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34년 여름. 길동이 가상현실을 헤매다 나오자마자 전화가 왔다. 꺽정이었다.
“우리집에 와. 드디어 방학숙제를 끝냈어.“
“말도 안돼.”
길동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자신은 숙제를 하기 위해 일주일째 가상현실을 떠돌고 있는데 말이나 되는 소린가.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 이것이 숙제였다. 성적은 착상이 얼마나 새롭고 기발한가에 따라 매겨졌다. 좋은 점수가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웬만한 착상들은 인터넷의 ‘기발한 생각을 하는 모임’에 가면 다 있으므로 새로운 착상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작년 겨울 숙제는 원자력 발전소 폐기물을 처리하라는 거였다. 길동은 “태양에 날려보내 태양의 에너지원으로 쓴다”라고 했다가 낙제점수를 받아야 했다. 상상력이 전혀 없대나. 반면 꺽정은 최고점수를 받았다.
“학교에 보냈냐?”
“아직. 완전한지 확인을 덜 했거든.”
“맞아. 숙제는 철저하게 해야 돼. 애들은 그걸 잘 모른단 말이야.”
길동은 서둘러 꺽정의 집으로 갔다. 길동이 헉헉대며 들어가자, 꺽정은 작은 유리 상자를 꺼냈다. 길동은 무턱대고 탄성을 질렀다.
“와, 놀라운데? 여기에 플라스틱을 넣으면 깨끗하게 분해된다는 거지?”
“단순하기는. 이게 순간이동장치인 줄 아니? 확대해 보라구.”
상자를 확대기 밑에 넣자 화면에 뭔가 나타났다.
“소 아니야? 어디서 났어?”
“물론 내가 만들었지. 플라스틱을 먹는 미생물하고 소를 유전자 조작해서 창조해낸 거야.”
“저게 풀이 아니라 플라스틱을 뜯어먹는다는 거야? 저걸 실용화하려면 개미 군단만큼 있어야겠다?”
길동이 ‘별거 아니구나’ 하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꺽정은 길동의 반박이 열등감 때문이라는 걸 다 안다는 듯,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상자에 넣었다.
“잘 보시라.”
소가 느릿느릿 걸어가더니 자기 몸보다 큰 플라스틱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길동의 입이 딱 벌어졌다. 소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때? 먹는 만큼 몸이 불어나. 그것뿐인 줄 아냐? 플라스틱만 먹는다구. 이걸로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는 완벽히 해결된 거지.”
“기막힌데? 너 백 점 맞겠다. 한 마리 더 없니?”
길동이 자존심을 잊은 채 묻자, 꺽정은 길동의 어깨를 툭툭 쳤다.
“기다려. 나중에 대가족 만들면 하나 분양해줄께.”
이제 눈으로 보일 만큼 커진 소가 먹이를 더 달라는 듯 꺽정을 쳐다보았다. 길동은 속이 쓰렸다. 순간 속쓰림을 잊게 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난지도로 가서 시험해 보자. 얼마나 잘 먹는지 확인해야잖아.”
“글쎄…. 그러다 잃어버리면?”
“걱정마. 소가 빠르면 얼마나 빠르겠니.”
이번엔 길동이 꺽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둘은 난지도 생태공원으로 갔다. 방학이라서 그런지 공원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생태공원을 지나 쓰레기 전시장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굴을 파서 20세기의 쓰레기들을 자연 그대로 전시해놓은 곳. 그들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멈췄다.
꺽정이 소를 꺼내놓자, 소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발 밑에 삐죽 튀어나온 플라스틱을 먹기 시작했다. 겉에 묻은 오물을 발과 혀로 떨어내면서.
“정말 플라스틱만 골라먹네? 너무 편식하면 좋지 않은데.”
“얼마나 먹을까?”
“배가 부르면 그만 먹겠지.”
길동이 진리라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소의 식욕은 끝이 없는 듯했다. 소는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쉬지도 않고 먹어댔다. 그러면서 소는 손톱만한 크기에서 주먹만한 크기로, 강아지만한 크기로 자라났다. 둘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너무 커지는 거 아냐?”
“맞아. 그만 먹여야겠다.”
