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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회로선폭' 0.3nm에 도전한다

원자선 원자막 연구단

“미래에는 속도가 모든 것을 좌우할 것이다. 한때 ‘미래’라고 불리던 일들이 ‘과거’로 기록되는 속도가 지금처럼 빨랐던 적은 없다. 이제 역사의 속도는 너무 빨라 우리가 위기를 분석하고 기회를 잡기도 전에 지나가 버린다.”

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 패트릭 딕슨은 2007년 펴낸 ‘퓨처와이즈’라는 책에서 미래 사회의 첫 번째 특징으로 ‘속도전’을 꼽았다. 2030년쯤 지금보다 1만 배나 성능이 향상된 마이크로프로세서 칩 덕분에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돌아가리라는 예측이다.

그의 예측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현재 1년마다 성능이 2배로 향상되는 반도체 기술의 발전 속도 때문이다. 이른바 ‘황의 법칙’이라 불리는 반도체 칩의 발전 속도를 계속 이어가는 핵심은 바로 회로의 선폭을 줄여 칩의 집적도를 높이는 일이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세계의 유수 반도체칩 회사들은 현재 회로의 선폭을 50nm(나노미터, 1nm=${10}^{-9}$m)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30nm 64GB(기가바이트)급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황의 법칙’을 8년째 이어갔다.

회로의 선폭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까? 원자선 원자막 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연세대 물리학부 교수 염한웅 단장은 ‘궁극의 회로선폭’ 0.3nm에 도전하고 있다.
 

원자선 원자막 연구단의 연구원들이 주사터널링전자현미경(STM) 안에 들어가는 탐침봉을 점검하고 있다.


전자가 이동하는 폭이 가장 좁은 통로는?

회로선을 만드는 방법은 ‘톱다운’(Top-Down)과 ‘바텀업’(Bottom-Up) 방식이 있다. 톱다운은 이름 그대로 실리콘 기판을 깎아내는 ‘식각방식’으로 회로선폭의 크기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 식각방식에서 실리콘 기판을 깎는 ‘공구’는 빛인데, 원리적으로 빛의 파장보다 짧은 선폭을 갖는 회로선은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굴삭기로 개울은 만들 수 있어도 사과를 깎을 수는 없는 이치다.

염 단장은 “현재 모든 반도체 제작 공정에 사용하는, 실리콘 기판을 깎아내는 ‘식각방식’으로는 2020년쯤 회로선폭이 10nm급에서 벽에 부딪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한계를 넘을 걸로 기대되는 방식이 바로 ‘자기조립’을 이용한 바텀업 방식이다. 자기조립이란 분자나 원자 수준에서 입자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구조를 만드는 현상이다.

과학자들은 그동안 회로 소자에 사용할 자기조립물질로 탄소나노튜브 같은 나노소자를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왔다. 이 방법으로 2020년쯤 회로선폭 10nm의 벽을 넘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

하지만 염 단장은 그 이후를 바라보는 연구를 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론적으로 가장 작은 회로선폭에 도전하고 있다.

“회로선은 전자가 이동하는 통로입니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구리 전선은 전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넓은 통로겠죠. 그렇다면 전자가 이동하는 가장 좁은 통로는 무엇일까요? 바로 원자들이 일렬로 늘어선 형태입니다. 만약 원자 한 개의 폭을 지니는 선(원자선)이 회로선의 역할을 한다면 더 이상 가는 배선은 없는 셈이죠.”

단순한 아이디어지만 염 단장이 일본 도호쿠대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던 1995년까지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당시 실리콘 기판에 얇은 금속막을 입히는 연구를 했는데, 어떤 실험 조건에서는 실리콘에 금속막이 다 생기기 전 막의 형태가 아니라 금속선이 한두 줄씩 생기는 경우가 있었다. 대부분 과학자들이 이 선을 불순물 정도로 여겼지만 염 단장은 이를 회로선으로 사용할 생각을 했다.

염 단장은 1996년 박사학위를 마치고 동경대 조교수로 임용된 뒤 원자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만에 원자 4개 폭을 갖는 회로선을 반도체 소자에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밝혀, 1999년 물리학계의 권위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논문을 게재했다. 그리고 9년 뒤인 올해 2월 이 논문은 총 인용지수 200회를 돌파하며 원자선 연구의 효시로 인정받았다.
 

원자를 ‘일렬종대’로 세우는 방법^회로선은 전자가 이동하는 통로다. 만약 실리콘 기판 위에 금속 원자를 한 줄로 길게 늘어세운다면 이론적으로 가장 좁은 회로선이 된다. 원자 한 줄의 폭을 갖는 전선을 만드는 방법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원자 부대’, 일렬종대로 헤쳐모여!

