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과 그릇의 평범한 만남은 획기적인 측정기기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태종우의 전설
'음력 5월 초열흘(금년의 경우, 양력으로 6월 13일)에는 매년 비가 오신다'. 이는 조선시대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전설이다. 전설이니까 무슨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실제로 꼭 비가 온 것도 아니다. 그러나 7월 칠석날처럼 비오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금년에도 약간 비를 뿌렸다. 이 비를 조선시대 사람들은 태종우(太宗雨)라 했다. 3대 임금이었던 태종이 가뭄을 걱정하던 나머지 죽으면서 비오기를 축원하였는데, 과연 비가 내렸다. 저승에 가면 자기가 죽은 날만이라도 비를 오게 해 보겠다는 유언대로 그가 죽은 날인 5월 10일에는 늘 비가 온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비가 오신다"고 표현했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오신다'고 했을까? 우리나라의 봄가뭄은 예나 지금이나 늘 농사짓는 사람들의 애를 태웠다. 실제로 가뭄은 거의 매년 겪는 절박한 자연현상이었다. 알맞게 비가 오느냐 안오느냐에 따라서 풍년이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가뭄에 대한 태종의 걱정은 유난스러웠다. 그는 가뭄이 있으면 하루에 식사를 한번으로 줄이고 대궐 뜰의 뙤약볕에 나아가 며칠씩이나 스스로를 반성하곤 했다. 기상현상을 하늘이 내리는 재이(災異)라고 믿던 시대였기에 임금은 하늘의 꾸짖음에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쳐야 했던 것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봄에 가뭄을 걱정하는 기사와, 왔다하면 쏟아지는 큰 비가 피해를 준 기사가 교차되고 있다. 가뭄을 걱정하다가 반대로 비를 걱정하게 되는 일이 한두번이 어니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강우(降雨)의 자연현상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비를 염원하면서 죽은 태종 임금의 넋이 하늘에 가서 비가 오도록 했다는 전설에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절실하고 소박한 마음씨가 담겨 있다.
●―측우기를 만들다
조선초기 한반도에는 매해 심한 가뭄이 거듭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왕조 정부는 농사철에 대비, 각도와 군·현의 관청에 지시하여 빗물이 땅속에 스며든 정도를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강우량을 파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왕조에서 시행되던 강우량의 측정법은 대체로 땅 속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자로 재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주로 봄에서 초여름의 농사철에 행해졌다.
그러나 땅이 말랐느냐 젖었느냐에 따라 빗물이 스며드는 깊이에 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이 방법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세종 23년 봄에는 오랜 가뭄과 큰 비가 번갈아 기승을 부려 그때까지의 강우량 측정법을 완전히 무색케 했다. 그 결과 빗물을 어떤 크기의 그릇에 받아 재면 될 것이라는 과학적인 아이디어가 싹트게 되었다.
세종의 아들인 문종이 생각해 냈다는 이 기막힌 아이디어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얻어졌다. 어쩌면 비오는 날 장독대에 놓인 항아리에 괴는 빗물을 보고 착안해 낸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인의 집에는 어디에나 다 있는 장독대 김치독 장독 항아리들이 아이디어의 소재였던 것이다. 아무튼 빗물과 그릇의 만남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측정기기(機器)를 탄생케 하였다.
측우기는 1441년(세종 23년) 8월18일의 '세종실록' 기사에 의하여 그 발명이 공식 확인된다. '실록' 권 93, 22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호조(戶曹)에서 각도 감사(監司)에게 강우량을 보고하도록 지시하고 있으나 땅이 말랐느냐 젖었느냐에 따라 땅 속에 스며드는 빗물의 깊이가 같지 않아 그것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합니다.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를 만들고, 대 위에 깊이 2자, 지름 8치의 철기(鐵器)를 주조하여 놓고, 빗물을 받아 본관원에게 그 깊이를 재어서 보고하게 하소서. 또한 외방(外方) 각 관에서는 경중(京中) 주기(鑄器)의 보기에 따라 자기(磁器)와 와기(瓦器)를 써서 객사 뜰에 놓아 두고 수령이 물의 깊이를 재어서 감사에게 보고케 하여 감사가 전문(傳聞)하도록 하소서. 호조에서 이렇게 아뢰니 임금도 그에 따랐다."
