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요즘엔 선풍기, 냉장고는 기본이고 에어컨까지 있는 집이 많아 아무리 더워도 더운 줄 모르고 살 수 있게 됐지만, 없는 사람들에게 여름철 더위는 참으로 고약한 불청객이다. 집에도 들어갈 수 없는 노숙자들에게야 여름의 무더위가 겨울의 칼바람보다 훨씬 낳겠지만,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더위가 더 고약하다.
추우면 옷을 껴입으면 되지만 무더위에는 옷을 벗어도 덥기 때문이다. 오죽 더위가 무서우면 정월대보름 풍습에 '더위팔기'가 있었을까. 대보름날 아침에 이름 을 불러 대답하면 "내 더위" 한다. 대답한 사람은 부른 사람이 겪을 한해 동안의 더위를 모두 가져간다는 것이다. 얼음 한조각 먹을 수 없는 사정에 더위는 차라리 팔아치워버리고 싶은 그런 것이었다.
습도 높은 찜통 더위
우리나라는 특히 봄철의 화창한 날씨에서 여름의 무덥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들어가니 더위의 고통이 더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단 것 다음에 쓴 것이니 오죽 쓰랴. 우리나라의 더위가 견디기 힘든 것은 대체로 온도보다 습도 때문이다. 우리의 여름은 습기를 많이 머금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지배하기 때문에 날씨는 맑지만 습도가 매우 높다.
습도가 낮으면 온도가 높더라도 그늘에만 들 어가면 금방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유럽 같은 건조한 지방에서는 땀이 빨리 증발하기 때문에 햇볕만 가리면 쉬 시원해진다. 그러나 습도가 높으면 온도가 별로 높지 않아도 온몸이 끈끈하고 주변이 찜통 같은 느낌이 든다. 소위 '찜통 더위'는 습도가 높아 땀이 좀처럼 증발되지 않기 때문 이다.
자연에 맞서는 것이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듯이 더위에 맞서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열치열이라고 하지만 더위는 모름지기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저녁상을 물리고 샘에서 꺼낸 수박을 먹으며 하루를 달래는 어른들의 피서, 물총 싸움으로 옷을 적시고 팥빙수 한그릇으로 더위를 잊는 유년의 피서, 쌍쌍이 손을 잡고 산으로 바다로 몰려나가는 연인들의 피서 등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의 방도도 가지가지다.
그 중에서도 빠지지 않는 피서법이 으스스한 귀신이야기로 여름밤을 보내는 일이다. 등줄기가 오싹한 귀신이야기들이 무더위를 잊게 하는 청량음료인 것이다. 여름이면 방송마다 공포스런 이야기로 집집마다 한기를 들이고, 밤에는 오금이 저려 화장실도 못 가게 만든다. 영화관에는 한철 내내 구미호, 드라큘라, 처녀귀신, 엽기적 살인마 등 수많은 무서운 이야기들이 보는 이의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공포심과 추위
그런데 여름에는 왜 그리도 귀신 이야기가 많은 것일까. 이는 등골이 오싹하는 바로 그 느낌 때문이다. 공포를 느끼면 추위가 없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몸이 추위를 타는 반응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온도감각을 느끼는 감각기가 두 군데 있다. 하나는 피부에 있는 감각기이고 다른 하나는 뇌의 시상하부에 있다. 피부의 감각기는 외부 공기와 맞닿는 피부 온도를 측정하고 뇌에서는 체내의 중심온도를 감지해서 두 온도의 차이를 시상하부가 판단해서 체온을 조절한다.
외부온도가 높아져 체온이 상승하면 시상하부는 호흡을 가쁘게 해 체내에서 뜨거워진 공기를 내뱉고, 외부의 찬 공기를 많이 들이마신다. 또 모세혈관을 확장시키고 땀을 증발시켜 열을 방출해서 온도를 낮춘다. 땀이 증발되면서 시원한 것은 증발열로 체온을 뺏어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밖이 추워 체온이 낮아지면 근육을 떨게 해 열을 내고, 땀구멍을 닫고 혈액도 신체의 표면보다는 아래쪽 혈관을 통해 흐르도록 한다. 피부에서 열의 손실을 최소로 하려는 것이다. 추울 때 피부에 핏기가 없고 푸르둥둥하게 변하는 것은 피부의 혈관이 거의 닫혀버려서 혈액 공급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울 때는 몸이 으스스 떨리는 것도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 근육이 떨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이다.
납량특집이다, 괴기영화다 해서 공포스런 경험으로 더위를 잊어보려는 것은 사실 이렇게 체온을 조절하는 신체 반응과 관련이 있다. 소름 끼치는 공포반응을 보면 추위를 탈 때 나타나는 신체의 반응과 똑 같다. 차가운 것이 피부에 닿으면 시상하부는 차갑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피부 근처의 혈관을 닫고 근육을 수축시킨다. 이 때문에 으스스한 느낌이 들면서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공포를 느낄 때도 "소름이 끼친다"고 하듯이 으스스한 느낌으로 뒷덜미의 털이 곧추서고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이러한 반응은 모두 피부 혈관에 혈액공급이 줄어들고 근육이 수축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이다. 추울 때 돋는 닭살과 공포로 돋는 소름이 똑 같고, 무서워서 으스스한 것이나 추워서 으스스한 것이 신체반응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만 공포시의 이 반응은 추위를 감지한 시상하부의 작용이 아니라, 뇌의 명령 없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자율신경계의 작용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공포심을 유발해 더위를 피해보려는 생각은 변변한 냉방시설이 없던 시절에 생각해낸 참으로 고도의 피서법이다.
자주 놀라면 간 약해져
한의학에서는 공포, 놀람의 감정과 관계가 있는 내장기관으로 간, 쓸개, 위, 심장 등을 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쓸개와 간은 표리를 이루는 부부장기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본다. "대담한 녀석이다"와 "간 큰놈이다"는 말이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크게 놀라고 나서 "간담이 서늘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한의사들은 사람이 자주 놀라면 기가 흩어져 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놀랐을 때 간이 콩알만해진다고 하듯이, 너무 괴기스럽고 끔찍한 것을 많이 경험하면 건강을 해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너무 과하면 병이 되는 법이다. 선풍기를 밤새 틀어놓고 자다가 변을 당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에어컨을 늘 켜두고 살다가 냉방병을 얻기도 한다.
올 여름에는 시원함이 조금 성에 안차더라도 부채를 써보는 게 어떨까. 약간 수고롭기는 하지만, 그 바람은 자연스럽고 모습 또한 운치 있다. 더구나 부채는 먼지를 날려 청결하게 해주듯이, 예로부터 병이나 귀신을 쫓는다고 믿어졌다. 단옷날에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선물하는 부채는 여름철 전염병인 염병(장티푸스)을 물리치는 뜻이 있었다. 유럽의 교회에 걸어 둔 부채 도 악마를 쫓기 위한 기물이었다. 부채 하나만 있으면 더위는 물론 귀신도 피해 도망가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부채가 사랑의 징표이기도 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왕 때에는,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짐짓 부채를 떨어뜨려 줍게 함으로써 사랑을 표현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18세기 유럽에서는 부채로 어려운 의사를 표현했고, 이를 정리한 부채말 사전까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