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들어 인간의 평균수명은 그야말로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1백년 전인 19세기말에는 40세 가량에 불과하던 것이 지금은 70세를 훌쩍 넘게 됐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말의 35세 안팎에서 요즈음은 두배가 넘는 72, 3세를 헤아리게 됐다. "사람이 일흔 살까지 사는 일은 옛날부터 매우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이 실로 옛말이 된 셈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의 수명이 크게 늘어난 것은 사망률, 특히 여러 가지 전염병에 의한 사망률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자식 반타작이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이 있었다. 자식을 낳아 절반만이라도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으면 복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과거에는 어린 나이에 전염병에 걸려 죽는 일이 많았다. 먼 옛날만이 아니라 백년도 채 안된 시절에도 그러했다.
전염병에는 원인균이 있다
20세기 역시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희망과 절망이 뒤엉킨 세기였다. 진보와 퇴보, 건설과 파괴가 어느 시대보다도 규모가 훨씬 커졌다는 점이 우리 세기의 특징일 것이다.
20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그밖의 수많은 전쟁과 내전, 고문과 살육 등으로 1억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세기이면서 동시에 그 몇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생명의 기쁨을 누린 시대다.
이 희망과 진보의 20세기를 열어준 많은 위인들 중 로베르트 코흐 (Robert Koch, 1843-1910)는 찬연히 빛나는 한사람이다.
코흐는 수많은 전염병들의 병원균과 병의 실체를 모두 밝힌 것도, 더욱이 그 치료법을 개발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코흐는 전염병들에는 각기 원인이 되는 병원균이 있다는 사실을 현대과학적 방법으로 분명히 하고 '세균병인설'(細菌病因說)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의학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리게 된 프랑스의 파스퇴르(1822-1895)에 의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뒤이어 코흐에 의해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이 세균병인설은 단순히 전염병의 원인은 세균(병원균)이라는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질병(specific disease)에는 각기 특정한 원인(specific cause)이 있다는 현대적 질병관을 확고히 한 데에 더 깊고 넓은 의의가 있다.
또 각각의 질병에 대한 특효치료법(specific therapy)을 개발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살바르산 606, 페니실린, 스트렙토마이신 등 각종 세균성 전염병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나타낸 약이 개발된 것도 바로 이러한 병인론과 질병관이 바탕이 돼 가능했던 것이다.
세균학의 시대 개척
또한 코흐는 세균의 배양법, 고정법, 염색법과 현미경사진촬영법 등을 개발하고, 어떤 병원체가 전염병의 원인임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원칙(코흐의 공리)을 제시했다. 이러한 업적은 이후 불과 20여년 사이에 세균학자들이 여러 중요한 전염병의 병원균을 발견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세균학의 시대'를 개척했으며 코흐 자신은 '세균학의 개조(開祖)'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게 됐다.
임질균 (1879년에 나이세르가 발견), 장티푸스균 (1880년, 에베르트), 나병균 (1880년, 한센), 디프테리아균 (1884년, 클렙스), 페스트균 (1894년, 키타사토와 예르상), 이질균 (1898년, 시가), 매독균 (1905년, 샤우딘) 등은 코흐의 방법을 활용하거나 더욱 발전시켜 세균학자들이 발견한 수많은 병원균 목록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그뿐 아니라 코흐는 결핵과 콜레라 등 당시 유럽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되던 몇가지 전염병의 원인균을 직접 발견하기도 했다. 결핵은 거의 모든 나라가 산업화 과정을 겪는 동안 산업화의 대가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질병이다.
19세기 거의 내내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 초기 산업화 국가에서 결핵은 줄곧 월등한 비율로 사망원인 1위 자리를 고수했다. 시기는 조금 뒤지지만 일본과 우리나라 등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결핵은 당시에 오늘날의 암이나 에이즈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었다. 오죽했으면 '백색의 흑사병(페스트)'이라고 했을까?
탄저병균 발견으로 다져진 기초
코흐가 고안한 방법론과 이후 확립된 세균학의 전통은 1870년경 보불전쟁기에 발생한 소의 탄저병 연구를 통해 기초가 잡혔다. 코흐는 이 연구를 통해 그의 방법론을 확립하는 것은 물론 세균학자로서의 명성과 지위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의 여러 지방에서는 양과 소에 탄저병이 크게 유행해 걸리면 얼마 못 가 모두 죽었다. 사람도 걸리면 대부분 죽었다. 농촌은 공포에 떨었다. 폴란드의 한 수의사가 탄저병으로 죽은 동물의 혈액에 작은 간상(막대모양)세균이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이 탄저병의 원인인지, 아니면 병의 결과로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또 어느 수의사는 병사한 동물의 혈액을 건강한 동물에게 주사하면 그 동물은 탄저병에 걸리는데, 병에 걸린 동물의 혈액은 그 안에 간상체가 없더라도 탄저병을 옮긴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흥미를 느낀 코흐는 탄저병에 걸린 동물의 혈액을 쥐에게 주사해 보았는데, 그 쥐는 다음날 죽었다. 그리고 쥐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했더니 간상체가 다수 발견됐다.
