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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미국의 라이프지는 ‘노르웨이에서 온 해괴한 모욕’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제목으로 195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였던 라이너스 폴링이 1962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 과학자가 노벨상을 두번 받은 경우는 당시까지 마리 퀴리가 유일했을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 정부와 대중언론이 폴링의 노벨상 수상에 보인 반응은 기사의 제목만큼이나 냉담했다.

폴링은 1950년대를 통해 반전 반핵 평화운동에 적극참여해왔고, 특히 전 세계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핵실험을 제한하자는 청원운동을 벌였다. 이런 노력은 1963년 8월 5일 모스크바에서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이 체결되는 성과로 나타났고, 노르웨이의 노벨 평화상 위원회는 이 공로를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폴링의 이러한 행동이 미국의 국익을 침해한다고 간주했다.

폴링은 결코 당시 미국인들이 보았던 것처럼 반미국적, 비애국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실상 미국 사회가 존중해 마지않는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애국적인 미국인’이었다. 그는 히틀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나치와의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호소했던 사람이다. 또한 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화학 및 화학공학부 부장으로서 과학연구발전국(OSRD)과 전쟁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나중에는 이때의 업적에 의해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왓슨과 크릭이 발견한 DNA의 이중나선구조


탄압은 시작되고

다만 폴링은 당시 저명한 과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던 원자탄 개발계획인 맨하탄 프로젝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과학담당 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폴링에게 프로젝트의 화학부문 책임자를 맡아줄 것을 제의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폴링의 거절 이유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일은 1945년 이후 폴링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됐다. 자신이 원자탄 개발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폴링은 전쟁의 수단으로 사용된 과학과 과학자를 비난할 수 있었다. 또한 원자탄 계획에 대한 비밀을 강조한 연방정부의 법률적인 구속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와 원자탄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와 비판을 할 수 있었다.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직후 폴링은 대중을 상대로 핵분열과 핵폭탄에 관한 강연을 했다. 그는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바로 다음날 미 연방수사국(FBI) 수사관들은 그를 조사했다. 수사관들이 특히 캐물었던 부분은 투하된 원자탄에 사용된 우라늄과 플루토늄의 양에 관한 그의 언급이었다. 폴링은 자신이 원자탄 계획에 참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원자탄에 대한 정보는 단지 자신의 물리학과 화학 지식을 동원해 계산한 값이라고 말했다. 1946년부터 폴링은 아인슈타인, 유레이 등이 주도하는 원자과학자비상위원회에 참여했다. 당시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의 개발을 반대하다 소련의 첩자로 몰렸지만 폴링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소폭탄의 개발을 반대하면서 오펜하이머를 지지했다.

출국 금지가 막은 세번째 노벨상

1950년 대 초반 미국은 매카시즘의 선풍이 불고 있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모두가 상대방이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하고 또 자신이 의심받을까 두려워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폴링을 더욱 힘들게 했다. 그는 1952년 영국 왕립학회가 주관하는 DNA 관련 심포지엄의 연사로 초청받았으나 국무부는 여권 발급을 거부했다. 만일 폴링이 이 심포지엄에 참석해 왓슨과 크릭처럼 럿셀과 프랭클린이 제출한 DNA의 X-선 사진을 보았다면 그는 또한번 노벨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1990년의 한 인터뷰에서 폴링은 왓슨과 크릭이 DNA구조를 해명한 방법이 오래 전에 자신이 단백질의 알파 나선형 구조를 밝힐 때 사용한 바로 그 방법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듯이 폴링 자신도 이를 애석히 여긴 것이 분명하다. 이후 폴링은 2년 이상 국제학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심지어 1954년 폴링이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결정됐을 때도 국무부는 폴링을 수상식에 참석토록 허락할 것인지에 관해 논란을 벌인 끝에 여권을 발급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이 폴링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폴링은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평화운동에 참여했다. 1957년부터 폴링은 아내인 아바 폴링과 함께 대기중 핵실험 금지를 위한 서명작업을 시작했다. 또한 강연을 통해 대기중 핵실험이 수백만의 생명을 방사능에 노출시킨다며 대중을 설득해나갔다. 이 운동으로 1958년에 미국인 2천여명을 포함, 49개국 1만1천여명의 과학자가 서명한 청원서가 만들어졌으며, 폴링은 이것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주변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 1960년에 상원 안전소위원회는 이 서명운동에 관해 조사를 시작했다. 청문회에서 의원들은 서명운동에 협력한 사람의 명단을 밝히라고 요구했고 폴링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자 위원회는 의회 모독죄로 그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폴링은 그의 책 ‘더 이상 전쟁은 안된다’(No More War, 1958년 출판)에서 과학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전쟁의 시녀로 전락해갔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과학이 전쟁에 봉사할 것이 아니라 평화의 시녀가 돼야함을 역설했다.

그러나 이전부터 폴링의 사회 참여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칼텍의 이사회는 폴링에게 소속 학부의 부장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폴링이 물러난 몇년 뒤에도 대학당국은 그로 하여금 30년 이상 봉직해온 정든 대학을 떠나도록 강요했다.
 

폴링이 발견한 알파 나선형 구조


진정한 과학자

그러나 굽힐 줄 모르는 폴링의 신념은 서서히 사람들을 움직였다. 1962년 폴링은 미국 정부가 핵실험을 재개한 것에 항의해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바로 그날 저녁에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초대한 노벨 수상자와의 만찬에 참여해야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그런데 이때 케네디 대통령은 폴링을 비난하는 대신 자신의 의견을 계속해서 표현하라며 그를 격려했다.

결국 1963년 8월 5일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대기권 내, 우주공간 및 수중에서 핵무기 실험을 금지하는 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은 그 해 10월 미국, 영국, 소련의 비준에 의해 발효됐다. 비록 지하 핵실험은 규제 대상에서 제외됐고, 위반사항에 대한 사찰을 명시하지 않은 제한된 의미의 조약이었지만, 이는 핵무기의 규제에 관한 최초의 국제협정이었으며 폴링의 지속적인 투쟁의 결실이었다.

한 과학자에게 쏟아진 정부의 압력, 연구비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위협, 과학자의 사회 참여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다른 과학자들의 질시, 정부에 맞서는 매국노라는 낙인, 나아가 공산주의자로 몰아 붙이는 대중의 비난은 한 자연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것이었다. 그러나 폴링은 이러한 어려움들을 견뎌냈다. 폴링은 “내가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지탱해준 것은 나를 존경의 눈길로 보던 아내였다”며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그의 아내를 꼽았다. 그에게 아내인 아바 폴링은 자신의 내조자이자 평화운동의 실질적인 동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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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유지영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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