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급속도로 전자 시대에 접어들었다.“본부!”나 “우리∼집”을 외치면 자동으로 전화가 걸린다는 이동전화는 어느새 낡은 것이 되었다. 전자제품 제조업체들은 앞다투어 좀더 편하고 간단하게 켜고 끌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동으로 켜고 끌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아무나 문 앞에 서서 “열려라” 소리친다고 해서 현관문이 열리도록 할 수는 없지 않은가.말로 작동하는 제품을 처음 개발한 회사는 ㄱ사였다. ㄱ사는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신제품 텔레비전을 출시했다. 그 텔레비전은 단순히 켜고 끄는 기능 외에도 채널 선택, 음량 조절 등의 기능을 모두 말로 조정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게으름뱅이를 위한 텔레비전이었다. 그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자 딴 회사들도 서둘러 그런 텔레비전을 내놓았다.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했다. 텔레비전이 시도 때도 없이 켜졌다 꺼졌다 했던 것이다. 아빠가 아들에게 “명태야, 화장실 불 꺼라” 하고 말할 때에도 TV가 꺼졌고, 엄마가 “꼴뚜기 얘, 넌 왜 밤마다 라디오를 켜놓고 자는 거니?” 하고 야단칠 때에도 TV가 켜졌던 것이다. 전화를 걸다가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조용히 못해!”라고 소리치기만 해도 텔레비전은 잠잠해졌다. 어느 집에서는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일이삼사 숫자를 가르쳤는데 숫자가 올라감에 따라 텔레비전 소리가 커진 경우도 있었다. 아이가 열까지 밖에 셀 수 없었던 게 다행이라고 그 엄마는 말했다. 아이가 갑자기 “삼만!”이라고 소리쳤다면 스피커가 터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디오 제조 전문업체인 ㄴ사가 오디오에도 음성 작동 장치를 설치하자,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이번엔 “켜져라” 하고 소리치자마자 텔레비전과 오디오가 동시에 켜지곤 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할 수 없이 각 회사들은 임시 방편으로 명령 앞에다가 제품 이름을 붙여 말하도록 했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 켜져라”나 “오디오 꺼져라”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말이 길어지는 게 문제였다. “텔레비전 채널 11번 소리 10 오전 6시 30분에 자동으로 켜져라.” 이렇게 더듬거리면서 말하느니 차라리 리모컨을 몇번 누르는 게 편하지 않은가.
이보다 더욱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음성 인식 문제였다. 모름지기 자기 집의 물건들은 자기 식구들만 사용하는 게 마음 편할 것이다. 따라서 초기에는 식구들의 음성을 모두 기억했다가 그 음성에만 반응하는 제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음성 인식 기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는 게 문제였다. 감기에 걸리거나 목이 쉬기만 해도 제품들이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모처럼 시골이나 해외에서 온 친척들은 먼저 음성을 기록시켜야 했다. 반면 목소리를 흉내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구관조나 앵무새가 있는 가정에서는 새의 입에 테이프를 붙여놓아야 했다. 집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도 구관조가 텔레비전을 켰다 껐다 장난을 쳤던 것이다. 물론 그 덕분에 빈집털이 도둑을 쫓아낸 집도 몇몇 있긴 했지만.
음성 인식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있었다. 범죄 수사에 이용되는 성문 분석 기기를 이용하면 가능했다. 그렇게 되면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바뀌거나 도둑이 목소리를 흉내낸다고 해도 문제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장치를 전자제품에 설치하기에는 가격이 너무 비쌌다. 성문 대신 시각을 이용하는 장치가 개발되기도 했다. 이 장치에는 정교한 감지 센서가 달려 있어서 눈 홍채의 지문을 통해 집주인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었다. 이 장치의 장점은 시선을 준 제품만 켜고 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사람이 그 장치가 설치된 제품을 마주 보면서 말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가령 깜박 잠에 빠졌다가도 텔레비전을 끄려면 억지로 고개를 들어 텔레비전을 쳐다보아야 했다. 이것은 편하다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긴 하지만, 말로 작동하는 전자제품 개발은 세계적인 추세였다. 물질문명은 결국 인간을 좀더 편하게 하는 것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삶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 아니던가. 더구나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십년 이내에 가정의 모든 제품들이 자동화된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따라서 기업들은 실제로 사용하기엔 불편함이 많을지라도 일단 서둘러 제품을 내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여닫는 것까지 말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말 한번 잘못 했다가 집 안이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사람도 매일 같이 나타났다.
날이갈수록 항의 전화와 팩스가 늘어가자, 정부와 기업은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일 회의가 열리고 온갖 대책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부와 기업은 국내 모든 가정의 모든 제품을 음성으로 제어하겠다는 국가 계획을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은 고속철도 사업에 비견될 국가적인 사업이라고 공포되었다.
