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게임이 쏟아져 나오는 보드게임의 황금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지난 6개월간 ‘보드게임과학’ 연재를 통해 과학을 한 스푼 넣은 보드게임을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게임은 현존하는 보드게임 중 가장 과학적인 게임 ‘바이오스: 메가파우나’다. 과학 테마 보드게임의 끝판왕 ‘바이오스 시리즈’를 통해 인류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지 가늠해 볼 준비가 됐는가?
편집자 주
자타공인 ‘보드게임 덕후’인 과학자의 생생한 설명을 통해 과학과 게임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보드게임들을 살펴봤습니다.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보드게임과학’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바야흐로 보드게임 황금기다. 다양한 종류의 보드게임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데, 이 추세는 세계 최대 보드게임 커뮤니티 ‘보드게임긱(boardgamegeek)’만 봐도 알 수 있다. 보드게임긱에는 한 보드게임에 30명 이상의 사용자가 평가를 남기면 긱 랭크에 등록해주는 시스템이 있다. 그래서 긱 랭킹을 얻은 보드게임이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볼 수 있다.
올해까지 긱 랭킹을 얻은 게임은 2만 7000개가 좀 넘는다. 90년대에는 10년 동안 도합 1500개 정도의 새 게임이 긱 랭크에 등록됐지만, 요즘에는 매년 그 정도 되는 수의 보드게임이 등록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킥스타터(Kickstarter)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후원을 받으며 새로운 게임을 만드는 작가들의 활동이 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를 비롯해 많은 보드게이머들의 지갑은 쏟아져 나오는 보드게임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얇아져만 갔다. 어떤 보드게이머들은 새로운 게임을 구하지 않고 이전에 구매했던 것을 다시 하는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보드게임의 가격에 대한 부담도 한몫했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보드게임의 필수 요소 ‘규칙’ 그 자체가 장벽이 된 것이다. 보드게이머들은 게임을 오래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 규칙을 배우는 것이 힘겨워졌고, 할 줄 아는 게임만 다시 하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였다.
반면, 용감한 보드게이머들은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익혀 도전하는 것을 즐겼다. 익숙한 게임이 가장 재미있는 것이었다면 긱 랭킹은 변하지 않고 유지됐을 것이다. 구관이 늘 명관일 테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긱 랭킹의 1위 자리는 계속해서 바뀌었다. 일꾼 놓기 분야의 명작 ‘아그리콜라(2008~2010년 1위)’, 냉전 시대 테마의 카드 게임 ‘황혼의 투쟁(2010~2016년 1위)’, 레거시 게임의 전성기를 연 ‘팬데믹 레거시: 시즌1(2016~2017년 1위)’, 최고의 완성형 롤플레잉 보드게임 ‘글룸헤이븐(2017~2023년 1위)’, 유로 게임의 정점 ‘브라스: 버밍엄(2023년~현재 1위)’. 긱 랭킹 1위 게임들을 통해 보드게이머들이 열광한 게임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다양한 보드게임이 출시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자면, 지구상에 생명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고대의 어느 시점이 연상된다. 보드게임의 종류가 다양해지는 과정은 생명체의 진화 과정과 크게 닮았다. 보드게임 중에도 생물의 진화를 테마로 한 작품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악명높은 작품이 바로 스웨덴의 보드게임 디자이너 필 에클런드의 ‘바이오스(BIOS)’ 시리즈이다. 사람들은 ‘로켓 사이언티스트’로 불리는 항공 공학자인 그가 보드게임을 만들면 어떤 것이 나올까 궁금해했다. 바이오스 시리즈는 이 묘한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바이오스: 메가파우나’의 규칙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짝짓기할 암컷 올빼미를 찾는 음파가 울려 대는 숲속에서, 수컷 올빼미의 정포(精包)가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정포는 떨어지는 잎사귀로 보이는 물체를 찾아냈지만, 그 물체는 거대한 균류가 펼친 활강체였다. 정자는 미세한 먹물 방울을 분사해 방어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들러붙은 균류는 느긋하게 정포를 소화용 균사로 뒤덮기 시작했다.”
보드게임의 규칙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난생처음 들어 봤을 생소한 생물학 용어들로 가득한 규칙서를 읽으며 많은 보드게이머들에게 뇌 정지가 왔을 뿐이다. 필 에클런드는 플레이어들을 4억 5000만 년 전 오르도비스기의 생명체가 들끓는 대륙으로 안내한다. 지구에 대기가 발달하고 오존층이 생겨 물 속에 있던 생물들이 서서히 육지로 나오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이다. 게임 속에서 여러분은 자그마한 생명체가 돼 긴 세월에 걸쳐 진화를 경험하게 된다. 게임이 끝났을 때, 당신이 어떤 생명체가 돼 있을지 상상이 되는가?