이어서 코흐는 자신이 만든 순수 배지에서 그 간상체, 즉 탄저균을 배양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렇게 배양한 균을 다른 동물에 주입해 자신이 뜻한 대로 탄저병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것으로 탄저병은 탄저균이라는 특정한 병원균이 일으킨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코흐는 인내심을 갖고 실험을 몇백 번이 넘도록 되풀이해 탄저병에 걸린 동물의 혈액을 건강한 다른 동물에게 주입하면 다시 탄저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는 두번째 동물에서 채취한 혈액을 세번째 동물에게 주입해도 역시 탄저병을 일으키는데 더 빨리 발병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이러한 과정을 거듭할수록 탄저균은 더욱 강해져 나중에는 탄저균이 혈액 속에 있는 다른 세균들을 거의 다 죽여버린다는 것도 알게 됐다.
세균병인설 완벽하게 증명
그는 탄저균을 분리하고 배지에서 순수 배양을 해 그 세균의 특성을 연구했다. 코흐는 탄저균이 자손을 만들 때는 중앙부가 끊어지면서 분열해 증식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탄저균이 때로는 실처럼 길게 늘어나서 염주 모양의 포자를 만드는 현상도 관찰했다.
또한 탄저균은 약하고 잘 죽지만, 그 포자는 저항력이 강해 공기 중이나 흙 안에서 오래 생존하며 동물체 내에 들어가면 다시 세균이 돼 증식해 탄저병을 일으킨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탄저병 연구로 자신을 얻은 코흐는 블레슬라우 대학의 저명한 학자들에게 자신의 결과를 설명했다. 학창시절의 은사로 세균 분류의 권위자인 콘(1828-1898), 병리학자 콘하임(1839-1884), 바이게르트, 트라우베 등은 코흐의 업적을 절찬했고, 코흐는 실험결과를 정리해 1876년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 논문은 전염병이 세균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완전무결하게 증명한 것으로서 그때까지 많은 학자들이 미심쩍어하던 세균병인설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었다. 코흐는 이 논문을 가지고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세포학자였던 비르효(1821-1902)를 찾아갔지만 문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비르효는 여전히 세균병인설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1891년에야 세균병인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코흐는 이에 굴하지 않고 병에 걸린 동물로부터 병원균을 분리하는 방법과 한 종류의 병원균만을 순수하게 배양하는 방법을 더욱 면밀히 다듬었다. 코흐의 이름은 갈수록 유명해져서 멀리 미국에까지 알려졌다. 근대적 세균병인설의 창안자라고 할 프랑스의 파스퇴르도 코흐에게 경의를 표했을 정도다.
이때부터 코흐의 연구는 많은 의학자들에게 훌륭한 귀감이자 지침이 됐다. 탄저균은 탄저병을 일으킬 뿐이지, 다른 병은 일으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각각의 전염병에도 각기 다른 원인균이 있을 것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병원균의 발견이 연이어졌다.
독일 정부도 코흐의 가치와 재능을 인정하게 됐다. 그 결과 시골의 일개 개업의사이던 코흐는 1880년 베를린의 제국위생국에서 완벽한 시설과 지원 속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게 됐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연구자들이 그곳으로 모였으며 코흐가 진두지휘를 함으로써 '세균학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노벨상 안겨준 결핵균 연구
코흐가 확립한 엄격한 세균학적 원리와 연구방법을 이용해 단독균, 디프테리아균, 파상풍균, 폐렴균, 뇌척수막염균, 이질균 등이 속속 발견됐다. 코흐는 이들 연구결과를 토대로 해 전염병의 특징과 그 전파방법을 밝혀 나갔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전염병의 예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코흐의 연구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은 결핵의 병인(病因)을 밝혀낸 것이었다. 그는 결핵의 연구를 통해 탄저병을 연구하면서 고안한 '코흐의 공리'를 완벽하게 확립하고 노벨상 수상의 영예까지 누리게 됐다.
코흐는 결핵환자의 림프절, 폐, 관절에서 새로운 박테리아, 즉 나중에 결핵균이라고 불리게 된 세균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결핵 증상을 나타내는 토끼, 기니피그, 소 등 동물의 조직에서도 역시 결핵균을 발견했다.
그러나 코흐는 그것으로 결핵의 원인이 규명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세균의 존재가 결핵과는 무관할 수도 있으며, 또 원인이 아니라 일종의 결과로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흐는 그가 발견한 세균이 결핵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치밀한 실험을 했다. 우선 그는 결핵을 앓는 사람과 동물들에서 분리한 세균을 자신이 개발한 방법으로 배양액에서 배양했다.
