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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①사회적 성: 남성속의 여성, 여성속의 남성

온몸이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덮인 보디빌더를 보면 누구나 '강한 남성'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단단한 근육만큼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을 갖춘 인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외형이 남성적일수록 의외로 보통 남자보다 부드럽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많다. 말이 '사근사근' 하고, 우격다짐으로 분위기를 이끌기보다 대화와 타협에 익숙하다. 왜 그럴까.

정신분석학자들은 모든 인간의 의식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한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이는 단지 양의 차이만 있을 뿐 남녀 모두에게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에 의해 어느정도 뒷받침되는 얘기다.

하지만 사회는 사람에게 어느 한가지 성만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따라서 두가지 성적 성향 중 어느 하나는 억압된다. 터프한 보디빌더의 부드러운 심성은 내재된 여성성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일 수도 있다.
 

폭력적인 여죄수의 경우 남성호르몬의 수치가 보통의 여성보다 높다는 점이 밝혀졌다.


섹스와 젠더의 분리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물학적 성에 맞게 사회적으로 행동한다.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 자라는게 보통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정반대로 표현될 수도 있다.

한 동네에 새로 이사온 가족이 이웃을 초청해 마련한 흥겨운 파티장. 부모가 아이들을 한명씩 소개하던 중 화장을 하고 예쁘장한 옷을 차려입은 아이가 등장한다. 이웃들이 "딸이 예쁘다"고 환호하는 와중에 부모의 안색은 변한다. 그 아이는 다름아닌 7살 난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개봉돼 화제를 모은 알랭 베르리네 감독의 영화 '나의 장미빛 인생'은 이렇게 시작된다.

주인공 루도빅의 생물학적 성(섹스)은 남성이다. 즉 XY 염색체를 지녔고, '정상적인' 남성의 생식기를 갖췄다. 그러나 루도빅의 성격은 단연 여성 취향이다. 게임기보다 인형을 좋아하고, 레이스 달린 예쁜 옷과 장신구, 그리고 립스틱에 강한 애착을 보인다. 또 원래 여자로 태어날 운명인데, 신이 실수로 자신을 남자로 만들었다고 믿는다.

이런 면에서 루도빅의 사회적 성(젠더, gender)은 여성이다. 섹스와 젠더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분리된 경우다. 젠더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사람의 섹스는 두번에 걸쳐 결정된다. 수정이 이뤄질 때, 그리고 이후 생식기가 완전히 분화될 때.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생물학적으로 '안정한' 성이 갖춰진다. 흥미롭게도 젠더 역시 두차례에 걸쳐 형성된다. 단지 시기가 다를 뿐이다.

이규환 원장(한마음 신경정신과)은 "3-5세의 유아기와 사춘기가 젠더를 결정하는 시기"라고 말하고 "만일 이 시기를 자연스럽게 넘기지 못하면 섹스와 젠더가 불일치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갓 태어난 아기의 가장 큰 안식처는 어머니의 품이다. 어느 시기에 이를 때까지 아기는 어머니와 자신을 분리되지 않은 존재로 느낀다. 그러다 어머니가 독립된 개체라는 느낌이 시작되고,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다. 두가지 성의 존재가 인식된다는 말이다. 아기는 3-5세에 이르면 자신의 성이 부모 중에서 어느 쪽의 성과 일치하는지 인식하기 시작한다. 젠더의 첫번째 형성기다.

이 시기에 아기가 부모로부터 확인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생식기가 누구의 것과 같은지에 머물지 않는다. 아기는 부모의 역할 역시 학습한다. 보통의 경우 아버지가 경제권을 쥐고 '활발하게' 가족을 이끌며 어머니는 '조용히' 집안 살림을 맡는다. 남자 아기는 아버지의 활발하고 적극적인 성향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여자 아기는 어머니의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향으로 자신을 동일시한다.

두번째 시기는 2차 성징이 활발하게 발달하는 사춘기에 찾아든다. 이전과는 달리 생물학적으로 완연한 성숙기에 접어들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몸으로' 확연하게 느낀다. 사춘기를 넘어서면 남자(여자)는 비로소 자신의 몸뿐 아니라 마음도 남자(여자)라는 점을 확실하게 인식한다.

그러나 이 시기를 자연스럽게 넘어서지 않으면 부모는 물론 본인도 심한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여성다운 남성, 남성다운 여성으로 성장하는 경우에는 주위에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성적 혼란'이 발생하는 것일까.
 

사람의 사회적 성은 유아기와 사춘기 두차례에 걸쳐 이뤄진다.