'세종실록'의 이 기사는 측우기가 왜 만들어져야 했으며, 어떻게 만들어 어디서 측정했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정말 역사적인 기록이다.
그때까지의 불완전했던 강우량 측정법을 개선하기 위해 깊이 2자(약 42.5㎝), 직경 8치(약 17㎝)의 원통형 우량계를 발명, 과학적으로 해결해 낸 것이다. 자연현상을 기기(機器)를 써서 수량적으로 측정하는 과학적인 방법이 시작되었다는 이 사실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15세기 전반에 조선왕조에서 이루어진 이 발명은 과학적인 농업기상학의 성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기상학의 새로운 장(章)을 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실록의 기사는 높이 2자 지름 8치의 철제 원통형 측우기를 만들어 빗물을 받아 그 수심(水深)을 잰다는 기본적 방법을 제시·확정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자(尺)로 언제 어떻게 잰다는 더 구체적 측정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시행하는 작업은 다음해 봄에 이루어졌다. 1442년(세종 24년) 5월8일의 일이다. 그날의 '세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수교(受敎)한 바 있으나 미진한 곳이 있어 조례를 다시 구신하나이다.
경중(京中)에서는 철을 부어서 그릇을 만들어 측우기라고 명명하였읍니다. 측우기는 길이 1자(尺) 5치(寸), 직경 7치로 주척(周尺)을 쓰고 있읍니다. 서운관에 대를 만들어 그 위에 측우기를 놓고 비가 그쳤을 때마다 본관 관원이 강수상황을 직접 관찰케 합니다. 주척으로 수심을 측정하고 강수 및 비가 갠 날과 시각, 그리고 수심의 자·치·푼(分) 수를 정확히 재 즉시 보고하게 하고 기록해 둘 것입니다.
지방에서는 각 도·군·현의 객사 뜰에 두어 수령이 직접 강수량을 치·푼까지 측정하여 보고케 하고 있습니다."
●―2㎜까지 측정해
측우기(測雨器). 처음으로 나타난 빗물을 재는 그릇, 즉 우량계의 이름이다. 그 전해 가을에 만든 측우기에 미진한 곳이 발견되어 개량하고 측정제도를 확정하면서 지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측우기의 발명 시기를 1442년 5월 8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1441년 8월 18일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1년전 가을에서 이듬해 초여름에 이르는 사이, 측우기에는 몇가지 중요한 개량발전이 있었다. 무엇보다 빗물을 받아서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기의 이름을 '측우기'라고 지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다. 그리고 그 크기가 처음 만들었던 것보다 조금 줄었다. 특히 깊이가 직경에 비해서 많이 줄었다. 한번에 내리는 강우량이 깊이 32㎝, 직경 15㎝ 정도의 원통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측정방법을 명백하게 규정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첫째 강우량은 비가 그쳤을 때 잰다. 둘째 자는 주척(길이 약 21.3㎝)을 쓴다. 셋째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일시와 갠 일시를 기록한다. 넷째 수심은 자·치·푼까지 정확하게 잰다는 등이다.
이 제도는 거의 완벽하다. 강우량을 푼까지 재므로, 지금의 단위로 보면 약 2㎜ 단위까지 측정되는 셈이다. 측정오차는 자를 따로 쓰는 데서 생기는 부피의 증가 정도이다.
강우량을 재는 과학적인 방법이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도 아직 싹트기 전에 동방의 작은 반도에 자리잡은 조선왕조에서 확립되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가뭄을 걱정하고 농사짓기에 충분한 양의 비가 왔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절실한 마음과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도 평가할만 하다.
이때부터 조선에서는 측우기로 강우량을 측정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측정된 강우량은 제대로 집계되고 각지방의 통계는 중앙에 정기적으로 보고되었다. 그 결과 전국의 강우량이 정확히 기록 보존되었다.
