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은 생화학에 관한 연구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해였다. 이 해에 DNA 구조를 해명한 왓슨, 크릭, 윌킨스가 노벨 생리ㆍ의학상수상자로 선정됐으며, 헤모글로빈과 미오글로빈 구조를 해명한 페루츠와 켄드루가 화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법학보다 화학이 좋아
페루츠는 1914년 5월 19일 오스트리아 빈의 부유한 가문에서 출생했다. 페루츠는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을 딴 관료를 양성하는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부모들은 그가 법률을 전공해서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했지만, 페루츠는 중등학교에서 점차 화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그의 부모들을 설득해서, 빈대학에 입학해 화학을 전공했다. 처음에 그는 유기생화학 분야에 흥미를 보였지만 빈에서는 자신의 관심을 충족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베슬리 교수로부터 비타민에 관한 연구로 1929년 노벨 생리ㆍ의학상을 수상한 홉킨스의 연구 내용을 소개받은 다음부터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할 것을 희망했다. 페루츠는 빈 대학의 물리화학 교수였던 헤르만 마크에게 케임브리지를 방문할 때 홉킨스의 실험실에 갈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마크는 페루츠의 부탁을 잊어버렸다.
그 대신 마크는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케임브리지 대학의 실험물리학연구소인 카벤디시 연구소의 버날과 그의 조수 호지킨이 찍은 펩신의 X선 회절 사진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페루츠에서 버날의 실험실에 갈 것을 권유했다. 윌리엄 헨드 브랙(아들 로렌스 브랙과 함께 191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의 제자인 버날은 X선 회절 패턴을 얻을 수 있다는점을 증명했다.
헤모글로빈 선물
페루츠는 1936년 9월 카벤디시 연구소에 연구학생으로 오게 됐다. 그는 생물에 관해 연구를 할 희망으로 버날에게 왔지만 버날은 당시 페루츠의 연구에 적합한 생체 고분자의 결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페루츠는 생체물질이 아닌 무기물의 구조에 관해 연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기물의 분석에는 관심이 없었던 페루츠는 1937년 여름 방학 기간에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서 그의 사촌 매형인 생화학자 펠릭스 하우로비츠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당시 헤모글로빈에 관해 연구하고 있었던 하우로비츠는 그에게 헤모글로빈을 대상으로 X선 결정법을 적용해 볼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면서 케임브리지에서 생리학자인 아다이르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아다이르는 헤모글로빈의 분자량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결정한 사람이었는데, 페르츠에게 말의 헤모글로빈 결정을 선물했다.
조셉 밴크로프트가 1907년에 헤모글로빈의 산소 평행곡선에 관해 연구하고, 힐이 그 곡선에 관한 수학적 해석을 한 이래 케임브리지의 생리학작들은 헤모글로빈에 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생물학자 데이빗 케일린은 헤모글로빈 색소 성분이 들어간 모든 종류의 단백질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페루츠에게 헤모글로빈 결정을 준비할 수 있는 실험장소를 제공했다. 동시에 페루츠는 버날과 펜쿠첸에게 X선 사진을 찍는 법과 해석하는 법에 관해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1938년 초부터 헤모글로빈 키모트립신의 결정에 관한 논문을 '네이처'지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8년 윌리엄 로렌스 브랙이 카벤디시 교수로 임용됐고, 그는 페루츠의 헤모글로빈 사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브랙은 자신과 그의 아버지가 개발한 X선 결정법이 생명체의 세포를 구성하는 거대 분자영역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브랙은 페루츠에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앗다. 1946년에는 켄드루가 합세하면서, 페루츠는 복잡한 구조분석에 적합한 X선 분석법을 개발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공군에서 버날 만나
존 켄드루는 1917년 3월 24일 옥스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프리드 켄드루는 옥스퍼드 대학의 기후학 리더(reader, 우리나라 대학의 부교수급)였으며, 어머니 이블린은 예술학자였다 켄드루는 브리스톨의 클리프턴 칼리지를 졸업하고, 1936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1939년에 화학전공으로 졸업한 후, 케임브리지 대학의 물리화학과에서 반응속도론에 관한 연구를 하던중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에 참전했다. 그는 항공부 연구편제에 소속돼 레이더를 개발하는프로젝트에 참여했고, 1940년에 항공부 과학담당 보좌관인 로버트 왓슨과 왓트경의 참모로 일했다. 그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영국 공군 중령직을 수여 받았다.
전쟁기간동안 그의 관심은 생물학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는데, 그 계기는 버날과의 만남이었다. 전쟁중에 버날은 정부의 과학담당 자문역을 맡고 자주 접촉했다. 1946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다음 켄드루는 단백질 구조에 관해 연구하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그는 전쟁 전에 받고 있던 장학금을 계속 받을 수 있었고, 카벤디시 연구소에서 결정학 리더로 있던 테일러 박사과정 학생이 됐다.
당시 카벤디시의 연구진에는 페루츠도 포함돼 있었다. 켄드루는 로렌스 브랙의 지도하에 페루츠와 같이 연구를 시작했다. 페루츠는 몇년 전부터 기존의 X선 결정학 테크닉을 개량해 단백질을 분석하는데 적합한 방법을 고안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켄드루는 처음에는 페루츠와 함께 헤모글로빈 구조를 규명하는 연구를 하다가, 독자적으로 미오글로빈에 관해 연구를 시작했다. 미오글로빈은 분자량이 상대적으로 작고, 결정으로 만들기 쉬우며, 구조가 밝혀지지 않은 단백질들 중의 하나였다.
생물학과 화학의 경계
켄드루는 페루츠와 함께 카벤디시 연구소의 의학 연구위원회의 창립 회원이었으며, 케임브리지에 분자 생물학과를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학을 했다. 그는 1954년 런던의 왕립연구소의 데이비-페러데이 연구소의 리더가 됐고, 그 후 '분자생물학'지 발기인으로 1987년까지 편집위원장을 지냈다. 켄드루는 미혼으로 지내다 1997년 8월 23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