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K씨는 며칠째 밤을 새우며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다. 새로 개발한 자동차 모델이 사람에게 얼마나 편안함을 주는지 테스트하기 위해서다. 여러개의 기술적 관문을 거친 후 남은 문제는 한가지. 운전자가 문을 열고 차를 탈 때 가장 편리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모형을 선택하는 일이다. 즉 차에 들어설 때 목과 허리를 지나치게 구부리지 않는지, 의자에 앉아 핸들을 잡을 때 몸이 불편하지 않은지 판단해야 한다.
이 테스트를 위해서는 당연히 누군가 차에 타봐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직접 차를 타서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얻기 어렵다. 몸의 각 관절에 얼마나 무리가 가는지에 대한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잭과 새미
최선의 대안은 ‘보통’ 사람의 몸매와 관절의 움직임을 갖춘 모델을 시승시켜 정보를 얻는 방법이다. 이 ‘보통’ 사람의 모델로는 진짜 사람이 아닌 사이버 공간에 존재하는 가상 인간이 제격이다. 아예 가장 자연스런 관절의 회전 범위를 가상 인간에게 저장시켜 놓으면 차에 오르는 동작이 부드러운지 여부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수없이 많은 시도와 수정을 반복해도 결코 지치지 않는다. K씨의 직업은 바로 이 가상 인간이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자동차 모델을 컴퓨터 화면에서 수정하는 일이다.
가상 인간은 진짜 인간에게 실용적으로 상당한 도움을 준다. 가령 가상의 자동차를 비롯해 기관차 운전대, 비행기 조종실에 들어가 업무를 수행하면서 접근이 편리한지, 작동위치는 안락한지, 제어장치들은 접근이 쉬운지, 표시화면이나 계기, 거울과 외부 시야는 확실한지를 시험할 수 있다. 실제로 사람이 직접 느끼고 확인하는 경우보다 여러모로 편리한 시스템이다.
가상 인간이 제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크기, 동작 능력, 시야 등이 실제 인간과 거의 똑같아야 한다. 현재까지 가장 첨단화된 가상 인간은 버추얼 잭(Virtual Jack). 1970년대 중반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배들러 교수가 박사 논문을 위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탄생됐다. 배들러 교수는 이 대학의 ‘휴먼 모델링 및 시뮬레이션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잭은 여기서 계속 능력이 개발되고 있다.
잭은 남성. 미국 성인 남성의 표준 몸매를 갖추고 차량이나 새로운 작업 공간에서 진짜 인간 대신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잭은 현재 70개가 넘는 관절을 갖고 있다. 1988년 미육군에서 수행한 인체측정학적 조사에서 산출된 데이터를 기본으로 탑재하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관절의 움직임 범위와 팔다리 치수가 변경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버추얼 잭은 지능적으로 어느 정도의 자율 행동을 한다. 한가지 예로, 잭은 빨간색 목표지점을 향해 가는 도중 장애물을 만나면 스스로 진로를 변경하면서 장애물을 피해 걸어간다.
버추얼 잭 외에도 다수의 가상 인간이 출시돼 있다. 이 중에서 버추얼 잭과 쌍벽을 이루는 것이 영국의 노팅검대학에서 개발된 새미(SAMMIE)다. 새미는 버추얼 잭보다 기능은 떨어지지만 더 많이 보급돼 있다.
가상 인간의 도움으로 무사히 작업을 마친 K씨는 집에서 모처점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K씨는 오랜만에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들과 채팅을 하려고 시도한다. K씨의 ID는 ‘홍길동’. 흥미롭게도 화면에서는 K씨가 만든 진짜 홍길동 모습이 등장한다.
채팅방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등장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터미네이터, 스폰, 슈퍼맨과 같은 액션 스타들이 눈에 띈다. K씨는 자연스럽게 이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며 안부를 묻는다. 이들 모두는 자신의 신상명세를 철저히 숨기고 자신이 변신하고 싶은 모습으로 둔갑해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모습에 대해 어느 정도 불만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K씨는 몸이 다소 외소한 점 때문에 평소 ‘남들이 나를 작다고 무시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다. 성격이 내성적인 탓에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어렵다.K씨의 고민은 사이버 공간에서 시원스레 해소된다. 홍길동의 모습을 갖추고 채팅방에서 씩씩하고 늠름하게 등장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신감을 얻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다른 사람들도 K씨를 왜소하고 소극적인 사람이 아닌 활달하고 믿음직한 ‘홍길동’으로 기억한다. 현실 세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내가 이곳에서는 자유자재로 실현되고 있다.
이처럼 가상 인간의 역할은 자동차 모델 개발과 같은 실용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현재 ‘애버타’로 통칭되는 인터넷에 등장한 가상의 인물들은 새롭게 건설한 사이버 사회에서 다채로운 구성원으로 참여해 활약하고 있다.
스캔들 없는 나만의 스타
‘버추얼 잭’이나 ‘애버타’는 모두 컴퓨터 사용자가 자신의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만든 가상 인간이다. 이들과 달리 어느 곳에선가 만들어져 컴퓨터 화면에 등장해 사람들을 유혹하는 매력적인 가상 인간이 있다. 영국의 만능 연예인 라라 크로포드, 일본의 가수 교코 다테를 위시해 국내에서 속속 등장하고 있는 사이버 스타가 그들이다.
