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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야독 유학으로 키운 엔지니어 꿈 38년

대림엔지니어링 회장 김병진

 

김병진 회장.


1932년생. 서울대 화공과, UC버클리대 화공과, 뉴욕대 대학원 기계공학과 졸. 한국화학공학회 회장, 한국 플랜트엔지니어링협의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철탑 및 은탑 산업훈장을 수상했다.
 

1974년 대림엔지니어링이 설립될 때 동료들과 함께 미국 캐탈리틱사에 파견돼 엔지니어링 관련 실무 연수를 받던 시절(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필자).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아 6.25동란이 발발했다. 모두가 부산 피난길에 오르고, 부산에 마련된 판잣집 대학에서 필자는 공학도의 열정을 불태웠다. 하지만 학교시설, 교과서, 교수진 할 것 없이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그냥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여고 수학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우연히 미군장교부인회에서 한국 유학생을 파격적인 조건에 유치한다는 게시문을 보게 됐다. 전쟁 때문에 못다한 공부를 할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해 즉각 응시했다. 그러나 후원자였던 스탠포드대학 의대 교수집에 여장을 푸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유학 프로그램은 미군 장교부인들이 전쟁 후 한국의 참상을 보고 젊은 기능공을 데려다가 집안일도 시키면서 야간에 직업교육을 시켜 한국의 어려움을 일부나마 덜어주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서로의 이해부족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끊임없이 공부하게 해달라는 필자를 후원자인 의대교수는 자기 보증으로 돈을 빌려 UC 버클리대에 진학시켜 주었다.

밤에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고 낮에는 숙제가 많기로 유명한 미국대학 학부과정 공부에 매달리면서 기진맥진했지만, 정말 공부다운 공부를 한다는 것이 매우 기뻤다. 또 어릴 적의 꿈이었던 ‘조국의 공업입국’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점만으로도 감지덕지(感之德之)할 따름이었다. 결국 대학을 두번 졸업하게 됐다.

1958년 미국의 아이오스터 휠러사에 취업한 것은 화공플랜트를 건설하려면 엔지니어링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엔지니어로 첫발을 내딘 지 38년 동안 줄곧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필자의 세대보다 훨씬 풍요롭다.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좋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보다 강인한 의지의 실천으로 한국을 빛낼 훌륭한 과학도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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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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