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3. 백만군중에서 범인 한명을 순식간에 체포

소재

생체는 에너지, 환경, 식량, 보건 등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훌륭하게 대처하는 방안을 이미 확보하고 있는 가장 우수한 시스템이다. 따라서 이를 모방해 새로운 기능성 소재와 물질을 창출한다면 현대 문명의 흐름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들판에 널려 있는 돌을 이용하던 인류는 광석으로부터 구리를 분리하는 기술을 확보했다. 이렇게 시작된 청동기 시대는 이후 철을 분리하는 기술에 의해 철기시대를 열었다. 이같은 일련의 흐름을 살펴볼 때 인류의 역사는 새로운 소재의 개발로 이어져왔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현대에도 한 나라의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은 각종 군사 장비의 제작에 소요되는 소재를 비롯해, 반도체와 초전도체와 같은 전기 소재, 항암제와 같은 의약품, 우라늄과 같은 에너지 소재 등 각종 신소재와 신물질에 대해 얼마나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앞으로도 에너지, 환경, 식량, 보건 등 인류가 봉착할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신소재와 신물질을 고안하고 제작하는데 과학기술이 큰 공헌을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인류의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소재와 물질을 먼저 확보하는 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지도적인 역량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환경 문제도 일시에 해소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분자로 구성돼 있다. 분자보다 작은 단위인 원자와 소립자는 고도로 통제된 환경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매우 불안정한 것이므로 새로운 기능을 가진 소재와 물질은 분자 차원에서 탐색해야 한다.

분자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측면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는 화학이다. 이 때문에 신소재와 신물질을 발견하는데 필요한 돌파구는 화학자에 의해 열리고, 이를 응용해 생물학, 공학, 의약학, 농학 분야의 연구자들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강구한다.

새로운 기능을 가진 분자를 설계하는 작업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아무런 선례가 없는 새로운 물질을 창출하기보다는 자연계에 이미 존재하는 시스템 중에서 힌트를 얻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으로 등장한다. 생체는 에너지, 환경, 식량, 보건 등의 문제점에 대해 훌륭하게 대처하는 방안을 이미 확보하고 있는 가장 우수한 시스템이다. 생체를 모방해 새로운 기능성 소재와 물질을 창출하는 작업은 날로 주목받고 있다.

예컨대 식물이 태양 에너지를 사용해 탄산가스와 물을 원료로 탄수화물을 합성하는 원리를 파악하고 이를 모방, 인공적으로 탄수화물을 제조하는 방법을 고안한다고 가정해보자. 녹말을 공장에서 제조함으로써 식량 문제는 단번에 해결되며, 탄산가스를 대기 중에서 쉽게 제거할 수 있어 온실 효과에 의한 지구 온난화를 방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장 깨끗한 에너지인 태양 에너지를 활용하는 실용적인 방안이 도출될 것이기 때문에 석탄과 석유와 천연가스의 연소로 인해 야기되는 현대 문명의 각종 문제점이 해소된다.
 

분자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인 화학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시스템에서 힌트를 얻는 것에서 출발해 새로운 소재와 물질을 개발한다.


두 손 묶고 옥수수 먹기

생체를 모방해 설계되는 기능성 소재의 예로 효소를 모방해 제작하는 촉매를 들 수 있다. 모든 생명 현상은 화학반응의 결과로 일어난다. 화학반응이 생체가 처한 환경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행되는 것은 효소라는 촉매가 생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석유화학 제품을 비롯한 각종 화학공업의 공정에도 촉매가 필수적으로 개입한다. 화학 공정은 높은 온도와 높은 압력, 혹은 유기용매 등 가혹한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생체 반응은 물을 용매로 사용해 온화한 조건에서 진행된다. 생체 반응은 불필요한 부산물을 최소한으로 생성하므로 자원의 낭비와 폐기물의 처리와 같은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효소는 생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에만 관여하기 때문에 생체와 직접 관련이 없는 물질을 처리하는 데는 별로 쓸모가 없다는 실용성의 한계가 있다. 실용적인 용도와 직접 관계가 있는 화학반응에 대한 촉매를 생체 모방의 방법으로 고안하는 것이 인공효소 분야가 안고 있는 과제라 할 수 있다.

효소의 작동 원리는 옥수수를 먹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공중을 날아다니는 옥수수가 어쩌다 이에 부딪칠 때 얼른 베어먹는 우스꽝스러운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리고 이 장면을 두손으로 옥수수를 잡아 입 속에 넣은 뒤 송곳니로 베어 먹는 것과 비교해보자.
날아다니는 옥수수를 베어 먹는 과정은 단순한 화학 반응에 비유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두손으로 잡고 옥수수를 입속에 가두는 것은 효소 활성자리에 반응 기질을 결합시키는 것에, 송곳니로 옥수수를 자르는 것은 활성자리 속에 위치한 촉매 작용기가 기질을 공격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효소 반응의 원리를 모방해 촉매를 인공적으로 제작하려면 우선 기질을 결합할 수 있는 결합 부위를 설치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결합 부위 주변에 촉매 작용기를 부착시켜야 한다. 기질이 옥수수에 해당되고, 결합 부위는 입 속이 되며, 촉매 작용기는 송곳니에 해당하는 것이다.

생체는 신진대사, 호흡, 운동, 사고, 유전, 생식, 노화, 질병 퇴치 등 각종 생명 현상을 꾸려 나가는 일을 효소라는 촉매를 사용해 처리하고 있다. 따라서 효소만큼 효과적인 인공효소를 인간이 자유 자재로 만드는 것은 과학자들의 꿈일 뿐,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효소보다 훨씬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인공효소는 인류가 겪게 될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소중하게 쓰일 수 있다.

이미 원시적인 형태의 인공효소를 사용해 악취를 없애는 등 생활 소재로 상품화된 사례가 있고, 필자의 실험실에서도 단백질의 절단 등 실용화 단계에 근접한 인공효소를 개발한 사례가 있다.
 

바닷물 속에서 우라늄만을 분리할 수 있는 인공 항체가 개발된다면 인류의 에너지 문제는 단숨에 해결된다.


바닷물에서 우라늄을 분리하는 항체

생체모방 첨단소재의 또 다른 예로 인공항체를 들 수 있다. 항체는 생체에 침입하는 이물질인 항원과 결합해 독성을 제거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항체는 수많은 자체 물질과는 결합하지 않고 외부에서 침입한 물질만 선택적으로 인식해 강하게 결합한다. 여의도 광장에 모인 백만 군중 중에서 범인 한 명을 신속하게 잡아내되, 다른 군중 어느 한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항체의 작동 원리를 모방해 필자의 실험실에서는 바닷물에서 우라늄을 분리하는 인공항체를 고안하고 있다. 우라늄은 ppb(10-9)단위로 바닷물에 녹아 있어 그 농도가 매우 낮다. 하지만 지구의 바다 전체에 녹아 있는 우라늄의 양은 지구 땅껍질에 묻혀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바닷물 속의 우라늄을 효과적으로 분리할 수 있고, 핵발전소의 방사성 폐기물의 안전한 처리 방법이 고안된다면 인류의 에너지 문제는 영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많은 물질 중에서 우라늄만을 골라내는 것은 백만 군중 속에서 범인 하나를 순간적으로 잡아내는 것만큼 어렵지만, 생체 내의 항체를 모방함으로써 해결책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1997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서정헌 교수

🎓️ 진로 추천

  • 화학·화학공학
  • 생명과학·생명공학
  • 환경학·환경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