게임 주인공으로 데뷔한 29세의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 라라 크로포드는 사이버 공간에서 모델뿐 아니라 가수로 활약해 전세계 2천5백만명의 팬을 확보하고 있다. 또 깜찍한 용모를 갖춘 일본의 사이버 여가수 교코 다테(19세)는 일본 통산성 정보화 캠페인 포스터 모델로 데뷔한 이후 ‘러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곡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 현재 잡지모델과 DJ로 활약하고 있다. 그녀는 20세가 넘으면 영화배우와 누드 모델로도 활동할 계획이어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국내에서는 작년 말 사이버 남자가수 아담이 등장한 이후 여성 캐릭터 류시아와 사이다가 가수로 데뷔했다.
사이버 스타들은 말 그대로 ‘스타답게’ 외모와 율동, 목소리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다. 외모는 수많은 실제 미남, 미녀를 분석해 사람들에게 가장 매력을 끄는 형태로 만들었다. 또 자연스런 율동을 구현하기 위해 댄서의 동작을 촬영하고 여기에 사이버 캐릭터의 외모를 입혔다. 목소리는 물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인 가수나 성우가 연출했다.
사이버 스타는 결코 지치는 법이 없다. 바빠서 스케줄을 펑크낼 리도 없고 출연료가 그렇게 비싸지도 않다. 무엇보다 실제 연애인과 달리 스캔들이 전혀 없다. 모든 행동이 사람에 의해 조작되기 때문에 누구나 꿈꾸는 ‘이상형’ 연예인의 모습을 쉽게 갖출 수 있다.
또 팬들은 사이버 스타를 자신만의 공간에서 ‘소유’할 수 있다. 국내 톱가수를 아무리 열광적으로 사랑한다 해도 그를 만나기란 하늘에 별따기다. 따라서 둘만의 공간에서 그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이버 스타는 가능하다. 이규환 원장(한마음정신과의원)은 “TV나 잡지와 같은 기존의 대중 매체는 일방적으로 스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뿐”이라고 지적하고 “이에 비해 사이버 스타는 누구나 컴퓨터만 켜면 자신이 명령을 내리는 대로 노래하며 춤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즉 현실의 나와 사이버 공간의 가수와의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그래서 TV 화면이나 콘서트에서 먼발치에서나 볼 수 있는 진짜 스타보다 더욱 매력을 끌 수 있다.
국내 사이버 가수의 꿈은 무엇일까. 아담과 류시아, 그리고 사이다는 모두 영국의 라라 크로포드처럼 세계적인 만능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한다. 광고 모델은 물론 소설이나 만화, 그리고 게임의 주인공, 심지어 영화 배우로 화려하게 데뷔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문화 공간 여기저기서 캐릭터 하나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낳는 ‘캐릭터 산업’에 진출해 황금알을 손에 넣기 위해서다.
캐릭터 산업은 영상물이나 출판물을 통해 친숙해진 주인공 이미지를 특정 상품에 이용하는 산업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캐릭터 시장은 연간 1조원 규모. 2000년대에는 5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외국 캐릭터가 성공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미키마우스는 97년 한해동안 국내에서 로얄티로만 1백50억원을 벌어들였다. 그래서 국산 캐릭터를 개발해 시장을 확보하려는 열기가 높아지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 필요하다. 이들이 첫 직업을 가수로 택한 이유다.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일정한 팬이 어느 정도 확보된 곳이 바로 음반시장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 굳히기’ 작업이 어느 정도 완료되면 이들의 활동 무대는 훨씬 다양하게 펼쳐질 것이다.
인간 정체성 문제 제기
인간의 실생활을 돕는 일에서부터 문화 공간에 이르기까지 가상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곳곳에 깊숙히 침투시키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이들의 얼굴 표정과 움직임은 다소 어색하다. 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철저하게 통제되는 피조물일 뿐이기 때문에 가상 인간이 스스로 사고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만일 현재보다 기술이 훨씬 발달해 진짜 인간과 거의 구별이 안될 정도의 외모를 갖춘다면 어떨까. 그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수준을 넘어 직접 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장치가 개발된다면? 더욱이 이들에게 인공지능이 결합된다면? 그래서 나와 똑같은 외모와 지능 수준을 갖춘 또하나의 내가 화면 속에 등장해 나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않을까.
가상 인간의 미래를 점쳐보는 이유는 단순히 인간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는지, 그리고 게임에서 얼마나 더 실감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수준을 넘어선다. ‘버추얼 잭’이나 ‘애버타’를 통해 사람은 현실에서 사이버 공간으로 들어간다. 또 아담이나 사이다는 사이버 공간에서 현실 세계로 뛰쳐 나온다. 그렇다면 현실과 가상 공간의 경계는 어떤 것인가. 또 여기에 만들어진 인간은 진짜 생명체와 어떻게 다른가. 이곳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또다른 나는 진짜 나인가. 아직은 흥미롭고 신비한 이미지로만 다가오는 우리의 사이버 친구들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진지하게 제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