이터’는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차용한 흔적이 짙다.
인간을 제압하려는 괴물로봇 이야기는 ‘악마의 씨앗’(1977)에서도 이어진다. 딘 쿤츠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에서는 컴퓨터가 인간을 잉태시켜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를 얻는다는 내용이 전개된다.
1980년대로 들어오면서 영화 속의 로봇은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좀더 심화된 주제를 다루는 방편이 된다. 1982년작 ‘안드로이드’나 ‘블레이드 러너’는 모두 인간보다 더 절실하게 인간성을 추구하는 안드로이드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과연 인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화두를 심도있게 파헤쳤다.
1986년작 ‘No. 5 파괴작전’이나 그 이듬해 발표된 ‘8번가의 기적’은 모두 로봇을 귀엽고 친근한 모습으로 묘사한 유쾌한 영화들이다. ‘8번가의 기적’은 ‘외계의 로봇 문명’이라는 소재를 또다시 채택한 경우다. 한편 터미네이터나 로보캅처럼 막강한 능력과 철저한 추진력을 지닌 로봇들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고도 지능을 갖춘 로봇
아시모프가 1976년 발표한 중편 ‘2백살을 맞은 사나이’는 로봇의 미래에 중대한 시사점을 던지는 작품이다. 외형이나 능력면에서 인간과 똑같은 로봇이 등장한다면 인간의 정체성이나 휴머니즘은 어떻게 될까?
‘2백살을 맞은 사나이’는 인간이 되려고 글자 그대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로봇 얘기다. 그는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우월한 성취를 이룩하고 또 인류에게 크나큰 기여를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로봇이 아닌 인격을 인정받는다는 오직 한가지 목적만 추구한다. 마침내 그는 ‘생명의 유한성’이 바로 자신과 인간의 차이점이라고 깨닫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비로소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아시모프 스스로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피력한 견해이지만, 미래에는 SF에서 접해온 것처럼 독립적으로 사고하면서 인간처럼 행동하는 로봇은 거의 등장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산업 현장이나 공용 로봇들은 중앙컴퓨터의 원격조정을 받는 ‘터미날’ 형태를 띨 것이다. 가정용도 이를테면 청소로봇이나 조리로봇처럼 집집마다 설치된 컴퓨터 인공지능의 통제에 따르는 전문분야별 단순작업장치가 될 것이다.
고도의 지능을 지닌 로봇은 주로 외계탐사용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많다. 학자들은 우리가 외계 문명과 처음 조우할 경우, 생명체가 아닌 로봇과 만날 확률이 많다고 말한다. 천문학적 시공간 단위를 필요로하는 우주여행의 특성상 생명체보다 훨씬 수명이 긴 로봇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류가 태양계 바깥으로 내보낸 파이어니어나 보이저 탐사선들도 모두 무인 로봇이다. 그들은 아득한 미래에 머나먼 외계에서 우리의 외교사절 역할을 담당할 것이 틀림없다.
사람을 닮은 인공지능체
흔히 로봇이라고 하면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것을 연상하지만, 차펙이 RUR에서 처음으로 등장시킨 로봇은 유기물질로 만든 인조인간이었다. 최근에는 로봇 외에도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휴머노이드와 같이 비슷한 의미를 지닌 말들이 많이 사용된다. 각각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오늘날 로봇은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기계장치’라는 광범위한 통칭으로 사용된다. 더이상 SF에만 등장하는게 아니라 산업현장에서 실제로 쓰이고 있으며, 꼭 인간과 비슷한 모양으로만 생기지도 않았다.
사이보그(cyborg)는 ‘사이버네틱 오가니즘’(cybernetic organism)의 약자로서 1950년대 의학자들이 창안한 개념이다. 애초의 발상은 인간의 신체를 인공장기로 대체해 외계와 같이 가혹한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게 만든다는 SF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질병이나 사고로 신체 일부의 기능을 잃은 사람들에게 인공장기를 달아주는 실용적인 방향으로 정착됐다.
사이보그의 개념에는 인공심장, 인공뼈, 의안이나 의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콘택트렌즈나 인조속눈썹, 가발을 쓴 사람까지 포함된다. 즉 사이보그는 더이상 SF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 일반적인 과학용어로 자리잡았다.
반면 아직 SF용어로만 쓰여지는 ‘안드로이드’는 외모가 인간과 아주 흡사한 로봇을 의미한다. 기계가 아닌 유기물 조직으로 만들어진 인조인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안드로이드는 외모뿐 아니라 말과 행동, 사고방식까지 인간과 구별이 안될 정도로 똑같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소개된 영화 ‘에일리언 4’에 나오는 위노나 라이더가 좋은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