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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 발견한 외과의학의 구세주

어머니 그리워한 겸손한 과학자

 

ABO식 혈액형을 발견에 안전한 수혈을 가능케 한 란트스타이너


인류의 수명은 지난 1, 2백년 사이에 35세 안팎에서 약 70세로 두 배 가량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수명이 크게 늘어난 데에는 의식주 생활의 전반적인 향상과 더불어 현대의학의 발전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의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그 중에서도 외과의 진보가 특히 뚜렷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오늘날 외과라고 하면 뱃속(복부), 가슴속(흉곽), 머리 속(두부)의 수술을 떠올리지만 19세기 중엽 이전의 외과는 오늘날과는 전혀 달랐다. 즉 ‘외과’(外科)라는 이름이 말하듯이 부스럼과 종기 등 신체 표면(外)의 문제만을 주로 치료할 수 있을 뿐이었다.

세가지 장벽

그러한 외과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크게 발전한 데에는 해부학적, 생리학적, 병리학적 지식의 향상과 거기에 바탕을 둔 외과 수기(手技)의 발전이 큰 몫을 했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가능했다.

우선 마취술의 개발과 발전으로 수술시 통증을 제거하거나 줄일 수 있게 됐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마취술이 없었던 시절에는 대규모 수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 술과 아편 등을 진통제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시간이 오래 걸리고 까다로운 수술을 할 수 없었다. 1840년대부터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의 효과가 발견되면서 그것을 마취제로 사용하게 됐고, 그렇게 되면서 외과는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됐다.

마취술의 도입은 현대적 외과 발전의 시작이었을 뿐 모든 것은 아니었다. 마취술의 발전으로 그전까지 할 수 없던 수술을 하게 됐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겨났다. 즉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환자의 상태는 오히려 더 나빠지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수술 부위에 심한 염증이 생겨 그것으로 크게 고생하거나 심지어 죽는 일이 수없이 생겨난 것이었다.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현상이지만 병원균에 의해 감염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던 당시에는 속수무책의 부작용이었다. 그 문제의 해결도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19세기 후반 파스퇴르와 코흐 등에 의해 병원균이 감염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독과 멸균 기술이 발전하게 됨으로써 외과의사들이 봉착했던 염증의 문제도 해결의 길이 열렸다. 특히 20세기 중반 이래 항생제가 개발됨으로써 대부분의 경우 감염과 염증은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게 됐다.

외과의 발전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벽은 출혈 문제였다. 아무리 실력 있고 솜씨 좋은 외과의사라 하더라도 수술을 할 때 출혈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었다. 사소한 출혈은 감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느 정도 이상 되면 환자는 쇼크에 빠지는 등 부작용이 생기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 출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안전한 수술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출혈 문제와의 싸움에서 많은 의사와 학자들이 공을 세웠지만 특히 결정적인 수훈을 세운 사람이 칼 란트스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였다. 란트스타이너가 ‘A, B, AB, O’ 혈액형을 발견함으로써 안전한 수혈이 가능해졌고, 또 그럼으로써 심한 출혈을 하는 수술환자와 부상환자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아마 안전한 수혈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으면 직접적으로는 수십만, 수백만 명 또는 그 이상의 출혈 환자가 아까운 목숨을 잃었을 것이며 또한 외과술의 진보도 훨씬 더뎠을 것이 틀림없다.

닭 피를 사람에게 수혈

출혈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혈액을 공급해 준다는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지만, 혈액이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는 사상은 동서고금을 통해 보편적인 것이었다. 이미 구약성경에도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해 속하게 했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장)라는 귀절이 있다. 또한 그리스 시대 이래 서양에서는 혈액은 인체를 구성하는 4가지 체액 가운데 하나로 그 중요성이 강조돼 왔다. 그에 따라 중세 시대 인노센트 8세 교황 등은 소년의 피를 마셔 회춘을 시도하기도 했다.