어떻게 원자를 한 줄로 늘어세울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원자 하나하나를 직접 조작하는 방법이다. 1990년 미국 IBM의 도널드 아이글러 박사는 니켈 금속 표면 위에 초저온에서 35개의 크세논 원자를 움직여 ‘IBM’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보였다. 현재 세계적으로 원자를 조작할 수 있는 과학자는 10명이 채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원자조작법이 매력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반도체 기술에 응용하기에는 실용성이 떨어진다. 원자선이 회로 역할을 하려면 원자 수십만~수백만 개를 일렬로 늘어세워야 하는데, 원자 20개를 옮기는 데도 하루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염 단장은 “원자들이 자기조립 방식으로 늘어서게 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사실 금속 원자를 금속판에 일렬로 세우는 일은 독일 과학자들이 일찍이 성공했어요. 하지만 금속판 위에서는 원자들이 잘 움직이기 때문에 비교적 쉬운 연구였고, 판과 금속선이 모두 금속이라 회로로 쓸 수도 없었지요. 반도체에 응용하려면 실리콘 기판에 금속 원자를 한 줄로 세워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어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염 단장은 실리콘 면에 계단을 여러 층 만든 뒤 그 위에 금속 원자를 뿌리면 금속 원자가 계단 턱에 나란히 붙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금속 원자가 실리콘 원자와 접촉하는 면이 많은 곳에서 안정되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계단을 만들지 않고도 금속 원자가 실리콘 원자를 치환해 한 줄로 늘어서게 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하지만 이를 반도체 회로로 활용할 수 있으려면 넘어야 할 벽이 하나 더 있었다. 원자선에 불순물을 첨가해 조건에 따라 전기전도도가 달라지는 반도체의 특성을 보여야 했다. ‘도핑’이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반도체 소자 분야의 핵심이다.

염 단장은 실리콘 기판에 금 원자를 두 줄로 정렬해 폭이 1nm의 원자선을 만든 뒤, 그 위에 다시 실리콘 원자를 점점이 섞는 반도체 도핑 기술을 개발했다. 그리고 실리콘이 원자선에 불순물이 돼 농도에 따라 전기전도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내용을 담은 논문은 ‘피지컬 리뷰 레터스’ 3월 28일자에 실렸고, 후속 논문 한 편이 1주일 뒤인 4월 9일 연달아 실렸다. 이 연구 결과는 2005년 염 단장이 세웠던 당시 최소 선폭이었던 2nm 기록을 스스로 갈아치우는 성과였다.

염 단장은 ‘원자선을 이용한 컴퓨터가 언제쯤 등장할 것 같나’하는 질문에 “한 30년쯤 뒤?”라고 답했다. 경제성을 고려할 때 실용화 과정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궁극의 선폭’ 0.3nm 원자선에 대한 도전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렬종대’로 늘어서는 ‘원자 부대’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Interview 염한웅 단장
‘물리학’ 동네에 튼튼한 ‘원자선’ 집 지을 터


염한웅 단장이 1998년 원자선의 가능성에 대한 이론과 실험 내용을 논문에 담아 처음으로 투고한 저널은 ‘네이처’였다. 당시 원자선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때였다. ‘원자선’(atomic wire)이라는 용어도 염 단장이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고체물리학계의 원로 교수인 스위스 바젤대의 이브 베어 교수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일본의 동경대에서 ‘초짜 조교수’였던 염 단장의 논문은 보기 좋게 게재 거부를 당한 반면, 골드 교수의 논문은 1999년에 네이처에 실렸다.

그 뒤 염 단장은 또 다른 권위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약 20편의 논문을 한 번도 거부당하지 않고 게재할 만큼 인정을 받았다. 유독 ‘네이처’와 ‘사이언스’만 원자선의 가능성을 아직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지난 10년 동안 ‘네이처’와 ‘사이언스’는 원자선 분야에서 베어 교수의 논문을 제외하고 단 한 편의 논문도 싣지 않았다.

하지만 원자선은 현재 미국과 일본, 유럽 등지에 연구그룹만 약 20개가 있을 정도로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분야다. 염 단장이 연구활동을 했던 일본 물리학회는 2001년 일찌감치 원자선 세션을 처음 만들어 관련 분야 연구자들이 교류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일본 물리학회는 미국 물리학회, 독일 물리학회와 함께 세계 3대 물리학회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권위있는 학회다.

어쩌면 염 단장이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 물리학회에 원자선 세션이 생긴 일은 비교적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추측을 불식시키듯 올해 2월 독일 물리학회도 원자선 세션을 처음 만들어 과학자들의 연구를 독려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독일 물리학회에서 원자선 세션의 기조강연을 염 단장에게 부탁했다는 사실이다. 유럽 학계에서도 그를 원자선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원자선 연구를 시작한 지 올해로 딱 10년이 됐습니다. 절반 정도 달려 온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원자선이라는 집의 기초를 닦았다면, 앞으로 10년은 그 집이 ‘물리학’이라는 동네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도록 집의 기둥을 잘 세워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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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안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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