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었다. ..... 하나님이 말하기를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였다(구약성서 창세기 1장1절).
혼돈하고 어두운 우주에 창조된 빛, 밤과 낮을 구분했던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태양이었다. 저 높은 곳에서 늘 변함없이 타오르는 빛. 태양은 예로부터 거의 모든 신화에서 신성한 존재였다. 모 든 힘과 완전성의 상징이었다. 세계의 모든 신화에는 반드시 태양신이 있다.
인류 공통의 태양신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 신화에서 우리나라 태양신화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 고구 려의 시조 동명성왕인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천신을 겸한 태양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날마다 오룡거를 타고 아침에 지상으로 내려와 정사를 보살피고, 저녁에는 다시 하늘로 되돌아갔다. 그의 거동이 하루 동안의 태양의 운행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의 연오랑가 세오녀 또한 태양신이었다. 신라 아달라왕 4년에 이 부부는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부부는 바위에 실려가 일본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 그러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온 세상이 캄캄해졌다. 해와 달의 정령인 연오랑과 세오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신라왕의 간청으로 세오녀가 일월의 정기를 모아서 짠 비단을 받아다 제사를 올리니 해와 달이 다시 밝아졌다. 우리민족은 전통 회화에서 십장생의 하나로 태양을 그릴 만큼 그 영원성을 숭배했다. 태극기의 중앙 태극은 태양의 형상이기도 하며, 중국, 일본의 국기에도 모두 빛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태양이 들어있다.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 아폴론은 하루에 한 번씩 불마차를 이끌고 하늘을 달려가는 모습이 해모수와 완전히 닮았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왕이 곧 태양이었고, 잉카제국과 이집트의 왕은 태양의 아들이었다.
유럽의 절대왕정기 루이 14세 또한 자신을 태양왕이라고 칭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인들에게 태양은 숭배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신의 완전함을 보여주는 상징물로는 충분했다. 태양은 하늘에 있는 그 어떤 천체보다도 완벽해 보였기 때문이다. 태양은 여호와의 창조 능력을 상징했고, 성스러운 주의 날은 태양의 날(Sunday)이었다.
완전한 세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기원전 270년 경 태양까지의 거리를 처음으로 구했다. 그는 태양까지의 거리가 적어도 수백만km 이상이어야 하고 태양의 지름은 지구 지름의 7배쯤이라고 결론내렸다. 그의 계산은 비록 오늘날의 값과 비교해 터무니없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이 생각과는 달리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하지만 그의 계산과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고, 그의 주장은 곧 잊혀졌다.
왜냐하면 지구의 운동은 느낄 수 없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태양이 완전한 천상계에 속하는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태양은 숭배의 대상일 뿐 탐구의 대상일 수 없었다. 달 아래의 지상계는 변화하는 불완전한 세계였지만 천상계는 변화가 없는 완전한 세계였다. 그 천상에서 태양은 완전성을 보여주는 신의 모습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과학적으로 치장된 천상과 지상의 이분법은 과학혁명기까지 2천년 동안이나 서양문화를 지배했다. 누구도 천상의 존재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며 태양은 한번도 인간의 불경을 입지않은 신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1611년 예수회 신부이자 수학자인 크리스토프 샤프너는 태양의 흑점을 처음으로 관찰했다.
그는 망원경으로 흑점을 관측하고, 처음에는 흑점이 태양 표면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가장 영광스런 태양에 검은 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샤프너는 흑점이 태양 표면에 있지 않고 태양 가까이에서 태양 주위 를 도는 물체라고 수정했다. 태양은 그만큼 완전해야하는 존재였다.
지구중심설에서 태양중심설로
태양이 인간의 지혜와 삶에 연결돼 있으며, 태양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은 사상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믿어졌다. 헤르메스주의, 그노시스주의 등 자연이 신비적 그물망으로 연결돼 있다고 믿었던 흐름이 있었다. 그들은 태양이 우주의 중심으로서 에너지의 원천이며 지혜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심장은 인간 생명의 중심이다. 마찬가지로 태양은 우주의 중심이다.
우주의 에너지가 뻗어나오는 태양과 생체의 에너지가 나가는 심장은 서로 교감하는 것이었다. 생명의 원천으로서 태양과 심장이 합쳐지면 대우주와 소우주의 중심, 하늘과 인간의 영적인 교감이 가능했다. 단테는 "태양은 눈에 보이는 생명중에서 가장 먼저 자신을 비추고 그 다음에 천상과 지상의 모든 것을 비춘다"고 했다.
