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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은 박달나무의 아들

한민족 정서의 뿌리를 찾아서

 

오늘날도 농촌마을의 당산나무는 여전히 마을 주민이 의지할 믿음의 대상이다.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의 당산소나무.


환경문제가 심화되면서 나무와 숲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숲이 임산물을 생산하는 요한 경제자원일뿐만 아니라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제공하는 환경자원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때문이다. 숲의 유용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숲은 사람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정서를 순화시키며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숲은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 인간소외와 인간성 상실, 자연유리와 같은 현대문명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문화자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숲은 새로운 문화자원인 것이다.

이렇듯 경제, 환경, 문화를 아우르는 복합자원인 숲은 인류 문명을 이끌어왔다. 인류의 문명발달 과정을 되돌아보면 건축재나 연료원으로, 그리고 정보 축적을 위한 종이 생산의 기초재료로 사용된 나무나 숲이 없었다면 지금의 문명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숲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들이 오늘날 향유하고 있는 문명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숲은 흔히 인류가 성취해낸 문명 발달의 숨은 영웅, 또는 숨은 공로자라고 불린다.

수렵채취시대에 삶의 보금자리로 그 물질적 유용성이 지대했던 숲은 소금, 청동기, 철기의 생산에 필요한 연료를 공급함으로써 농업문명의 한 축을 지탱해왔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이 그러하고, 인더스 문명이나 황하 문명이 숲을 모태로 번창할 수 있었다. 숲은 이들 초기 문명에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중요한 원천이자 중요한 동력원이었던 것이다.

과학기술혁명의 시대인 현재에도 숲은 문명의 공로자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생태계와 환경의 중심지지체, 생물다양성의 산실, 온실효과를 경감시킬 수 있는 대안, 사막화의 저지, 부족한 수자원의 확충 대안, 대기오염의 완화에 숲 이상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자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룩한 문명발달의 대가로 전 세계에 걸쳐서 많은 숲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지난 8천여년 동안 지구상에 천연림의 형태로 존재하던 숲의 3분의 1이 경작이나 정착, 연료와 목재 생산을 위해서 사라졌다. 이를 일러 역사학자 토인비는 "문명 앞에는 숲이 있고, 문명 뒤에는 사막이 남는다"라고 표현했다.

이 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조들이 일군 농경문화는 이 땅의 낙엽활엽수림을 소나무 숲으로 변화시켰다. 국토의 얼굴을 송두리째 변모시킨 것이다. 숲의 파괴가 신라나 고려의 멸망을 재촉했듯이, 오늘날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근 역시 숲을 잘못 다루었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참사다.

팔만대장경이 가능한 이유

나무나 숲은 민족 문화 발전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우리 산하에 무성했던 산벚나무나 돌배나무, 자작나무가 없었다면 세계 문화유산인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판각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 옻나무가 없었다면 7백여년 동안이나 팔만대장경판을 썩히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방방곳곳에서 자라던 닥나무가 없었다면 천년을 두고도 변치 않는 한지를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며, 세계에 자랑하는 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이나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술 역시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우리 한민족이 나무나 숲을 어떻게 정서적으로 인식해 왔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 나무나 숲에 대한 인식을 직접적으로 남긴 문헌이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삶과 정서, 전통 속에 용해돼 우리의 정신적인 뼈대가 된 숲과 나무와 관련된 문화적 인식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키기 위해서는 문학 예술 작품 등을 통해 간접적인 방법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할 이상이 산림으로 이루어진 산악국가다. 선조들이 이 땅에 본격적으로 터잡아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8천년 전이었다.

산이 많고 나무가 울창한 자연환경과 더불어 수천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산과 숲 자체가 삶의 터전이었다. 그런 까닭에 산과 나무는 우리의 사고체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일찍부터 상징의 대상으로 형상화돼 신화나 전설, 또는 문학과 예술 속에 뿌리 깊이 나타나고 있다.

어느 한 민족이 공유한 상징이 민족문화의 기본이라고 한다면 나무에 대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 상징은 무엇일까? 우리 문화에서 나무와 관련된 첫번째 상징은 단군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의 고조선조에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제세핵랑군이라 불리는 동방문명 개척단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세웠고, 곰에서 여인으로 화한 웅녀와 혼인해 낳은 반신반인의 인간신이 단군이라고 전하고 있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단은 박달나무(檀)나 제터(壇)를 뜻한다. 단(壇)과 단(檀)은 다같이 우리말을 표현하기 위한 가차문자(음이 같은 다른 문자를 빌려 쓴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결국 제단의 나무나 박달나무 모두 단이라 불리는 신격(神格)이 내리는 장소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나무에 깃들인 신이란 의미로 환웅을 단웅(檀雄)이라 부르고 있는데, 단군이라는 이름 역시 단나무의 아들이라고 해석된다.

즉 단군신화에서 단(檀)이란 특정나무가 신이 내리는 나무로 신격화돼 신이 하늘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는 통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신단수는 북유럽이나 중동, 인도 등지의 민간 신앙이나 신화에서 하늘과 지상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인 이른바 '세계수'(世界樹)와 다르지 않다.

2천여 아름 둘레의 부상

건국신화에 나타난 신단수와 유사한 상징은 부상(扶桑)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다. 부상은 높이가 3백리에 달하고 둘레가 2천여 아름에 달하며 가지에 열 개의 태양을 걸 수 있는 거대한 신화적인 나무다.

"내일 아침 돋는 해를 부상(扶桑)에 매었으면, 하늘같은 우리 부친 더 한 번 보련마는…".

이 구절은 고전소설 심청전 중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갈 심청이 아비와의 이별을 아쉬워 한탄하는 독백 중에 나오는 내용이다. 눈먼 아비와 생이별을 해야 할 심청이 한번이라도 아비를 더 볼 수 있게 해를 부상에 매어 아침을 더디 오게 해달라고 염원하는 구절이다.