기업들은 서둘러 각 제품의 표준 규격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정의 모든 물품을 음성으로 제어하려면 일단 각 제품을 통합 제어할 수 있는 중앙 컴퓨터 시스템이 가정마다 설치되어야 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 컴퓨터 시스템은 시, 군, 기업, 국가 컴퓨터 시스템과 연결되어야 했다. 사생활 침해나 범죄 이용 가능성 등의 부작용이 염려되기는 했지만, 워낙 홈 오토메이션이 세계적인 추세였기 때문에 계획은 무리 없이 진행되어 나갔다.
일단 표준 규격이 만들어지자 가정 내 설치는 순조롭게 이루어져 나갔다. 더구나 전 가정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이루어져, 고도의 첨단 성문 분석 시스템도 저렴하게 보급될 수 있었다.
정부는 일단 텔레비전, 오디오, 전등, 난방 장치, 에어컨 등 쉽게 제어가 가능한 제품만을 대상으로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기업들은 더욱 야심찼다. 일단 경쟁이 붙기 시작하자, 기업들은 세탁기, 청소기 등 모든 가전제품뿐 아니라 창문 여닫기, 화초 물주기, 수족관 물 갈아주기 같은 거의 모든 가정 생활을 자동화하는 장치들을 잇달아 개발했다.
마침내 국가적인 계획이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사용하는 제품의 수에 차이가 있긴 했지만 어느 가정이건 음성으로 작동하는 제품을 하나 이상씩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그 제품들은 아직 작동되지 않고 있었다. 국가 컴퓨터 시스템이 완비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국가 컴퓨터 시스템이 완비될 시기가 도래하자, 정부는 그날을 국경일에 버금가는 축제일로 삼을 계획을 세웠다. 바로 그날 대규모 국민 축제를 벌임과 동시에 전 가정의 제품을 동시에 작동시키기로 했다.
텔레비전에서는 그날을 대비해 각 가정마다 미리 식구들의 음성을 기록하라는 안내를 내보냈다. 불쌍한 모습으로 유명해진 개그맨 이모씨가 매일 저녁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음성을 어떻게 기록하는지 설명했다.
“자, 어려울 것 하나 없어요. 제 말대로 따라 하시면 돼요. 먼저 중앙 컴퓨터를 켜고 음성 녹음이라고 쓰인 버튼을 눌러요. 화면이 나왔죠? 화면에 전등이라고 쓰인 글자를 손으로 살짝 눌러보세요. 녹음하라는 말이 나오죠? 그럼 식구 한사람씩 녹음하면 돼요. ‘전등’ 이렇게요. 그럼 다음부터 전등이라고 말하면 전등이 작동할 준비가 되는 거죠. 그 다음 명령어를 입력하세요. ‘켜져라’도 좋고 ‘번쩍’도 좋아요. 원하는 대로 녹음하세요. 그 다음…”
이모씨는 두달 동안 매일 출연하여 제품 하나하나의 녹음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덕분에 컴퓨터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사람들까지도 어렵지 않게 녹음을 끝낼 수 있었다. 드디어 국가적인 망이 완성될 날이 다가왔다. 정부는 이날을 공휴일로 선포했다. 잠실 대운동장에서는 대규모 축하 행사가 준비되었고, 이 행사는 생방송으로 전국에 중계될 계획이었다.
흥분에 찬 아침 10시. 대통령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짤막한 축하 연설을 끝낸 대통령은 단상에 놓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컴퓨터 시스템이 작동을 시작하면서 각 가정의 컴퓨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제품, 저 물건을 켰다 껐다 시험해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온 국가가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약 한시간 가량 이어지던 소란이 가라앉자, 본격적으로 축하 쇼가 벌어졌다. 유명 가수를 비롯한 연예인들이 차례로 나와 신나는 한 판을 벌였다. 그렇게 한시간이 지난 다음, 이 자동화의 상징처럼 된 사람, 이모씨가 단짝과 무대에 올라왔다. 사람들은 환호성과 함께 열렬히 박수를 쳐댔다. 그들은 인사를 한 후 재치 있는 말을 늘어놓으며 관객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정말 멋진 날이군요.” 이모씨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컴맹 소리를 듣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단짝이 대꾸했다.
“하지만 꼭 이럴 때 초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죠?”
“댁같은 사람들이죠.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한 걸 모르고 작동이 잘 안된다고 신경질을 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소릴 지르죠.”
“어떻게요?”라며 눈을 멀뚱거리며 묻자 이모씨가 소릴 질렀다.
“저 놈의 컴퓨터 모두 박살나버렷!”
그러자 모든 것이 그대로 실행되었다. 갑자기 각 가정의 컴퓨터에 불꽃이 튀면서 모든 물건들이 박살나기 시작했다. 모든 가전제품, 현관 자물쇠, 국가와 기업의 컴퓨터까지도.
모든 컴퓨터에 이모씨의 음성이 녹음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