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법의학의 대상과 영역은 시체 해부에만 국한돼 있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으로는 의학에 속하면서도 해부학, 생리학과 같은 기초의학이나 내과학, 외과학과 같은 임상의학과 달리 법의학은 일종의 사회의학으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법의학이 다루는 세계는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또 사회의 요구에 따라서 변하고 있다.
포괄적으로 정의하자면 법의학이란 "법률에 관한 의학적인 여러 문제를 폭넓게 다룸으로써 공정한 판단을 내리도록 하는 학문"이다. 이같은 정의에는 법의학이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의 안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실무 측면에서 볼 때 법의학은 형사법의학과 민사법의학으로 나뉜다. 형사법의학은 시체와 관련된 형사사건에 관한 문제를 취급하는 분야인데 비해, 민사법의학은 손해배상 등 민사사건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지금까지 법의학은 주로 형사법의학에만 관심이 집중돼 왔다. 법의학이 '시체를 다루는 의학'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구더기 길이도 중요 단서
법의학 실무를 담당하는 의사들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판단 사항 중 한가지는 죽은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가를 추정하는 일이다. 사후경과시간은 변사체와 관련된 형사사건에서는 물론이고, 상속 문제가 얽힌 민사사건에서도 중요하다. 가령 부부가 대형 사고 현장에서 모두 사망했다고 하자.
사망 시각이 다를 경우 부부의 재산은 누가 먼저 사망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사망사건이 늦은 쪽으로 친가와 처가 가운데 한쪽으로 상속된다. 따라서 판정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 작년 8월 대한항공기 괌 추락사고로 직계 가족 모두가 참변을 당한 한 거부(巨富)의 1천억원대에 이르는 재산 상속권을 놓고 거부의 형제들과 사위간에 법적인 다툼이 일었다.
통상 아버지와 딸이 함께 사고를 당했을 경우 아버지가 단 1초라도 먼저 사망한 것이 증명되면 1차적으로 딸한테 상속권이 가 사위가 재산을 승계하지만, 자녀가 먼저 사망했다면 아버지의 재산은 형제들이 갖는다.
법의의사가 사후경과시간을 추정하기 위한 첫째 근거는 이른바 '시체현상'이다. 시체현상이란 죽음이 일어난 직후 신진대사가 정지되면서 외부환경의 영향에 의해 온몸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현상과 변화를 일컫는 용어다. 시체현상은 유력한 법의학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죽음의 확징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시체현상은 시체 자체의 요인, 즉 연령, 체격, 평소 영양상태, 사인, 사망직전의 운동상태 등 뿐만 아니라 기온, 습도, 통풍 상태 등 주변 환경의 영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시체는 기온이 낮을수록, 피부가 습할수록, 마른 사람일수록, 어른보다는 어린이나 노인이, 여자보다는 남자가 체온하강이 빠르게 일어난다. 따라서 같은 수준의 온도가 측정됐다 해도 이같은 요인들을 무시해서는 정확한 판정을 내릴 수 없다.
사후경과시간을 판단하는데 구더기도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된다. 구더기는 종류와 장소에 따라 다르고, 또 기온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기 때문에 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사후경과시간을 추정하는데 매우 쓸모가 있다. 쉬파리의 경우 4월과 11월경은 구더기의 길이가 거의 산란 후의 일수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4mm면 산란한지 4일 후란 얘기다.
법의학자들은 상황이 애매한 시체를 대했을 때 보다 정확하게 사후경과시간을 추정하기 위해서 평소 사망 시각이 명확한 시체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각종 조건과 더불어 시체현상을 명확하게 기록해둔다.
건강할수록 더 딱딱해져
일반적으로 시체현상의 판단은 시체에 남아 있는 온기뿐만 아니라 시반, 사후 경직, 각막 혼탁, 안압, 부패 정도, 위장 내용물 등을 눈으로 보거나(視診) 만져보는 것(觸診)에서 출발한다. 이는 사람이 죽으면 그 직후부터 발생하는 일정한 변화를 읽기 위한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혈액이 순환되지만, 일단 생명이 끊기면 흐르던 혈액의 적혈구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 즉 시체가 놓인 아래쪽의 모세혈관에 집결되면서 피부가 암적갈색을 띤다. 이것이 바로 시반(屍斑)이다. 시반은 압박된 부위에는 출현하지 않는다. 똑바로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면 엉덩이와 등어리 부분 등 지면과 붙어 있는 부위에는 시반이 생기지 않는다.
