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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학자의 꿈을 포기하고 타의에 의해 의대생이 되었다. 한때는 절망에 빠져 재수를 생각하기도 했으나…

선생님 몰래 소설책을 읽다가 들켜서 혼나던 일, 매주 일요일마다 공부한다고 집을 나와서 학교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하루종일 농구하던 일, 밤늦게 하는 자율학습 시간에 만화책을 빌려와서 돌려가며 읽던 기억들은 아직도 나의 마음을 고등학교 시절로 이끌고 있다. 분명 나의 고교시절은 즐거운 기억과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롱져 있었다. 입시라는 괴물이 끊임없이 나를 옭아 매었지만.

입시에 대한 부담은 고교시절 내내 나의 가슴속에 무겁게 자리잡고 있었다. 살벌하기까지 했던 경쟁의 틈바구니를 어렵게 헤쳐나온 것이다. 학력고사를 대비하기 위해 나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국·영·수 중심의 공부를 했다. 특히 나는 영문법이 약했으므로 독해를 주로 많이 공부하였다. '백독(讀)이면 의자연(依自然)'이라는 말을 굳게 믿고 어떠한 독해든 눈에 띄면 부딪쳐 나갔다. 이때 고1, 2때 읽었던 영한(英韓) 대역 문고류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읽었던 영어 문장들로 인해서 어떠한 글이든 두려움없이 덤벼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같은 외국어에 대한 투자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학력고사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음은 물론이고 대학에 들어온 후에도 절대적인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국어는 고1때 부터 수업을 충실히 들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수업을 열심히 들으면서 보충수업시간에 풀었던 문제집을 활용했다. 교과서를 소리내어 여러 차례 정독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가장 좋아했던 과목인 수학은 고3에 들어서면서 오히려 성적이 떨어졌다. 다른 과목 공부에 대한 압박감으로 잠시 소홀히 했더니 금방 그 댓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여름방학 때부터 수학을 다시 점검하여 만회해 갔다.

또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하는 학력고사에 대비하여 학력고사 유형으로 나온 문제집을 많이 풀어보았는데 적잖은 덕을 보았다.

과학과목으로는 화학·생물을 선택했다. 2학년 겨울방학 때 전과정을 대부분 훑어 보았다. 고3때에는 학교수업을 충실히 따라가며 나름대로 요약노트를 만들어 대비했다. 학력고사 한달 전부터는 문제집보다는 요약노트를 주로 보았는데 이 방법 또한 주효했다.

마침내 학력고사일이 왔다. 이때 나에게 2개월 정도만 여유가 있었다면…. 당시 나는 2개월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2개월 정도만 더 공부하면 어떤 대학도 합격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모든 수험생의 한결같은 바램이겠지만 결전의 날은 여지없이 다가왔다. 응시한 대학은 인제대, 학과는 의예과였다. 떨어질 것 같아 마음졸이던 시간이 그리 길 수가 없었다. 일일(一日)이 여삼추(如三秋)였다.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이런 '고문'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이같은 상념에 빠져있을 때 낭보가 전해졌다. 합격소식이었다. 와!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의예과 과정은 전인(全人)으로서의 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다. 단순한 기술자로서의 의사가 아니라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의사를 지향한다. 또 한명의 성숙한 사회인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 의사의 자질을 키우는 시기인 것이다. 동시에 자기 나름대로의 취미생활과 교양을 키우는 시기이기도 하다. 외국의 경우에는 일반 자연과학계열 대학을 나온 뒤에야 의학부에 진학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그 과정이 2년으로 단축돼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의대선호를 비웃어

의대생으로서 지난 1년은 나에게 있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고교시절 나는 페니실린의 발견자인 플레밍박사를 존경하며 생화학도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의 의지에 의해서 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의사에 대한 사회적 평가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의대를 선호하던 뭇 친구들을 비웃고 있던 나였기에 의대생이 된 것이 처음엔 참으로 절망스러웠다.

더구나 학교는 부산에 있고 예과과정은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불만스러웠다. 화려한 네온사인에 익숙한 서울출신인 내가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의 한켠, 어방산이라는 산중턱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불안감으로 엄습해 왔다. 중·고등학교시절에도 집을 떠나 자본 적이 거의 없던 내가 학기내내 집을 떠나 있어야 된다는 사실은 두려움을 가중시켰다. 특히 가족들이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하고 밖에서 자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경상남도는 참으로 먼 거리였고 커다란 불안요소였다.

집을 떠난 불안감과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맞이한 1학년 1학기는 시작과 동시에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대학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환상과 천국과 같을 것이라는 보랏빛 생각을 허물어뜨리기에 충분했다.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발견―즉 자신의 능력이 보잘 것 없다는―이 학과공부와 부딪치며 나를 방황속으로 몰고 들어갔다. 더욱이 생소한 외지생활은 나를 혼란과 방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학생활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방황은 오히려 나의 완성을 촉진시켜주었다. 수많은 책과 사상을 접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서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기 시작했다.

"젊음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고 또 그러한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라고 외치며 술잔을 기울였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상대와 환경이 주어진 곳에서의 생활은 나의 잠을 흔들어 깨웠다. 고등학교때 나의 작고 폐쇄적인 생각에 메스를 가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학년 여름방학이 되어 서울에 올라왔다. 가족의 포근함 속에 다시 안긴 것이다. 집에서 혼란했던 그간의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이 정리되면서 단순히 플레밍교수의 업적을 존경하기 보다는 과학도로서 그의 삶 자체를 존경하게 되었다. 커다란 업적으로 부와 명예가 그의 생전에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구소로 돌아가 세균학자로 일생을 지낸 플레밍교수의 모습에서 진정으로 학문을 사랑하는 과학도의 삶의 자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해골이 아름답게 보여

지난 여름방학중에 혼자서 공부해본 골학(骨學)은 정말로 매혹적인 것이었다. 뼈 하나 하나의 모양과 구조, 그 뼈가 하는 일들을 하나씩 공부해 나감으로써 인체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다. 경악에 가까울 정도의 완벽한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는 신의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가 저절로 나왔다.

골학을 공부하고 난 뒤 영화관에 간 적이 있다. 우습게도 그 괴기영화에서 공포를 주는 소품으로 등장하는 해골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2학기가 되어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학과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재수라는 단어가 나에게 언뜻언뜻 다가왔다.

그러던 중 수강하게 된 의학개론 강의는 나에게 의과대학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던져 주었다. 의학사강의를 받게 됨으로써 새로운 눈을 얻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의술의 혜택이 간단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의학도들의 분투의 결과임을 생생히 알게 된 것이다. 마침내 나도 그 대열에 끼게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마겐지 베르나르 리스터경 등과 같은 분들의 질병과의 고군분투를 생생히 보는 과정 속에서 옛부터 의료인이 찾던 인술제세(仁術濟世)라는 의미가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이제 나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과거에 행해졌고 현재 행해지고 있고 그리고 미래에 행해질 의사들의 고군분투를 이해한다. 그리고 내가 의대생이라는 사실이 무한히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 영원히 신비로울 생명에 대한 도전의 길, 그 길이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닌가!

어느덧 나의 대학교 1학년 생활이 지나가 버렸다. 이제 곧 후배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선배들이 "다시 하라고 한다면 죽어도 다시 하기 싫다"고 말하는 본과생활을 눈앞에 둔 의예과 2학년이 된다.

새로 후배들이 들어오면 같이 앉아서 술을 함께 나누며 나의 방황극복사를 들려주고 싶다.
 

유병훈 인제대 의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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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유병훈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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