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에 발표된 영화 ‘롤오버’(비디오출시명: 화려한 음모)를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위기가 매우 정확하고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미국의 달러가치 폭락으로 인해 전세계가 공황 상태에 휩싸이는데, 그 실태를 보도하는 뉴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놀랍게도 한국의 서울이다.
이 영화는 가상의 미래를 다룬 작품으로서는 무척 드문 ‘재정금융 SF’이다. 환율급등과 주가폭락, 이어지는 사회혼란은 현재 우리가 나라 안팎에서 목격하는 사실들을 매우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다.
경제적 파국 외에도 SF에서 예견하는 파국의 시나리오들은 핵전쟁, 생태계 파괴, 인구폭발, 자원고갈 등 무척 종류가 다양하다. 그리고 이 모든 불길한 주제들은 디스토피아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미래사회를 그린 SF의 초기 작품들은 인류의 이상향인 유토피아를 주로 다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의 어두운 면들이 늘어남에 따라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묘사한 작품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16세기 사회 풍자 소설에 등장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1516년 모어가 발표한 풍자 소설의 제목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는 이 말을 라틴어의 ‘아무 곳도 아님’(outopia)이라는 단어에서 끌어왔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일부 평론가들에 의해 최초의 SF소설로 꼽히기도 하는데, 사실 모어가 작품을 쓴 의도는 이상향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풍자하는데 있었다.
그 후 17세기에 접어들면서 글자 그대로 이상적인 인류사회를 전망하는 낙관론이 잇달아 등장했다.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1627)나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1637)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은 모두 과학기술이 사회를 이상향으로 바꿀 것이라고 예측했다.
1888년 미국의 벨라미가 발표한 ‘회고: 2000년에서 1887년까지’는 유토피아 문학사상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힌 작품으로 꼽힌다. 19세기말의 주인공이 사고로 깊은 잠에 빠졌다가 21세기에 깨어나보니, 세상이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 사회주의적 이상향으로 탈바꿈해 있더라는 내용이다. 통계수치까지 꼼꼼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발표되고 나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미국 전역에 이 작품의 사상을 추구하는 조직이 1백군데가 넘게 생겼다. 이 책은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교양필독서로 꼽혔다.
그러나 19세기말 작가들은 이미 유토피아가 현실화될 수 없다는 비관적인 입장을 취했다. 모리스는 ‘회고’에 반하는 입장에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온 소식’(1890)이란 소설을 발표했다. 또 버틀러는 1872년에 ‘에레훤’(erehwon)이란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제목을 거꾸로 읽어보면 ‘nowhere’ 즉 ‘아무데도 없음’이란 뜻이 된다.
소외와 전쟁으로 얼룩진 20세기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세상은 무척 복잡해졌다. 세상은 꾸준하게 산업화돼 지구 방방곡곡까지 문명의 이기들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사회는 불안정했다.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후 새로운 관료체제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바람에 인간소외 문제가 강하게 제기됐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획일적인 전체주의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불길한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자마친이 1920년에 집필해 옛소련에서 지하출판물로 떠돌던 ‘우리들’은 디스토피아 문학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과학기술이 통제하는 사회가 개인의 정신까지 말살해버리는 미래의 전체주의 관료체제를 묘사한 작품이었다. 나중에 오웰의 ‘1984’(1949)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를 낳는 단초가 됐다.
‘1984’는 과학기술이 발달함으로써 개개인에 대한 ‘밀착 감시’가 가능해진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창조적인 사고를 억압하기 위해 언어까지 개조한다. 1985년에 발표된 ‘브라질’(비디오출시명: 여인의 음모)은 ‘1984’를 희극적으로 재해석한 SF영화로 높이 평가받는다.
과학기술 만능주의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멋진 신세계’는 과학기술이 더 이상 인간에게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걸작이다.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문학에 커다란 획을 그은 작품이다. ‘멋진 신세계’ 사람들은 인공수정과 인공부화를 통해 공장에서 마치 물건 찍어내듯이 생산된다. 기형아와 같은 ‘불량품’은 사전에 제거된다. 또 마약을 상습적으로 복용함으로써 행복감을 맛보곤 한다.
한편 미국에서는 런던이 ‘강철군화’(1907)를 발표해 가까운 미래에 노동 계급이 직면할 혹독한 시련을 예견했다. 얼마 뒤 20세기 초에 이르러 그가 예측한 상황은 대부분 현실로 다가왔다.
이처럼 산업사회의 발달은 과학기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낳기도 했지만, 인간의 의지에 믿음을 갖고 희망을 잃지 않은 작가들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근대 SF문학의 틀을 다진 위대한 작가 웰스다. 그는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염려한 문명비평가이자 사회사상가로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웰스는 ‘현대의 유토피아’(1905)나 ‘신과 같은 인간’(1923), ‘다가올 세계의 모습’(1933) 등 여러 작품을 통해 자신의 유토피아관을 꾸준히 피력했다. 이 중에서 ‘다가올 세계의 모습’은 1936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오늘날 SF영화사상 고전 걸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에서 인류는 풍요로운 시대와 전쟁으로 폐허가 되는 시대를 두루 경험한 끝에 결국은 발달된 과학기술로 우주 개발에 나선다. 그러나 이 작품은 마지막 장면에서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물음표를 던진다.