시반은 빠르면 사후 30분, 평균 1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발생하는데, 처음에는 점의 형태를 띠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커지면서 무늬를 형성한다. 사망한지 5-6시간 이내의 시반을 눌러보면 그 부위가 쉽게 흰색으로 변하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면 이런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시반을 판정할 때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피하출혈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은 맨눈으로 보아 매우 유사한데, 시반을 피하출혈로 잘못 판정하면 타살에 의하지 않은 경우를 타살로 보게 돼 수사에 혼선이 생긴다. 시반은 초기의 경우 눌러보면 퇴색이 되는 반면, 피하출혈은 이같은 변화가 없다.
사후 경직의 진행 상태도 중요한 판단 자료 가운데 하나. 살아 있을 때 항상 일정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의 근육은 죽으면 일시적으로 이완상태를 보이다가 점차 수축하면서 관절마저 뻣뻣하게 굳어져버린다. 이를 시강(屍剛)이라고 하는데, 인체의 모든 근육에서 일어난다. 이 현상이 최고에 이르면 시체는 마치 나무판처럼 단단한 강직 상태를 보인다.
물론 시강이 모든 시체에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역시 환경 요소에 따라 속도와 정도에 차이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근육 발달이 좋은 건강한 사람일수록 시강이 강하며, 어린이나 노인에게서 약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아무래도 눈으로 보고 만져보는 것만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일. 이 때문에 직장의 온도, 근육과 척수액의 pH, 혈중 전해질 등 사후경과시간의 판단 근거가 될만한 요소들을 물리·화학적 방법을 동원해 살피거나, 필요에 따라서는 각종 자극에 대한 반응과 조직학, 세균학적인 방법이 함께 사용한다.
당혹스럽게도 시체현상과 사후경과시간의 관계는 발표자에 따라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곤 한다. 이같은 차이는 심지어 법의학 교과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는 일차적으로 시체현상의 지역차(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한 장소의 환경적 요인)와 함께 주관적인 표현법 등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건의 사후경과시간을 알아내는데 두루 적용할 수 있는 추정방법이 없는 현실탓이 더 크다. 결국 법의들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 적당한 추정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검안부터 충실히
검시는 검안과 부검(해부)으로 나누어진다. 검안은 시체를 손상하지 않은 채 외부를 검사하는 것이다. 검안을 시행할 때는 대체로 사인, 손상의 유무(있으면 그 양상, 손상을 형성한 기전, 사인과의 인과관계, 자살·타살의 구별), 사후경과시간, 개인식별의 참고사항 등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한다.
병리의사라면 검시에 임할 때 외부소견을 관찰하고 기록하기는 하지만, 주된 관심은 내부장기의 변화에 쏠려 있다. 반면 법의의사는 작은 찰과상같은 사소한 손상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찰과상은 임상적으로 별 의미가 없어 일반의사라면 관심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법의의사는 사소한 손상이 과연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를 법의학적으로 해석해 사건해결에 이용하려고 한다.
경찰의 요청으로 법의학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의사가 검안을 담당했다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예는 적지 않다. 세심하게 전신을 관찰하지 않은 채 현장에 있는 약병과 약을 음독한 듯한 입 안의 소견만으로 중독사로 추정했다가 시체를 화장하기 전 유가족들이 고인의 몸을 닦는 과정에서 칼에 찔린 자국이 발견된 사례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해부를 하지 않고 검안만으로 끝내는 예가 많은데, 이 때문에 외부검사에서 중요한 소견을 놓치면 해부를 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는 사건해결에 필요한 중요한 단서를 놓치는 것으로,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물론 시체 표면(피부)을 아무리 세밀히 관찰해도 특별한 이상이나 손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또 해부를 했는데도 이상소견이 없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한번은 군에서 무전병들이 짊어지고 다니는 큰 배터리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으려 물에 들어갔다가 감전사한 사건이 있었다. 피부 표면은 물에 젖으면 전기가 아주 잘 통한다.
이 사건에서는 피부의 전기저항이 아주 작아서(전류=전압/저항. 따라서 전기저항이 낮아지면 같은 전압의 전기라도 많은 전류가 흐른다) 피부에 아무런 손상도 남지 않았다. 내부소견도 특이한 것이 없었다. 만약 검시에 임하는 의사가 사망자가 살아 있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에 관한 정보가 없었다면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하고 사인불명으로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전기가 흐른 흔적은 어디에
시체의 외부검사를 철저히 함으로써 적지 않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지만, 검안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시체의 내부 소견과 장기의 변화를 관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시체의 내부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해부(사법 해부 :죽음이 범죄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되거나, 혹은 범죄의 의심이 있는 경우에 시행하는 해부)를 해야 한다. 이때는 의학적인 지식을 근거로 장기와 신체 내부의 손상이나 병변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세밀한 해부를 시행해도 사인을 알아낼 수 없거나, 또 아무런 변화를 남기지 않는 예도 있다.