꺽정이 소를 껴안자 소는 더 먹겠다고 몸부림쳤다. 소의 근육은 놀랄 만큼 탄력이 있었고 힘도 여간 아니었다. 길동까지 달려들어 소의 네 발을 움켜쥔 후에야 가까스로 소를 붙잡을 수 있었다. 소는 체념한 듯 가만있었다. 하지만 전시장을 나오자 갑자기 소가 급격하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광우병 걸린 거 아냐? 왜 이리 사납지? 놓칠 것 같아.”
말이 끝나자마자 소가 길동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 바람에 꺽정도 손을 놓았고, 소는 재빨리 전시장 속으로 달아났다. 둘은 서둘러 쫓았지만 잡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굴이 여기저기 나 있는 바람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었다. 꺽정은 털썩 주저앉았다.
“망했구만. 저걸 어디서 찾아?”
“걱정마. 내일이면 찾을 수 있어. 내가 장담하지.”
길동이 손에 쥔 소털을 들여다보며 확언했다. 곧 공원 문닫을 시간이 되어 둘은 그대로 돌아와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 길동은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화면을 틀자 꺽정이 허둥대며 말했다.
“TV 켜봐. 난리 났어.”
길동은 느릿느릿 TV를 켰다. 쓰레기산이 폭삭 주저앉은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 거대한 소가 서 있었다. 거의 십층 높이였다. 쓰레기 뒤지기가 귀찮아졌는지 소는 공원을 돌아다니면서 플라스틱을 삼키고 있었다. 차 한대가 그대로 입속으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 고철만이 뱉어졌다. 길동은 흐뭇한 표정으로 화면을 지켜보았다. 반면 꺽정은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 있었다.
“마취총도 소용없대.”
이어서 전문가들이 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나왔다.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우선 앞다리를 묶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소는 원래 유순한 동물이므로….”
“이런 생물이 나올 가능성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유전자 키트로 장난들을 합니다. 도대체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없어요.”
“학술적 가치를 먼저 따져보아야 해요. 저건 옛날에 쇠를 먹고 자랐다는 불가사리와 비슷하거든요. 그 옛날에도 유전공학이 발달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어요.”
이제 소는 공원 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었다. 경찰은 소를 사살하기로 결정했다. 경찰들이 조준을 하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일제히 총성이 울렸다. 하지만 소는 멀쩡했다. 총알이 소의 피부를 전혀 뚫지 못한 것이다.
“피부가 강화 플라스틱인가 보군요.”
한 전문가가 말했다.
경찰이 실패하자 군대가 동원되었다. 박격포가 발사되었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화염 방사기도 동원됐지만 털도 그을리지 못했다. 전문가가 다시 말했다.
“내화 플라스틱이 분명합니다.”
소는 이제 20층 높이로 커져 있었다. 소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로가 내려앉고 땅이 흔들렸다. 건물들도 소의 몸에 부딪혀 무너졌다.
갖가지 대책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자, 통신망을 통해서 대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그 중에서 가능성이 높은 해법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소를 용해시킬 수 있는 화학약품이 들어 있었다.
즉시 기술자들이 모여 용해액을 만들어냈다. 산불 진압용 헬기들이 그것을 들고 소 위로 이동했다. 잠시 후 신호가 떨어지자 용액이 일제히 소의 몸으로 쏟아졌다. 소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의 몸이 서서히 녹아 내렸다.
저녁이 되자 공원은 액체 플라스틱 호수가 되어 있었다.
“정말 확실한 플라스틱 재생법이군.”
길동이 중얼거렸다.
“이유를 알았어.”
“무슨 이유?”
“소가 그렇게 커진 이유. 자세히 보니까 그 소에는 배설기관이 없었어. 그래서 먹는 게 전부 몸에 쌓였던 거야.”
“그래서 새 소를 만들기로 했냐?”
“벌써 만들었어. 그런데 진짜 소와 똑같아. 배부르면 그만 먹더라. 1밀리 자라는데 열흘 걸렸어.”
“그게 정상이지 뭐.”
사회 혼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꺽정은 높은 점수를 받았다. 정말 놀라운 생각이라는 평가였다. 그 뒤에서 길동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만점이었다. 길동의 소를 녹여 플라스틱 호수를 만들자는 생각이 매우 독창적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