우주의 힘, 부동의 존재를 믿었던 사람들에게 우주의 중심은 당연히 태양이었다. 그리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면서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존재였다. 1453년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드디어 세상의 뒷편에서만 인정되던 태양의 지위를 세상에 선언했다. 태양은 우주의 움직이지 않는 중심이며, 모든 천체는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 그것은 2천년의 믿음에 배반하는 혁명적인 주장이었지만, 그것이 한번 선언되자 태양의 힘은 강하게 퍼져나갔다. 과학혁명기 동안 지구중심설을 숭배하던 많은 사람들이 태양중심설로 개종했고,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 중심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굳혀갔다.
과학적 탐구의 대상
태양이 자신이 자리를 찾으면서 그것에 부여된 의미 또한 달라졌다. 태양은 이제 그것이 표현하는 완전성이나 신성보다는 실제적인 의미가 중요시됐다. 이때부터 태양은 숭배가 아닌 이해의 대상이자 탐구의 대상이 됐다. 1610년 갈릴레이는 태양의 "흑점은 반드시 태양 표면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망원경을 사용해 동틀 무렵 태양원반에 검은 점이 있음을 관측했다. 또한 검은 점이 표면에서 이동하는 것을 관측함으로써 흑점이 태양표면의 일부이며 이들이 25일을 주기로 회전한다고 증명했다. 태양의 완전성은 이제 신화가 된 것이다.
또한 뉴턴은 태양이 지상에는 없는 제5원소 에테르로 만들어진 순수한 천체라는 믿음을 깨뜨렸다. 뉴턴은 태양이 질량을 가진 천체이고, 태양이 미치는 중력이 행성의 궤도운동을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밝혔다. 당시의 믿음은 태양이 순수한 물질로 만들어진 질량이 없는 천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뉴턴은 지구가 강한 태양의 인력에 붙들려 있으며, 태양이 그처럼 강한 인력을 갖기 위해 서는 질량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계산 결과 태양은 지구보다 33만 배나 무겁다는 것이 밝혀졌다.
태양은 그것이 내쏘는 가장 순수한 빛(백색광)으로 인해 오랫동안 숭배됐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백색광을 만들 수 없었다. 나무나 연료들을 태울 때 생기는 불꽃은 붉은색이거나 주황색, 또는 노란색이다. 인간의 빛은 태양에서 나오는 신성한 하늘의 빛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1665년 뉴턴은 프리즘을 통해 태양의 백색광이 순수한 광선이 아니라 여러가지 색의 빛이 섞여서 만들어진 것임을 보임으로써 태양의 빛이 더 이상 순수한 천상의 빛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결국 갈릴레이, 뉴턴을 거치면서 태양은 여호와가 창조한 순수한 천상의 빛이 아니며 질량을 가진 물질적 존재였던 것이다. 계속해서 천문학자들은 태양의 성분이 수소와 헬륨을 주로하고 그밖에 80여종의 원소들이 조금씩 섞여있는 그야말로 평범한 별임을 밝혀냈다.
생명체의 근원 에너지
그렇다면 과학이 드러내 준 자연적 존재로서 태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녹색식물은 물과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포도당을 합성하지만 이 과정에는 반드시 태양에너지가 필요하다. 유기물이 분해될 때 나오는 화학에너지는 식물의 생명활동의 원천이지만 이것은 애초에 태양에너지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생체의 모든 에너지는 태양의 에너지가 화학에너지로 전환된 것 뿐이다.
생태계의 먹이연쇄는 태양에너지로부터 생산된 유기물의 에너지를 나누어 가지는 연쇄다. 조류가 태양에너지를 유기물로 전환한 화학에너지를 물벼룩이 이용하고, 다시 물벼룩이 이용하고 전환한 에너지를 송사리가 이용하고, 송사리가 지닌 에너지는 가물치에게, 가물치가 지닌 에너지는 백로에게 전해지면서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이어지는 것이다. 먹이연쇄를 거치는 동안 각각의 생명체가 지니는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태양에너지가 형태만 바꾼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이용하는 모든 에너지는 태양에너지가 형태를 바꾼 것일 뿐이다. 석유와 석탄은 오래전에 지구상에 존재했던 식물들이 태양에너지를 이용해 합성한 유기물이 썩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석유와 석탄의 에너지는 식물에 저장된 태양에너지가 다시 전환된 것일 뿐이다. 태양이 물에 준 에너지를 수증기가 머금고 하늘로 올라가 비로 내리면서 수력발전소의 전기에너지로 전환된다. 지구 환경의 모든 변화와 질서가 태양이 있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먹는 곡식은 광합성을 통해 식물이 저장한 태양 에너지며, 육류는 식물을 통해 초식동물에 저장된 태양 에너지다.
에리아데는 "태양 숭배는 인간의 역사적 존재양식의 발달과 병행한다"고 했다. 과거의 태양은 세계를 밝히는 빛으로서, 인간에게 신적인 깨달음을 주고, 질서의식을 찾아주었던 존재였다. 그래서 그것은 숭배의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