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엘니뇨 안전지대인가.” 본격적인 겨울철을 앞두고 한국의 기상학계에 새롭게 떠오른 이슈다. 올해 4월 이후 현재까지 열대 동태평양 적도 부근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아져 태평양 연안국에 혹독한 기상재앙을 일으킨 엘니뇨가 이제 한반도에도 ‘마의 손’을 뻗칠지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최근의 언론보도를 지켜보면 올해 겨울 날씨는 엘니뇨 때문에 그리 순탄치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엘니뇨의 영향으로 대기 흐름이 바뀌면서 전통적인 삼한사온(三寒四溫) 날씨가 십한십온(十寒十溫), 즉 열흘 춥고 열흘 따뜻해지는 날씨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춥고 따뜻한 정도는 평년보다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웬만한 사람이라도 올 겨울을 건강하게 지내기 어렵다. 그래서 감기나 폐렴, 심장병과 같이 겨울에 강세를 보이는 질병이 더욱 극성을 부리고, 노인이 급사할 가능성이 높아지리라는 우려가 나왔다. 폭설이 쏟아져 심한 재해가 닥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됐다.
인과관계 불투명
그러나 기상청 관계자에 따르면 올 겨울 날씨를 특징짓는 확실한 사실은 ‘따뜻하다’는 점 한가지뿐이다. 눈이 많이 내릴지, 많이 내린다면 집중적으로 내릴지 여부가 확실치 않다. 무엇보다 날씨가 따뜻하고 눈이 내리는 현상이 엘니뇨 때문에 발생하는지는 아무도 자신있게 얘기할 수 없는 사항이다. 왜 그럴까.
올해의 엘니뇨는 세계적으로 금세기 최대의 기상재앙을 일으킨다고 알려졌다. 엘니뇨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아 홍수와 가뭄으로 심한 몸살을 앓는 지역은 태평양 연안국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재해를 일으키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기상의 변화는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 일어나기 때문이다. 엘니뇨의 발생과정을 정확히 예측하는 기상모델이 아직 개발되지 못한 점이 이를 증명해준다.
따라서 엘니뇨가 한국의 기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더욱 단언할 수 없다. 한반도는 엘니뇨의 직접적인 영향권 밖에 있다는 것이 기상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최근 기상청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엘니뇨가 한국의 기온이나 강수량에 미치는 영향은 20-30% 정도다. 나머지 결정요인은 제트기류, 외국의 화산 분화, 그리고 시베리아 일대의 적설량과 같은 다양한 요소로 구성된다.
이 요인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결과적으로 어떤 날씨를 가져다 줄지 예측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삼한사온이나 십한십온과 같은 말은 과학적 근거를 잃는다. 기상청 관계자 역시 “십한십온이란 말은 언론에서 과장해 보도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올 겨울의 따뜻한 날씨는 어떻게 봐야 할까. 최근 10여년 간 엘니뇨가 발생한 횟수는 4회다. 하지만 작년을 제외하고 한국의 겨울 날씨는 대체적으로 따뜻했다. 엘니뇨가 발생했을 때나 그렇지 않았을 때나 별다른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엘니뇨가 커다란 이슈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한반도 주변의 자연재해가 대부분 ‘엘니뇨 탓’으로 돌려지기 때문이다. 한 예로 인도네시아에서 산불이 3개월째 꺼지지 않는 이유가 엘니뇨의 영향 때문이라는 설명이 제기됐다. 더욱이 올 여름 중국 남부와 북한을 강타한 극심한 가뭄이 엘니뇨 때문에 발생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물론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그렇다 해도 “바로 인근에 위치한 한국이 안전지대일 수 있겠는가” 하는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집중적인 주의를 모은 계기는 지난 11월 12일 오후 기상청연수원 강당에서 열린 엘니뇨워크숍이었다. 한국에 엘니뇨가 미치는 효과를 공식적으로 진단하는 첫 자리인 만큼 언론의 큰 관심을 끈 자리였다.
하지만 워크숍에서 논의된 내용은 문제를 더욱 모호하게 만든 느낌이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엘니뇨로 인해 한국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엘니뇨가 발생한 이듬해에 장마가 늦게 발생하거나 일찍 생겨 농작물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하지만 아직 자신있게 장담하기에는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는 점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애매한 가설의 연속
애매한 결론이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곧바로 엘니뇨의 파급효과가 금방 다가올 것만 같은 느낌이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진행된다면 한반도는 올 겨울 심각한 파경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기상청은 구체적인 대책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가령 지난 10월 만들어진 엘니뇨대책반(8명)의 구성을 대폭 확대하거나, 정부 내 긴급 상시대책반을 설치해 엘니뇨의 피해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국민에게 충분히 홍보하고 장기적인 연구 프로그램을 수행할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 범 정부부처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논의할 기구를 만드는 일도 한가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워크숍은 불안감과 모호함을 가중시켰을 뿐 속시원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느낌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올 겨울의 모든 기상 이상현상은 엘니뇨 탓으로 돌려질지 모른다.
재해가 발생하건, 반대로 다행히 별다른 피해가 없건 모두 엘니뇨 때문이라는 무책임한 해석을 국민은 계속 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차가운 겨울을 앞둔 시점에서 기상청의 명확한 입장 표명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