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지구에 외계인이 본격적으로 발(또는 촉수)을 딛은지 꼭 1백주년이 되는 해다. 1898년 화성인들은 엄청나게 큰 깡통을 타고 날아와서 지구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다. 영국 작가 H.G. 웰스가 '우주전쟁'에서 자세하게 묘사한 이 사상 최초의 외계인 침공부대는 지구에 대한 사전 조사를 게을리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그 탓에 지구인이 오랜 세월에 걸쳐 면역성을 길러왔던 감기에 걸려 죄다 몰살되고 말았다. 신토불이(身土不二)는 과학적으로도 상당히 설득력있는 법칙인 셈이다.
사실 서구의 문학작품을 살펴보면 17세기 즈음부터 심심치 않게 외계인에 대한 얘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외모만 우리와 다를 뿐,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지구인과 다르지 않았다. 당시 작가들의 상상력은 아직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와 영국 태도 엇갈려
사랑스런 친구 VS 인류의 적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과학이 발달하면서 상상력에도 과학적 논리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즉 지구의 생물과는 완전히 다른 생태적 특징, 또 지구인의 사고방식이나 의식세계와는 전혀 다른 외계인이 등장한 것이다.
이처럼 외계의 환경과 생물을 과학적 합리성에 맞게 추측하고 상상해보는 일은 당시 라마르크와 다윈에 의해 널리 퍼진 진화론에 크게 힘입었다. 즉 지구의 동·식물이 일정한 진화 단계를 거쳐 발달해 왔다면, 외계 생물도 그렇게 진화해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감각기관이나 호흡기관, 운동기관은 외계 생물에게도 필수적일 것이므로.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주목할 만한 외계인의 묘사는 프랑스 작가들의 손에서 창조됐다. 까밀 플래마리온의 논픽션 '현실 세계와 상상의 세계'(1864)는 외계인의 개념을 최초로 대중화시킨 저작으로 꼽힌다. J.H. 로스니의 '무한의 항해자들'(1925)에서는 인간과 외계인이 서로 사랑을 나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여섯개의 눈이 달리고 다리가 셋인 화성인과 연애한다. 프랑스 작가들이 외계인을 묘사하는 태도는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호와 호기심이 섞인 따뜻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진화론 중에서도 적자생존설(適者生存設)에 많은 관심을 가져 외계인을 인류의 적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즉 지구에서 강한 종만이 살아남듯이, 우주에서도 강한 외계종족이 약한 외계종족(지구인)을 제압하려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웰스의 '우주전쟁'이 바로 적대적인 외계인상을 굳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사회에 미친 파장은 예상 외로 컸다. 왜냐하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화성인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관측천문학이 발달하면서 달이 삭막한 황무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알려진데다, 여러 권위있는 학자들이 화성에서 운하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이어지면서 화성인은 설득력 있는 '외계인 후보 1순위'로 떠올라 있던 참이었다.
이 통념은 화성에 운하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화성 표면이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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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 대중잡지 전성기
동네북으로 전락
20세기 전반기에 외계인은 지구 영웅에게 두드려맞는 '동네북'으로 전락한다. 미국 등지에서 '펄프 매거진'으로 불리는 싸구려 대중잡지들이 전성시대를 이루자, 그 지면을 메꾼 수많은 우주 활극의 조연으로 대거 등장한 것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1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의 연작소설 '화성' 시리즈다. 오늘날 미국 대중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역사가 짧은 미국에서는 우리의 '홍길동전'이나 '전우치전' 같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이 소설은 지구인 주인공이 화성에 가서 화성인을 거느리고 다른 화성인을 무찌르며 아름다운 공주(지구인과 꼭 닮은 돌연변이다)와 사랑을 나누는 내용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화성인은 알에서 부화하며 팔이 네개나 달려있다.
1938년 외계인과 관련한 사상 최대의 해프닝이 벌어진다. 나중에 거장 영화감독이 되는 미국의 오손 웰스가 '우주전쟁'을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해 방송했는데, 아나운서가 급박한 목소리로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했습니다!"라고 외치자 당시 청취자들 중의 10%에 해당하는 1백만명 가량이 실제상황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짐을 싸서 피난가려는 사람도 있었고 총을 들고 '우주전쟁'에 나서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비록 부정적인 인상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이 시대의 SF소설, 만화, 영화가 '외계인'이란 발상 자체를 대중들에게 친숙한 개념으로 각인시킨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현대 과학의 발달이 SF의 상상력에 풍부한 자양분을 공급하면서 작가들의 생각은 폭넓은 지평을 지니기 시작했다. 초창기 미국 SF문학의 기반을 다지는 데 적잖이 기여한 클리포드 시막은 1935년 발표한 '창조자'라는 작품에서 글자 그대로 신과 같은 초월적 우주인의 존재를 묘사했다.