사춘기의 성적 혼란

현대 생물학은 유전자나 뇌의 구조를 연구함으로써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성성이 지나치게 강한 여성은 유전자 구조가 정상인과 달라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많아졌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폭력 범죄를 저지른 공격성이 강한 여죄수들을 조사한 결과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정상보다 높다는 점을 발견했다. 또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한 대부분의 여죄수들은 나이가 들면서 호르몬 수치가 떨어져 공격적 행동이 줄고 부드러운 성격을 보였다고 한다. 반면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폭력적인 여죄수들은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계속 높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결정하는 한 요인이 "어떤 성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느냐"에 따른 것임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정신의학계는 젠더가 형성되는 과정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유일한 요소는 없다고 단정한다. '선천적 결정' 못지 않게 후천적인 성장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자극에 의해 젠더가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년 전 국내 모병원의 신경정신과에 미니스커트 차림의 늘씬한 20대 여성이 찾아왔다. 놀랍게도 상담 내용은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 되고 싶은 남성이었다.

진료팀이 그의 성장 과정을 조사한 결과 4살 무렵 부모가 이혼을 했다는 점, 그리고 아버지가 재혼한 후 '싫다는' 아이를 강제로 데리고 살았다는 점을 알아냈다. 그 결과 어릴적부터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자리잡아 아버지의 성과 반대되는 여성성으로 스스로를 동일시했다는 분석이 제시됐다. 젠더의 첫번째 결정기에 특수한 가정 환경 때문에 빚어진 혼란이었다.

어린 시절 형제자매와 함께 지내는 환경이 젠더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얼마 전 컴퓨터 상담 코너에서 한 20대 청년이 털어놓은 고민을 살펴보자. 그는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여자 동생방에 가서 속옷을 하나하나 입어본다. 또 립스틱을 입술에 칠해보고 그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동성애를 느낀다든지 여자를 싫어한다든지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청년은 1남 3녀 중 외아들로서, 유아기 때부터 여동생 3명과 잘 어울려 인형놀이나 소꼽장난을 즐겼다. 보통의 경우 부모는 아들을 '남자답게' 키우기 위해 이런 행동을 저지한다. 하지만 이 청년은 부모의 간섭을 받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20대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여자들의 놀이와 치장에 친숙해졌다.

젠더의 두번째 결정기인 사춘기에 시작되는 성적 혼란도 만만치 않다. 몸이 성적으로 성숙한 탓에 자신의 생물학적 성이 확실하게 머리 속에 자리잡힌다. 또 이성과의 신체적 차이가 뚜렷이 드러난다. 이때 자신의 생물학적 성이 보다 강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라난 탓에 "동성 친구의 몸과 성격이 나에 비해 얼마나 남성(여성)적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규환 원장은 "만일 남자가 더욱 남성적이고 싶은 기대가 지나치게 크면 자신의 남성성이 모자르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자신보다 남성적으로 보이는 남자를 선망하고 쫓아다니기도 한다. 그 탓에 사춘기에는 자신이 "동성애적 성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갈등을 일으키기 쉽다.

이성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 때문에 자신의 성을 순간적으로 망각하기도 한다.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 '앉아서' 소변을 보거나, 여자 속옷을 입고 화장을 해보기도 한다. 이런 상황들이 지속될 때 마치 자신이 여성적 성향에 빠진 것으로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다.
 

게이


문화에 따라 남녀 역할 바뀐다

이처럼 섹스와 젠더가 제대로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그리고 개인마다 경험의 내용이 매우 다양하다. 문제는 어떤 배경에서 그런 현상이 나왔는지를 파악하지 않고, 단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잣대로 젠더를 강요하는 풍토다.

과연 선천적인 것인지 또는 한 사람이 겪어온 삶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채 '이상하다' '비정상이다'라고만 섣불리 재단하는 것이 문제다.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 속에 숨어있는 이성의 성향을 자연스럽게 소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숨기고 고민할 뿐이다.

한편 한 사람이 '성적 혼란'에 빠졌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한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에 따른 판단일 뿐이다. 즉 '이래야 남자답다'든가 '여자는 이런 것이다'는 생각은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영화 '나의 장미빛 인생'에서 루도빅의 갈등은 새로 이사간 마을에서 해소된다. 그곳에서는 남장을 즐기는 '왈패 소녀'가 여자 옷을 입은 루도빅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뛰논다. 루도빅을 꾸짖는 어머니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이 그러는게 어떠냐?"며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한다. 문화에 따라 남성성과 여성성이 달리 받아들여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미국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뉴기니아 세 부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젠더가 문화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된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줬다(표). 아라페쉬 종족은 남녀가 모두 '여성적'이다. 남성은 공격적이지 않고 협동적이며, 타인의 요구에 순응하도록 훈련받았다.

반대로 문머거더족은 남녀 모두 무자비하고 공격적이다. 모성적 양육태도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챔불리족은 남녀의 태도와 역할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전혀 반대다. 지배적이고 냉담한 심성의 소유자는 여자다. 남자는 여자보다 책임을 덜 지고 정서적으로는 의존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 연구는 여자는 수동적이고 조심스러우며 협조적이라는 '상식'을 깨는 한편 '남자답지 않는' 남자 문화가 현실적으로 존재함을 증명했다. 우리에게 익숙해진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개념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생물학적으로 두차례, 그리고 사회적으로 두차례의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성은 결정된다. 사람마다 제각기의 경험을 거치는 탓에 그 결과 형태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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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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