부상은 조선시대의 민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월부상도(日月扶桑圖)라고 불리는 이 민화는 오동나무와 전나무 위에 해와 달을 각각 배치하고 그 둘레에 오색의 성스러운 기운을 묘사하고 있으며, 나무가 하늘에 닿아 있다. 우리는 민화를 통해서 선조들이 상상했던 부상이라는 세계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부상은 삼국유사에 두 번 나타나는데, 모두 동쪽 해뜨는 곳에 있는 신화 속의 나무로 언급된다. 또 산해경(山海經)이란 책을 보면 "양곡(陽谷)의 위에는 부상이 있는데, 이곳은 열 개의 태양이 목욕을 하는 곳으로 흑치의 북쪽에 있다.

물 가운데에 큰 나무가 있는데 아홉 개의 태양이 아랫가지에 있고 한 개의 태양이 윗가지에 있다. 얼요군저라고 불리는 산 위에 높이가 3백리에 달하는 부목이 있으며, 한 개의 해가 막 도착하자 한 개의 해가 막 떠오르며 모든 해가 까마귀를 싣고 있다"라고 부상을 서술하고 있다.
그 밖에 십주기에는 "잎은 뽕잎 비슷하고 키가 수천장(丈), 둘레가 2천여 아름"에 달한다고 부상을 서술하고 있다. 부상은 한민족의 세계수이자 동양의 세계수인 것이다.

이밖에도 우주수, 또는 세계수를 상징하는 흔적을 우리 문화 유산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중 가장 오래된 흔적은 청동기시대의 농경문청동기(農耕文靑銅器)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농경문청동기의 앞면에는 두갈래로 갈라진 나뭇가지 위에 서로 마주 보듯 앉아 있는 모습의 새 두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고구려의 각저총에서도 보인다.

각저총 현실동벽의 각저도에는 하늘로 뻗은 붉은 갈색 줄기의 나무가 나타나며, 가지에는 3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이러한 세계수의 변형된 상징 형태가 오늘날에도 농촌마을에서 찾을 수 있는 솟대다.

농경문청동기나 고구려 고분벽화, 또는 부상 모두에서 나타나는 나무 위의 새는 세계수가 가진 공통적 특성이다. 세계수의 이러한 특성은 노르웨이의 세계수 이그드러실(물푸레나무), 수메리아 신화에 나타난 세계수 훌루푸나무(버드나무), 멕시코의 고대 아즈텍 문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세계수 등에서 새가 나무의 꼭대기에 나타나고 있는 예와 유사하다.

이처럼 단군신화의 신단수에서 유래된 세계수의 흔적은 청동기시대를 거쳐 농경문화가 자리잡았던 신라(경주 김씨 시조의 탄강처 계림)와 고구려(각저총을 위시한 6-7세기의 여러 고분)를 거쳐 오늘날 농촌마을의 당산나무에로 그 정서적 맥을 이어오고 있다.

천지의 수많은 자연물 중 유독 나무가 천계와 지상을 연결시켜주는 상징으로 형상화된 것은 나무에 대한 한민족의 정서적 배경이 무척 오래됐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농경문화의 뿌리에 닿아 있는 세계수

우리 조상의 삶 속에 들어와 민족 문화의 상징이 된 세계수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리고 우리 조상들은 나무를 어떻게 생각했기에 이처럼 하늘에서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는 통로로 생각했을까? 왜 세계수의 일종인 서낭나무나 당산나무는 과학문명이 맹위를 떨치는 오늘날까지 신처럼 섬기고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 우선 나무만이 가진 독특한 특성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무의 특성은 장구한 수명과 거대한 몸체를 들 수 있다. 마을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으로서 수백년 이상 마을을 지켜오고 있는 생물은 나무 말고는 없다. 마을의 온갖 역사를 속속들이 지켜보았을 나무의 장구한 수명에, 거대한 덩치에 선조들이 가졌을 경외심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두 번째 특성은 해마다 봄이 되면 새로운 싹을 틔우고, 가을이면 잎을 떨어뜨리는 영속성이다. 영속성은 다른 말로 우주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당산나무를 우주수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주의 리듬이란 태양계의 순환 주기에 따라서 하루(日)와 달(月)이, 그리고 절기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주기적 현상을 말한다. 조상들에게는 수백년 동안 절기에 따라 변함없이 나타나는 나무의 영속성이 태양이나 달이 보여주는 우주의 리듬처럼 신비로웠으리라.

세번째는 매년 수많은 열매를 맺는 다산성이다. 농경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활동은 식량 생산이었다. 그래서 조상들은 끊임없이 열매를 맺는 나무의 생산력을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무만이 가진 이러한 생물적 특성 외에 한국인의 자연관에서도 나무 숭배의 배경을 찾아 볼 수 있다. 흔히 한국인의 자연관은 도교, 불교, 유교, 음양오행설,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한 동양철학이 혼합된 자연조화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우리민족은 엄청난 토목공사가 벌어진 근대화 이전까지 자연개조나 극심한 자연 파괴 없이 자연과 풍토에 순응하면서 수천년을 살아왔다. 자연을 대하는 이와 같은 생활자세는 자연조화 문화로 발달했고, 또 자연스럽게 산, 강, 바다, 불, 나무 등을 숭배하는 자연숭배의식으로 발달하게 된 것이다.

나무와 관련된 우리의 정서적 근원은 이처럼 수천년 동안 이 땅에 터잡아 살아오면서 민족의 삶 속에 용해돼 정신적 뼈대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고유의 자연관과 나무의 독특한 특성을 각별하게 인식했던 조상들의 정서적인 여유는 깊이를 더해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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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전영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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