남윤중
➀사건 카드를 뽑을 때마다 가상 지구의 산소 농도, 구름의 양 등 다양한 환경 조건이 변화한다. 사건 카드에는 퉁구스카 마그마 사건(왼쪽)처럼 생물권 외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아졸라 사건처럼 생물권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있다.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생명체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해 ➁변이 카드를 선택해야 한다. 변이 카드 뒷면에는 해당 변이가 진화할 방향성이 적혀있다.
과학 | 과거로 자라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 개발되지 않는 한, 우리는 과거의 생물에 대한 정보를 직접 얻을 수 없다. 대신 과학자들은 생물이 죽어 지층에 남은 흔적이나 생활 흔적이 보존된 돌, 그러니까 화석에서 과거의 생물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화석으로 남은 생물의 형태를 분석하고, 비슷한 것들끼리 묶어 순서대로 나열하면 진화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났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고생물학은 새로운 생물 화석이 발견될 때마다 크게 발전해 왔다.
가장 좋은 화석은 DNA를 추출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된 것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식물의 진액에 빠진 모기의 화석에서 공룡 DNA를 추출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물론 일반적인 DNA는 보존 기한이 길지 않기 때문에 먼 과거에 살았을 공룡의 DNA를 추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가까운 과거에 살았던 생물이나, 포자 형태로 DNA의 보존 기한이 극도로 늘어난 희귀한 경우에만 이 방법이 쓰인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화석에서 DNA를 추출하는데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DNA는 보드게임으로 치자면 규칙서 같은 것이다. 규칙서에 적힌 대로 물건을 준비하면 게임을 해 볼 수 있다. 생물도 마찬가지로 DNA에 담긴 정보를 이용해서 주변의 물질을 끌어모아 호흡, 번식 등 생명 활동을 한다. 과학자들은 화석 속 DNA에 숨겨진 정보를 비교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 생물의 진화 지도를 그려보려는 것이다.
DNA를 정교하게 비교하고 분석할 수 있는 현대의 분자생물학 기술이 개발되기 전에도 생물 사이의 관계를 형태학적 특징에 기반해 분류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는 생물을 분류하고 비슷한 것들끼리 묶을 수 있는 기준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현재 생물을 분류하는 단계인 계문강목과속종 체계와 속명과 종명을 이어서 쓰는 학명 표기 방법은 린네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린네 이후 과학자들은 생물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이고 분류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분자생물학이 세상에 없었던 시대의 인물인지라, 린네는 생물의 외형적인 특징을 기준으로 종을 분류했다. 게다가 그는 하나의 종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진화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후 찰스 다윈이 등장해 진화에 관한 과학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게 됐다. 생물체는 긴 시간을 거치며 유전 물질 속에 여러 변이를 갖게 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변이 중 자연 환경에 적합한 것들이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남아있는 생물의 DNA와 과거 생물의 화석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계통수(Phylogenetic tree)를 그리는 중이다. 계통수는 공통의 조상인 뿌리 부분부터 수많은 가지를 뻗어 현재의 생물이 가지 끝에 위치하도록 한 나무 모양의 그림을 말한다. 현재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생물, 즉 가지 끝부터 과거의 생물인 뿌리 쪽의 생물까지 연결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계통수는 실제 나무와 반대로 가지 끝부터 가장 굵은 줄기 쪽으로 자란다. 생명의 기원을 찾아가는 과학자들은 거꾸로 자라는 생명의 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인 셈이다.
게임 |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그러나…
보드게임 바이오스: 메가파우나를 시작하는 여러분은 계통수의 중간 가지에서 절지동물, 양서류, 연체동물과 환형동물, 식물과 균류를 선택해야 한다. 과거의 한 시점에서 자신이 선택한 생물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 실시간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오르도비스기는 캄브리아기에 이어 생물 종이 다양하게 분화한 시기다. 게임 속에는 지금으로부터 5억 년~4억 4000만 년 전 오르도비스기 생물종들의 진화 과정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복잡한 생물학 용어를 애써 무시하고 규칙서를 열심히 읽어본다면, 바이오스: 메가파우나는 크게 네 단계로 이루어진 라운드를 반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 사건 단계(Events)에서는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해 여러분의 생물이 살아갈 환경에 영향을 준다. ‘퉁구스카 마그마 사건’이 발생하면 땅속에 묻혀있던 석탄이 화산활동에 의해 가열돼 메탄을 발생시킨다. 이에 따라 온실효과가 강화되고 해수면이 상승해 홍수가 일어난다. 반면 ‘아졸라 사건’이 일어날 경우 극지방에서 물이끼가 대발생해 대기 중의 탄소를 포집한다. 이 결과 온실효과가 약화한다.