웰스는 정치단체에서 활동하고 사회주의혁명 이후의 옛소련을 방문하면서 나름대로 인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모색하려 애썼다. 하지만 1946년 작고할 당시에는 비관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핵전쟁의 위협이 그로 하여금 인류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20세기 후반 낙관적 전환 모색
2차대전 이후 핵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은 인류를 계속 위협해 왔다. 냉전 시대가 끝난 지금은 핵전쟁 못지 않게 원자력에너지의 오염 문제도 심각한 지경이다.
석유나 석탄같은 화석연료 역시 주요 오염원이다. ‘클린 에너지’ 즉 태양열처럼 오염물이 발생하지 않는 새로운 에너지원의 개발이 필요하지만 아직은 요원한 실정이다.
걸작 SF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를 보면 공해와 쓰레기에 찌든 암울한 풍경이 미래 도시의 밤낮을 채우고 있다. 어쩐지 지금의 현실은 그러한 영상에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영화 ‘매드 맥스’ 시리즈는 자원 고갈과 전쟁과 같은 복합적인 요인으로 마침내 야만 시대로 돌아간 듯한 황폐한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묘사한 황량한 무법천지의 모습은 수많은 아류작들을 낳았는데, 달리 보자면 미래를 묘사하면서 제작비를 적게 들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인구증가에 따른 자원고갈도 디스토피아의 가능성을 더해주는 중요한 위협이다. 1973년 영화 ‘소일렌트 그린’(비디오 출시명: 최후의 수호자)에는 21세기의 뉴욕시가 등장하는데, 넘쳐나는 인구로 사람들은 건물의 층계에서까지 기거하기에 이른다. 새롭게 개발된 식품인 ‘소일렌트 그린’이 식량 부족에 희망을 던져주지만, 탐정인 주인공은 어떤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새 식품의 원료가 죽은 사람들의 시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낸다.
한편 20세기 후반에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기계의 인간지배’라는 새로운 시나리오도 탄생했다. 컴퓨터의 발달은 마침내 인간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예견이 영화 ‘터미네이터’(1984)의 기본 설정이다.
20세기의 신종 흑사병으로 불리는 에이즈가 인류를 위협하는 현실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파국을 그린 SF도 있다. 일본의 고마쓰 사쿄는 ‘부활의 날’(1964)에서 생물학 무기로 개발되던 바이러스가 유출돼 지구의 모든 인간이 절멸하는 상황을 그렸다. 대륙들과 동떨어져 있던 남극의 각국 기지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인류 사회의 재건에 나선다. 이 작품은 1980년에 ‘바이러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돼 국내에 소개됐다.
이처럼 과학기술의 미래가 비관적으로 전망되고 인구증가와 자원고갈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자 유토피아를 그리는 사람들은 획기적인 전환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다름아닌 ‘자연으로의 회귀’이다.
1948년에 발표된 스키너의 ‘월덴 투’는 일종의 심리학적 이상사회를 그린 소설이다. 이 사회의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이용을 가급적 줄이고, 협동 생활과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목가적 생활을 누린다. 스키너는 원래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자로서 행동주의 학파의 시조로 꼽히는 인물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대가로 꼽히는 마슬로우 또한 심리학적 이상사회를 뜻하는 ‘유사이키아’(Eupsychia)란 말을 창안했다. 그는 인간의 행동 욕구를 단계별로 규명하고는 최상의 단계인 ‘이타적 자아실현’이 유토피아의 열쇠라고 보았다. 그의 학문적 입장은 인간에게 진정으로 행복한 사회란 어떤 것인가를 논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1975년에 발표된 칼렌바크의 소설 ‘에코토피아’는 자연과 어우러진 이상 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해 특히 환경보호론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현실적인 유토피아 모델이 거의 제시되지 않았던 20세기 후반에서 이 작품은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자연으로의 회귀 경향을 잘 나타낸 최근 작품으로는 작년 국내에 비디오로 소개된 프랑스 영화 ‘뷰티풀 그린’을 들 수 있다. 인간과 똑같은 모습의 외계인들이 글자 그대로 자연과 벗삼으며 목가적인 이상향에서 살고 있는데, 그들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지구를 살펴봐야 할 필요를 느끼지만 아무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다. 마침내 지구인의 피를 이어받은 한 여인이 나서서 자신의 선조 나라로 오지만, 메마르고 삭막한 현대 도시와 도시인들의 삶에 적잖은 곤란을 겪는다.
21세기 파국 경고
사람들과 SF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보면, “왜 희망적인 미래보다 비관적인 미래를 묘사한 SF들이 훨씬 많은가?” 하는 질문이 종종 제기된다. 정말 세상은 갈수록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디스토피아를 그린 SF들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예견이나 경고일 뿐 결코 ‘희망사항’은 아닐 것이다. 많은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비관적인 미래가 올 수 있으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제까지 작가들의 예측은 그대로 맞아떨어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가오는 21세기는 과연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되는 시대일까? 핵전쟁이나 치유 불가능한 전염성 질병, 또는 컴퓨터와의 전쟁 같은 일들이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까? 아니면 파국적인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원고갈과 인구폭발로 어차피 더 이상 풍요로운 산업사회는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