혈액을 혈관을 통해 외부에서 공급하는 일, 즉 수혈은 영국의 윌리엄 하비(1578-1657)가 혈액순환 현상을 증명하면서부터 가능해졌다. 그러나 하비 스스로는 수혈을 계획하거나 시도한 적이 없다. 하비가 1628년 혈액순환에 관한 자신의 연구결과를 기술한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해’라는 책을 출간한 지 24년이 지난 1652년 영국인 의사 프란시스 훗다가 닭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했지만 실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어떠한 방법으로 수혈을 했으며, 또 왜 실패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도 최초의 수혈 시도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 수혈은 아니지만 영국의 크리스토퍼 렌이 1657년 정맥을 통해 실험동물에게 여러 가지 물질을 주입하는 시도를 했고, 1665년에는 존 윌킨스가 개의 정맥에서 혈액을 채혈해 다른 개의 대퇴정맥에 수혈을 했다. 그리고 1665년 2월 리처드 로워가 영국 왕립학회의 월례회에서 많은 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동물의 동맥에서 다른 동물의 정맥으로 직접 수혈하는 데 성공했다. 로워는 개의 경정맥(목으로 뻗은 대동맥의 분맥)에서 피를 빼 빈사상태를 만든 뒤 그 개의 경정맥과 정상적인 개의 경동맥을 연결해 수혈을 했다. 그 결과 수혈 받은 개는 원기를 회복하는 효과를 보였다. 이로써 로워의 실험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혈액 교차대조 실험


1백50년간 수혈 금지

사람에 대한 수혈을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의 철학 및 수학 교수이자 루이 14세의 시의인 존 데니스였다. 실험동물 사이의 수혈을 거듭해 자신을 얻은 데니스는 1667년 오랫동안 고열로 고생하던 15세의 소년에게 동물 피 약 2백50mL를 수혈해 수혈 부위에 열이 생기는 등 약간의 부작용이 생겼지만 치료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데니스는 이듬해에 다시 다른 환자에게 팔의 정맥을 통해 양의 피를 수혈했는데, 이때는 수혈 부위에 심한 통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맥박이 불규칙해지고 구토, 설사, 근육통 등이 생겼고 마침내 환자는 사망하고 말았다. 데니스는 이 일로 환자의 부인으로부터 고소를 당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에 대한 수혈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해 이때부터 1백50년 동안은 어느 누구도 수혈을 할 수 없었다.

오랜 공백 뒤에 다시 수혈을 시도해 성공을 거둔 것은 영국 런던의 거이 병원에서 내과의사와 산부인과 의사로 활동하던 제임스 브란델이었다. 브란델 역시 데니스처럼 우선 여러 차례의 동물실험을 거듭해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을 확립했다. 즉 종이 다른 동물 사이의 수혈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수혈은 동종 동물 사이에만 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브란델은 데니스와 달리 사람의 혈액을 채혈해 환자에게 수혈을 시도했다. 브란델은 자신의 조수의 팔에서 약 3백50mL의 피를 뽑아 환자의 정맥에 주입했다. 환자는 일시적으로 증세가 좋아지는 효과를 보였지만 불행히도 사망하고 말았으며, 그 뒤로도 무려 18명의 환자가 사망하는 등 실패를 거듭했다. 브란델은 그러한 실패가 잘못된 수혈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환자들의 상태가 워낙 나빴기 때문이라고 여겨 좌절하지 않고 임상시험을 반복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분만을 할 때 많은 출혈을 한 환자에게 역시 자신의 조수에서 뽑은 약 2백50mL의 혈액을 수혈해 좋은 효과를 보았다.

브란델이 다시 시작한 수혈요법은 그 뒤 제임스 아벨링 등의 노력에 의해 방법이 개선되면서 그 효과가 폭넓게 인정되기 시작했다. 특히 1870년의 프러시아-프랑스 전쟁에서 의사들은 수혈로 많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수혈로 효과를 거둔 만큼 부작용도 많이 발생했으며 사망자도 속출했다. 첫번째 문제는 혈액이 응고하는 것이었다. 브란델과 아벨링은 물리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한계가 뚜렷했다. 때문에 연구자들은 적절한 응고방지물질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인산나트륨을 사용했지만 오히려 부작용이 더 심했다. 마침내 1910년대에 구연산나트륨을 응고방지제로 사용함으로써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을 보았다.
 