다양한 사건 속에서 생명체는 기관의 형태를 변화하며 적응해 간다. 이를 ‘변이’라 부른다. 행동 단계(Actions)에서는 플레이어들이 포인트를 사용해 자신의 생명체에게 변이를 만들거나 이전에 만들어진 변이를 개선하고, 새로운 종으로 분화할 수 있다. 여러분은 이 단계를 거치며 난생처음 보는 종이 탄생하는 광경을 목도할 것이다.
‘물관’이라는 변이 카드를 고른 당신이 변이를 개선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물관은 식물 내에서 물과 무기양분이 이동하는 통로다. 물관은 질소 고정 뿌리 결절이나 동면외피 두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생명체를 유인해 잡아먹는 육식성 식물을 만드는 꿈을 꾼다면 동면 외피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여기에 촉모를 추가해 동물을 유인할 미끼로 삼는다면 당신의 육식성 식물은 최강의 사냥꾼이 될 것이다.
분산 단계(Mothers&Dispersal)에는 자손을 주변 대륙으로 퍼뜨릴 수 있다. 다만, 퍼져 나갈 장소의 환경이 좋지 않거나 적합한 먹잇감이 없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은 서로 다른 규칙에 따라 경쟁한다. 당신의 생물이 다른 종을 멸종하게 만들고 자신만 살아남거나, 먹이가 없어 공멸에 이를지도 모른다. 여기서 공존은 중요한 키워드다.
먹이가 없거나 자손을 퍼뜨릴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생물은 마지막 단계인 매장과 화석화 단계(Burials&Fossil)에서 멸종한다. 이후 라운드는 다시 처음인 사건 단계로 돌아가 네 단계를 반복하게 된다. 숙련자용 룰을 적용할 때는 고생대를 5라운드 진행하고, 중생대를 5라운드 진행한다. 그리고 이어서 신생대 5라운드를 진행할 때, 사건 카드 중 ‘칙술루브 등급 혜성’ 카드가 등장하면 게임이 끝나게 된다. 이름이 생소하지만, 이 혜성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공룡을 멸종에 이르게 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 혜성이다. 하나의 거대한 지질시대가 끝나기 전까지 여러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돼 부산하게 자손을 퍼뜨린다. 세계가 혜성 충돌로 멸망할 것을 아는 상황에서도 여러분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혼란 속에서 어쩌면 작고 털 달린 생물이 이후에도 살아남아 멸망한 세계를 다시 일으킬지도 모른다. 650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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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바이오스: 메가파우나’의 주무대가 되는 고생대 오르도비스기의 풍경을 상상한 그림. 실제 지구에서 오르도비스기의 주인공은 껍데기가 원뿔 모양인 두족류였다.
팁 | 끝난 줄 알았지?
바이오스 시리즈는 원래 세 개의 각기 다른 게임이었다. 필 에클런드는 동료들과 함께 이 게임들을 하나의 큰 흐름으로 묶으려는 목표를 세웠다. 첫 번째 작품 ‘바이오스: 제네시스’는 이름에 걸맞게 지구상에서 탄생한 최초의 생명체를 다룬다. 지구의 바다 깊은 곳에서 시작해 수십억 년 동안 변이를 쌓고 멸종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생명체는 우리가 알 법한 형태로 진화했다.
‘바이오스: 메가파우나’에서는 바닷속에서 꾸물거리던 작은 생명체가 상륙해 거대 동물(megafauna)이 되는 과정을 다룬다. 다행스럽게도 메가파우나의 복잡한 규칙이 부담스러운 보드게이머를 위해 게임사는 같은 시대를 다루지만, 곤충 등의 작은 생물에 국한된 ‘바이오스: 메소파우나’를 준비해 두었다.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예상했겠지만, 바이오스: 메가파우나에서 살아남은 작은 포유류는 진화를 거쳐 인간이 된다.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바이오스: 오리진스’는 인류의 조상들(혹은 인류의 조상이 될 뻔했던 자들)의 생존 경쟁을 다룬다. 플레이어들은 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호빗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게임을 시작한다. 오리진스는 뇌의 진화를 핵심 시스템으로 삼고 있으며, 인간 의식이 어떤 경로를 통해 진화했는지 그 과정에 집중한다. 오리진스의 끝에 플레이어는 산업, 정치, 문화, 기술, 철학을 발전시키며 인류의 생존 경쟁에 종지부를 찍는다.
기나긴 진화를 거쳐 지구 생명체의 정점에 다다른 인류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필 에클런드의 게임 제작은 ‘하이 프론티어(2020년 출시)’ ‘인터스텔라(2023년 출시)’로 이어지고 있다. 인류는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 나아가 먼 별로 성간 여행을 가게 될 것이다. 공학자가 만든 보드게임에서 인류의 진화에 대한 통찰, 그리고 그 인류가 향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볼 수 있다. 과학 보드게임은 현재 여기까지 와 있다. 이 게임은 보드게이머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정대호
연암대 스마트원예계열 교수로 서울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식물 광합성 모델링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jdhenv@yonam.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