앞서와는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감전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전기는 인체에 접촉돼 신체내부에 흐른 후 다른 부위를 통해 나가버리며, 신체 내부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감전사는 피부와 피하조직에 남아 있는 전기로 인한 미세한 손상만이 유일한 증거다.
전류반(current mark)이라고 불리는 이 손상은 전기가 흐르는 도체와의 접촉면이 좁을 경우에만 생기며, 접촉면이 넓거나 특히 습기가 많을 때는 발생하지 않는다. 전류반은 대체로 핀의 머리 크기에서 커봤자 완두콩 정도 크기로 원형의 회백색이나 회흑색 피부 함몰을 만든다. 또 그 속에 자그마하게 움푹 들어간 구멍이 생기고, 드물게는 그 주위에 출혈을 동반한다.
그런데 이러한 특성을 지닌 전류반도 손바닥과 같이 피부가 두꺼운 부위에서는 잘 식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럴 때는 돋보기를 이용해 세밀하게 관찰함으로써 놓치지 않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육안으로 전류반이라고 판단된다고 해도 그 손상에 관한 조직학적인 검사를 함으로써 전류반을 최종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익사의 판정 조건
하지만 아무리 외부소견이 중요하다고 해서 세밀한 관찰이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만능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강이나 바다, 혹은 호수 같은 물에서 발견된 시체를 '익사체'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의 익사는 "어떠한 종류의 액체(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님)가 기도에 들어감으로써 호흡을 방해해 사망에 이른 일종의 질식사"다.
그런데 물에서 발견되는 시체 중에는 순수하게 물에 의한 익사체도 있지만, 다른 방법으로 사망한 후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누군가 시체를 물에 넣은 예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물에서 시체가 발견되면 항상 그 사인이 익사인지 아니지를 먼저 구별해야 한다.
물에서 발견된 시체의 외부검사를 시행할 때 법의의사들은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 인체의 피부에 생긴 손상은 피부가 물에 젖게 되면 잘 보이지 않게 변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손상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리 급해도 전신이 잘 건조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렸다가 피부가 완전히 건조된 다음에 관찰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손상이 발견된다고 해도 또 그것을 해석하는데 적지 않은 애를 먹는다. 물 속에 들어간 시체는 물의 흐름에 따라서 여러 가지 사후손상을 받기 때문이다. 즉 손상이 존재한다고 해서 모두를 사망과 연관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물 속에서 건져낸 시체는 해부를 통해 익사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해부소견(내부소견)이 있는지를 동시에 관찰한다.
익사에서 볼 수 있는 해부소견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물을 흡입했는지에 여부다. 물을 들이마셨다는 것은 물 속에 들어갔을 때 호흡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도나 폐장의 육안 소견과 함께 장기의 플랑크톤검사를 실시해야 한다.
그러나 물 속에 들어간 후에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물을 전혀 흡입하지 않고서도 사망할 수 있기 때문에(차가운 물의 온도로 인해 후두의 경련이 일어나서 기도가 막혀 질식사하는 경우) 모든 익사체가 전부 액체를 흡입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을 흡입한 시체에서는 기도와 폐장뿐만 아니라, 위장과 십이지장에서도 다량의 액체가 나타난다.
해부가 만능 열쇠는 아니다
이와 비슷한 예는 또 있다. 화재현장에서 사망한 시체가 바로 그것이다. 사망자가 진정으로 화재로 인해 사망한 소사체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사망, 또는 살해된 후에 소사체로 위장하기 위해 불에 던져졌는가를 구별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소견은 기도의 상태다.
즉 화재 당시에 살아 있었다면 호흡을 했을 것이고, 그 결과 매연(검댕이)이 기도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기관지 하부에서 매연이 발견돼야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상부기도(예를 들어, 후두부)에만 매연이 존재하는 것은 진정한 호흡으로 인해 생기는 소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심장의 기능을 급격히 정지시킬 수 있는 과도한 자극이 신경계를 통해 전달됨으로써 사망하는 경우 역시 해부로 사인이 될만한 변화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목이나 가슴에 급격한 충격이 가해져 미주신경(연수에서 나온 열번째의 뇌신경. 목과 가슴, 내장에 분포해 지각과 내장의 운동, 분비를 담당)을 지나치게 자극하면 심장운동이 억제돼 사망하는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사망자를 둘러싼 사망 직전의 상황이나 기타 관련정보를 입수하지 않고서는 사인을 알아내지 못하는 수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전문가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소견이나 병변을 소홀히 해 놓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해부를 통해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생각 또한 잘못이다. 그리고 법의학자는 장기의 병변만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병리학자와 달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