그리고는 그 배양 세균을 토끼 등 실험동물에 주입해 결핵을 일으키는 데에 성공했다. 실험동물들은 결핵 증상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토끼의 폐조직을 검사한 결과 결핵의 특징들이 잘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코흐는 결핵에 걸린 실험동물의 조직에서 결핵균을 분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로써 코흐는 결핵균이 결핵이라는 특정 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명쾌하게 규명한 것이다.
세균학의 지침, 코흐의 공리
코흐는 이 실험을 통해 세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코흐의 공리'를 확립했다. 즉 특정한 세균이 특정한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과정과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째, 문제시되는 질병의 모든 경우에서 그 세균이 발견돼야 한다.
예를 들어 결핵에 걸린 환자에서 항상 결핵균을 발견,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실험실에서 그 세균을 배양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배양한 그 세균을 실험동물에 투입했을 때 똑같은 질병이 생겨야 한다. 예컨대 분리 배양한 결핵균을 실험동물에 주어 결핵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그 병(결핵)에 걸린 실험동물에서 다시 그 세균(결핵균)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코흐가 결핵균을 처음으로 발견한 점도 끊임없는 노력의 소산으로 칭송할 일이지만, 자신이 발견한 그 세균이 결핵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야말로 과학자로서 코흐의 탁월함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1905년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여도 단순히 결핵균을 발견한 데 대해서가 아니라 코흐의 과학성에 대한 정당한 평가였던 것이다.
1882년 3월 24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병리학 학술대회에서 세계의 유수한 병리학자들에게 코흐는 그 동안 주도면밀하게 수행해 온 자신의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결핵균 발견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결핵은 만성 영양실조 때문이라고 여겨져 왔기 때문에 학술회의장은 들끓기 시작했다.
사람에게서 분리해 배양한 결핵균을 토끼에게 접종하면 토끼가 결핵에 걸린다는 사실, 그리고 결핵균은 폐뿐만 아니라 위장관과 피부와 뼈까지도 침범한다는 사실을 코흐는 자신만만하고 명료한 어조로 밝혔다. 온갖 반대 의견을 예상해 치밀하게 구성한 발표는 정연하고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 사람의 반론자도 없었다.
이때의 모습과 느낌을 메치니코프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는 뒷날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코흐의 연구결과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전세계에 전파돼 필설로는 표현하기 어려우리만큼 모든 사람들에게 불멸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코흐는 예상되는 모든 반론을 미리 생각해서 그 반론에 대한 답변을 미리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가장 강렬한 비판자들까지도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콜레라 연구에도 한몫
1882년 결핵균 발견과 함께 코흐의 연구는 전염병의 연구로 옮아갔다. 콜레라는 19세기 들어 서너 차례 유럽에 대유행을 일으킴으로써 유럽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던 질병이었다.
1883년 인도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퍼졌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침입할 참이었다. 병원체의 검출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매우 절박한 일이었다. 코흐는 총애하는 제자 한 사람과 함께 직접 알레산드리아로 가서 병원체를 탐구했다.
코흐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던 파스퇴르도 제자를 파견했다. 독일 원정대와 프랑스 원정대 사이에 학문의 전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프랑스 연구자는 그만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고 말았다. 코흐는 그 프랑스 사람의 빈소를 찾아가 비록 경쟁자이지만 인류의 안녕과 학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의 명복을 비는 꽃다발을 바쳤다.
베를린에 돌아온 코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채취해 온 가검물을 현미경으로 면밀히 관찰해 마침내 콜레라균을 발견했다. 그리고 콜레라균은 음식물과 함께 입으로 들어가 콜레라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혀내어 콜레라 방역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의 공적은 위대했다.
그러나 칭송자들을 향해 코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힘껏 싸웠습니다. 그 성과가 내가 노력한 이상의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내리친 망치가 부닥친 부분에 우연히 금광이 있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콜레라균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것이 콜레라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뮌헨 대학의 위생학 교수이던 페텐코퍼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코흐의 추종자들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자신이 콜레라 배양균을 마신 뒤에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보자는 것이었다.
페텐코퍼는 약속대로 시험관에 가득히 담긴 콜레라균 배양액을 벌컥벌컥 마셨다. 며칠이 지나도록 페텐코퍼는 멀쩡했다. 그렇다고 페텐코퍼가 옳았던 것은 아니다. 콜레라의 원인은 분명히 콜레라균이지만, 콜레라균의 침범을 받는다고 모두가 콜레라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페텐코퍼는, 아니 그의 몸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 셈이었다. 사실 세균병인설의 지지자나 반대자 양쪽 모두 숙주의 저항력과 면역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