강우량은 농업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특히 벼농사를 많이 짓는 한국의 경우, 그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다. 게다가 1년 강우량의 절반이 여름 3개월에 와버리는 한반도의 자연 조건 하에서 강수량의 통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측우기를 써서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일은 세종 때 이후 1백년여년 동안 잘 시행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엔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특히 임진왜란의 참화로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 측정의 전통은 끊어지고 말았다. 거의 모든 측우기가 없어졌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전기의 측우기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다시 시작하다
그러나 숙종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천문학을 비롯한 과학의 새로운 기운은 영조 때에 이르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잊혀지고 있던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 측정의 절실함과 그 과학적인 이치가 새삼스럽게 제기되었다. 그것이 '세종실록'에 의해 되살아난 것이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세종조의 옛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만들도록 명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실록' 가운데에 측우기에 대한 조항을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일어나 앉게 된다. 요즈음은 비록 비를 비는 시기는 아니나 수표의 상황을 보고케 하여 그 얕고 깊음을 알고자 하는데, 이 기기에는 지극한 이치가 있으며 또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다. 이 제도에 따라서 서운관으로 하여금 이를 만들어 8도에 놓게 하고 양도(兩都)에도 이를 만들어 놓게 하다. 지금도 그 예를 따라 경희궁과 창덕궁에 모두 측우기를 설치하라. 옛날에 바람 불고 비올 때마다 명하여 자세히 살피게 한 선성(先聖)의 뜻을 체념(体念)해 볼 때,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바람과 비가 순조로운 것은 나라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지금의 이 명령 또한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영조 46년(1770년) 5월1일에 마침내 새 측우기가 다시 등장했다. 그것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규격은 세종 때의 것과 같았다. 대에는 측우대(測雨臺)라 새기고, 만든 연월을 새겨 놓았다. 지금 중앙기상대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 그때 만든 측우대 중의 하나이다.
이때 부활된 측우기의 제도는 다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정조실록'에는 정조 16년(1792년) 이후 8년간의 강우량 통계가 기록되어 있다. 정조23년(1799년) 5월의 기사에는 전년의 같은 달인 5월 한달 동안의 강우량과 그해 5월의 강우량을 비교해 놓았다. 이는 월별 통계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측우기는 정조 6년(1782년)에도 만들어졌다. 지금 여주의 세종대왕릉의 전시실에 보존되어 있는 기념비적인 대리석 측우대는 그때 만든 것이다. 이 측우대에는 세종 때에 측우기를 만들게 된 깊은 뜻이 새겨져 있다. 즉 가뭄을 걱정하던 임금의 간절한 마음을 엿보게 한다. 또 영조 때에 그 뜻을 이어 받아 그 제도를 다시 정비한 경위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정조가 가뭄을 염려하여 비 오시기를 비는 마음으로 이 측우기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명문을 4면에 조각하고 있다.
한편 국립과학관에 있는 1811년의 측우대는 순조 때에도 측우기가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기록에 의하면 그 해에도 봄에 가뭄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여기서도 측우기가 가뭄의 해소를 하늘에 호소하는 상징적인 기기였음을 엿보게 한다. 측우기를 제조, 측우대에 올려놓고 비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위정자들의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세종 때부터 측우기는 수없이 만들어졌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오직 하나만이 남아 있다. 국립기상대에 보존되어 있는 1837년의 청동제 측우기가 그것이다. 공주 감영에서 만든 이 측우기도 십여년 전에 일본기상청에서 되돌려 받은 것이다. 1920년 초의 보고에 의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영조 때의 것이 3개(측우기와 측우대가 함께), 공주 감영 제작의 측우기와 대석, 그리고 정조 때의 것등 여러 개가 있었다.
그러나 이 귀중한 과학문화재는 서구 과학 기술문명의 거센 바람 속에서 우리 민족이 '자기 것'을 스스로 귀하게 여길 줄 모르고 지내던 사이에 버림받고 천대받아 소리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필자는 1980년대 초에 영국 런던의 과학박물관 기상학 전시실에서 받았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중앙전시장 한가운데에 한국의 측우기와 측우대의 모조품이 당당한 모습으로 전시된 것을 보고 가슴이 벅차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에는 그 어느 곳에도 측우기가 제대로 전시돼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