응집원과 응집소의 모형


수혈을 가로막는 응집현상

사실 응고보다 더 문제가 됐던 것은 ‘부적합한’ 혈액 사이에 생기는 응집현상이었다. 나중에 분명히 알게 됐지만 그 동안 수많은 부작용이 생겼던 것은 바로 이 응집현상 때문이었다. 1899년 샤틀록은 서로 다른 사람의 혈액을 섞었을 때 적혈구가 응집반응을 일으키거나 더 나아가 용혈현상(적혈구의 세포막이 파괴돼 그 안의 헤모글로빈이 흘러나오는 현상)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샤틀록은 이러한 반응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단순히 류머티스열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혈 부작용을 일으키는 응집반응의 정체와 그 원인을 규명한 사람은 란트스타이너였다. 1900년 란트스타이너는 혈청학에 관한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바로 전 해에 샤틀록이 발견했던 것과 똑같은 현상을 관찰했다. 즉 어떤 사람에게서 얻은 혈청을 다른 사람의 혈액에 첨가했을 때에 적혈구끼리 서로 엉겨 크고 작은 응혈괴(凝血塊)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란트스타이너의 이러한 관찰은 혈액형을 발견하는 출발점이 됐다. 그리고 란트스타이너는 서로 다른 사람의 혈액을 섞을 때 항상 응혈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발견했다. 어떤 혈액들 사이에는 응혈괴가 생기고 또 어떤 혈액들 사이에는 그것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란트스타이너는 놓치지 않았다. 샤틀록이 무심히 넘겼던 현상을 란트스타이너는 인내심 있게 추적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사람의 혈액을 몇가지 타입(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으며, 그러한 가설에 따라 연구를 계속해 1901년 응집성의 차이에 따라 세 가지 혈액형, 즉 A형 B형 O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몇해 뒤에는 그러한 혈액형의 차이는 적혈구의 구조상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요즈음 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떤 종류 혈액의 적혈구가 가진 응집원과 그것과 부적합한 혈청에 있는 응집소가 반응해 응집현상을 일으키고 나아가 용혈현상 등 부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첨단도구 보다는 문제의식

란트스타이너는 이러한 사실을 특별히 복잡하거나 ‘첨단적’인 방법으로 발견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과학의 역사에서 많은 위대한 발견이 그러하듯이 란트스타이너는 자신이 발견한 현상을 무심코 넘기지 않고 그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였다. 학문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방법이나 첨단적인 도구가 꼭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연구자의 문제의식이 더욱 근본적인 요소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거듭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란트스타이너가 세 가지 혈액형의 존재에 대해 확인을 한 그 이듬해에 폰 데카스텔로와 스털리는 네번째 혈액형, 즉 AB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란트스타이너 등의 발견은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거듭 확인됐다.

란트스타이너가 발견한 혈액형의 의미는 점차 뚜렷해졌으며, 그에 따라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기 시작했다. 친자(親子) 감별 등 법률적인 분야에서 혈액형이 쓰이기도 했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안전한 수혈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양에서는 17세기부터 수혈을 시도했으며 19세기 중엽 이래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혈액형이 발견돼 쇼크, 황달, 혈색소뇨증 등 수혈부작용의 정체가 분명해지기 전까지 수혈은 한편으로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란트스타이너가 혈액형을 발견함으로써 적합한 혈액만을 수혈에 사용한다는 원칙이 세워졌고, 그럼으로써 안전한 수혈이 가능해지게 된 것이다. 안전한 수혈이 가능해짐으로써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출혈 문제를 극복하게 된 외과의사들이 더욱 과감한 수술을 함으로써 외과의 발전도 가속화됐다.
 

1998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황상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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