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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과학자문 도맡은 노벨상 수상자

 

바딘(오른쪽 끝)의 첫번째 노벨상 공동수상자였던 동료 월터 브래튼(왼쪽)과 윌리암 쇼클리(중앙).


현재까지 노벨상을 두번 받은 과학자는 세명 뿐이다. 물리학상(1903년)과 화학상(1911년)을 받은 마리 퀴리, 화학상(1954년)과 평화상(1962년)을 받은 라이너스 폴링, 그리고 존 바딘이 그들이다. 그 중에서도 한분야에서 두번의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존 바딘(1908-1991)이 유일하다. 그는 1956년 트랜지스터 발명에 관한 공로로, 1972년 초전도체에 관한 BCS이론으로 두번의 노벨물리학상을 거머쥐었다.

바딘은 1908년 5월 23일 미국 위스콘신주 메디슨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구적인 분위기의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의 아버지 찰스 러셀 바딘은 유명한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1회 졸업생으로 위스콘신 의대의 창립자였고, 그의 어머니 앨시어 하머는 동양 미술을 전공한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바딘은 줄곧 메디슨시에서 자라 위스콘신 대학에 입학해 전기 공학을 전공했는데, 대학 대표 수영선수로 활약할 만큼 운동에도 자질을 보였다.

늦은 관심, 이른 노벨상

바딘은 1929년에 석사학위를 받은 후, 피츠버그에 있는 걸프 연구소에 취직해 3년 동안 지구물리학 연구에 종사했다. 이 무렵 그가 알게 된 사람 중에는 당시 MIT 대학의 대학원생이었던 윌리엄 쇼클리도 있었다. 1933년 격심한 미국의 대공황속에서도 바딘은 과감히 일자리를 버리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리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BCS이론의 기초가 됐던 고체물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바딘은 MIT에서 유명한 유진 위그너 교수의 강의를 통해 고체물리 이론을 처음 접하고 금속 이론에 관심을 갖게된 것이다.

1936년 박사학위를 받고, 1938년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반 블랙, 브리지먼 등 쟁쟁한 물리학자들 밑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있는 동안 바딘은 계속 금속 내부에서의 전자의 성질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1938년에 미네소타 대학의 조교수가 됐고, 2차대전 중에는 워싱턴시의 해군 병기 연구소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그가 첫번째 노벨상을 받은 트랜지스터와 관련된 반도체연구에 관심을 별로 두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전쟁이 끝난 후 바딘은 미네소타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고 쇼클리가 이끄는 벨 연구소의 고체 물리 연구 그룹에 합류했다. 그가 기업체 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것은 하버드 대학 시절에 사귄 피스크(당시 벨 연구소 연구부장)와 쇼클리의 설득 때문이었다. 당시 벨 연구소는 인력과 설비를 확충하고 있었는데, 바딘은 2차 대전 이후에 벨 연구소가 받아들인 첫번째 외부 연구 인력이었다. 바딘은 벨 연구소에 들어간 다음에야 반도체에 흥미를 갖게 됐고, 1947년 말 브래튼과 함께 트랜지스터 효과를 발견했다. 이들의 발견에 기초해 쇼클리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트랜지스터를 완성했다. 1956년 바딘은 이 시기의 연구업적이 인정돼 그의 첫번째 노벨물리학상을 받게됐다.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온 고체물리분야에서보다 뒤늦게 관심을 가진 반도체 분야에서 더 일찍 노벨상을 받은 것은 초전도현상이 역시 쉬 풀리지 않은 난해한 문제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양자역학의 마지막 가시

바딘은 1951년 벨 연구소를 떠나 일리노이 대학 어버나 캠퍼스의 전기 공학 및 물리학 교수가 됐다. 일리노이 대학 전기공학 교수로서 반도체에 관한 실험 및 이론 연구 프로젝트를 주도했고, 물리학 교수로서는 거대 양자계, 즉 눈에 보일 정도로 크면서도 양자역학적 성질을 띠는 물체들에 대해 이론적 연구를 했다. 1956년 바딘이 브래튼, 쇼클리 등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발표가 났을 때, 그는 초전도체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1911년 네덜란드의 온네스가 극저온에서 금속의 전기 저항이 0이되는 초전도 현상을 발견한 이래 40여년이 흘렀지만 그 때까지도 초전도 현상에 대한 만족스런 설명이 없었다.

한가지 분명했던 것은 초전도 현상은 고전역학적으로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많은 물리학자들이 양자역학적 설명을 시도했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설적인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초전도 현상을 가리켜 ‘양자역학의 마지막 가시’라고 부를 정도였다. 바딘은 연구원인 쿠퍼 및 박사과정 학생인 슈리퍼와 함께 초전도 현상을 연구했는데, 바딘 자신은 금속 내부의 원자배열의 성질에 대해, 쿠퍼는 두 전자가 마치 한 덩어리처럼 작용하는 현상에 대해 연구했고, 슈리퍼는 바딘과 쿠퍼의 연구에서 나오는 방정식을 풀어내는 일을 맡았다. 흔히 이 세 사람의 머릿글자를 따서 BCS라고 부르는 이들의 이론은 저온 초전도 현상 이론에 그치지 않고, 기본입자, 원자핵, 액체 헬륨, 중성자별 등 많은 분야에 응용된다. 그들은 이 업적으로 1972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했다.

온가족이 과학자?

바딘은 순수한 이론연구 외에도 기술 개발과 공공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그는 제록스사가 아직 할로이드사로 불리던 1951년부터 기술자문을 했고, 1961년부터 14년동안 제록스사의 이사직을 맡았다. 그는 제너럴 일렉트릭사를 비롯한 많은 회사들에 기술자문을 했고, 1983년부터 8년동안 수퍼텍스사(고전압 반도체 전문회사)의 이사를 맡기도 했다. 또한 바딘이 아이젠하워, 케네디, 레이건 대통령 등 시대를 관통해 미국 대통령의 과학자문을 지낸 일은 유명하다. 라이프지는 이러한 바딘을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있었던 인물 1백명에 선정하기도 했다.

바딘은 1991년 1월 30일 사망할 때까지 약 60년에 걸친 연구생활 중 절반을 일리노이대학 어버나 캠퍼스의 교수로 있었는데, 뛰어난 교육자로도 명성이 높았다. 1993년 바딘이 재직했던 일리노이 대학 전기 및 컴퓨터 공학과는 일본의 소니사가 지원한 3백만 달러를 기금으로 존 바딘 기념 교수직을 창설했다. 바딘의 업적이 사후에 또한번 꽃피었던 일화다.

바딘이 훌륭한 교육자로서 학계에 이름이 높았듯이 그는 자식들도 훌륭한 과학자로 키워냈다. 그는 생전에 2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물리학자로 성공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고 있다. 현재 장남 제임스 바딘은 워싱턴 대학 이론 천체물리학 교수이며, 차남 윌리암 바딘은 페르미 국립연구소 이론 물리학부장, 사위 토머스 그레이탁은 MIT의 저온 실험 물리학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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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이관수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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