이 소설에 따르면 인류는 이 초월적인 외계인의 손에서 창조됐으며, 우주에는 우리 말고도 이들이 창조한 외계인들이 많이 있다. 조물주나 하나님 같은 종교적 창조주의 개념을 우주인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러나 20세기 전반기의 SF에서 묘사된 외계인들은 주로 지구를 침략하는 악역이 대부분이었고, 개중에는 '외계인'이 아니라 '외계 괴물'이라고 해야 어울릴만한 모습이 많았다. 또 이러한 전통은 영화에도 반영돼 1950년대부터는 외계의 괴물을 등장시킨 공포영화들이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중반 이념 갈등의 시대
무시무시한 괴물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국제정세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의 냉전 구도로 고착되면서, 미국 중심의 서구 대중문화에선 냉전 공식에 충실한 SF들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1950년대에 '공포 + SF' 형식의 혼성 장르 영화들이 크게 융성하면서 노골화된다.
지금까지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들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제작됐는데, 특히 공산권의 위협을 외계 괴물로 상징한 작품은 물론이고 그러한 경향을 비꼬는 듯한 작품들까지 나왔다. 외계인은 이전까지의 '만만했던' 선배들과는 달리 관객들로 하여금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모습을 지니고 나타났는데, 대부분은 SF소설로 먼저 발표된 것을 영화로 각색한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작품들 중 대표적으로 두편의 영화를 꼽을 수 있다. 1951년 발표된 '괴물'과 1956년 선보인 '신체강탈자들의 침입'이 그것이다. 두 작품은 모두 원작 SF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1970년대와 80년대에 새롭게 다시 제작됐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괴물'은 미국의 탁월한 SF편집자이자 작가인 존 캠벨의 단편 '거기 누구냐!'(1938)를 바탕으로 만든 것인데, 외계에서 온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인간의 몸 속에 잠입해 겉모습은 인간 그대로지만 정신은 이미 외계인의 것이라는 내용을 설정했다.
또 '신체강탈자들의 침입'은 미국의 잭 피니가 1955년 발표한 같은 제목의 장편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것으로, '괴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외형을 그대로 지니는 외계의 괴물이 등장한다. 이 작품의 외계 생물은 인간의 육체를 똑같이 복제해내는 능력을 지녔다.
위의 두 작품에 등장하는 외계인의 흥미로운 측면은, 이전의 외계인이 단순히 지적 유희에 가까운 '상상력의 발로' 자체인데 반해서 인간 사회를 은유하고 풍자하는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겉모습은 전혀 구별되지 않는 멀쩡한 사람의 모습이지만, 그 속에 어떤 생각이나 의도를 숨기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외계인들은 이전의 흉측한 외모를 지닌 외계 괴물보다 한차원 높은 공포를 제공했다. 갖가지 이데올로기며 이념적인 갈등으로 혼란했던 당시의 시대상은 이처럼 대중문화 분야에도 예외없이 반영된 것이다.
'외계 괴물'의 전통은 소설과 영화 모두에서 하나의 확고한 틀로 자리를 잡아 지금까지도 같은 구성의 작품들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SF 영화사상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고 일컬어지는 '에일리언'(1979)이 대표적인 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악마를 연상시키는 끔찍한 외모에다 무자비한 잔혹성 때문에 SF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외계 괴물로 알려져 있다. 또 '우주의 뱀파이어'(1985) 역시 우주를 방랑하는 괴물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의 몸과 혼을 앗아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작가인 콜린 윌슨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20세기 후반 화해의 시대
우스꽝스럽고 친근한 캐릭터
1980년대 들어 국제 정세가 해빙 무드를 맞고 서서히 화해의 시대가 열리면서 무시무시한 괴물 외계인 대신 우호적이고 친근감을 주는 외계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2년 발표된 영화 'E.T.'는 우스꽝스런 모습의 땅딸보 외계인이 홀로 지구에 낙오하면서 지구인 어린이와 감동적인 우정을 나누는 얘기다.
영화 '에일리언'에 등장하는 끔찍한 외계인은 괴물로서는 가장 유명할지 모르지만, 'E.T.'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아마도 모든 SF영화, 소설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외계인 캐릭터일 것이다. 또한 1984년 발표된 '스타맨'이나 1985년 발표된 '코쿤'은 따듯한 심성을 지닌 외계인들이 지구를 방문했다가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날 광고모델로까지 등장하는 외계인은 친숙하다 못해 진부한 개념이 돼버렸다. UFO와 함께 '사이비 과학'의 불명예스런 딱지가 붙어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느낌마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우주의 어느 곳인가에 외계인이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노력이 끊이지 않고 맥을 이어왔다.
대표적으로 최근 영화 '콘택트'는 미국에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외계인 탐사 계획(SETI)을 소재로 삼아 사실감을 더했다. 과학적 논리에 입각해 외계의 생명체를 탐구하는 학자들의 진지한 연구가 멈추지 않는 한 SF 영화에서 외계인은 끊임없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할 것이다.
현재까지의 문학과 영화를 살펴볼 때 상상할 수 있는 외계인의 형태는 거의 다 표현되지 않았나 하는 판단을 조심스럽게 내리게 된다. 앞으로 외계인과 실제로 접촉하는 상황이 온다 해도,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전혀 생소하지만은 않으리라.
저 바깥 어디에선가는 우리의 문명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은하 연방 소속의 외계인들이 잔뜩 모여 있을지 모른다. 과학기술 발달에 따른 자멸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는지 관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