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상이 유인원일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사람들은 화석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양파껍질을 벗기듯 조심스럽게 바위를 분해해 인류화석을 끄집어냈다. 지금까지 중요한 화석을 발견했던 화석사냥꾼들을 만나보자.
지난해 12월 메리 리키라는 위대한 여성 고인류학자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20살에 아프리카에 뛰어들어 84세까지 그곳에 살면서 인류의 기원을 밝혔다. 1959년 탄자니아 올두바이 계곡에서 최초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는 바로 그녀의 업적이었다. 그 인류 화석의 이름은 '진자'(아랍어로 동아프라키를 뜻함)로 큰 어금니 때문에 '호두까는 사람"이란 별명도 얻었다.
고인류학을 개척한 리키 가족
메리 리키(결혼 전 성(性)은 니콜)는 1913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제대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림 솜씨가 탁월했다. 그녀는 영국의 신석기 유적 발굴에 참여해 고고학 유물들을 복제한 듯 그려내기도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그녀는 1933년 탄자니아 인류화석 발굴에 참여할 수 있었다. 20세기의 꽃다운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은 고인류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루이스 리키였다.
루이스 리키는 1903년 케냐에서 영국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영어보다 케냐 키쿠유족의 말을 먼저 배웠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곧바로 아프리카로 돌아와 고고학을 연구했다. 메리를 만났을 때 그에겐 별거 중인 아내와 두 아이가 있었다. 결국 고고학을 좋아하는 메리와 사랑에 굶주린 루이스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36년 그들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는데, 이로 인해 '리키 가족'이라는 유명한 고인류학 가(家)가 탄생했다.
1947년 메리는 유인원과 초기 인류의 공동조상으로 다소 유인원 쪽에 가까운 프로콘술 아프리카누스의 두개골을 발견했다. 또 그녀는 1959년 '진지'라는 보이세이 화석을 최초로 발견했다. 진지는 1백80만년 전 화석으로 판명됐으며, 그때까지 발견된 화석 중에서 가장 연대가 확실한 것이었다.
별로 큰 성과를 내지 못했던 루이스는 1962년 가족들과 함께 호모 하빌리스 화석을 탄자니아 올두바이 계곡에서 최초로 발견했다. 처음 호모 하빌리스 화석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제기됐지만, 1972년 케냐 쿠비포라에서 둘째 아들 리처드는 완벽한 호모 하빌리스(KMN-ER 1470)를 발견해 아버지에게 쏟아지는 의혹들을 벗겨내주었다. 부서진 뼈조각은 리처드의 아내인 미브가 완벽하게 복원해냈다. 이것은 뼈조각이 너무 많아 모든사람이 손 든 것이었다. 루이스는 아들이 발견한 화석으로 인해 자신이 그동안 주장했던 호모 하빌리스의 존재가 입증되는 것을 보고 1972년 눈을 감았다. 그후 메리는 또 다시 라에톨리에서 아파렌시스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66세였다.
리처드 리키는 1944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루이스와 메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늘 옛날 뼈화석만 만지는 집안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인류학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거부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대신 사냥 안내원이 됐다. 그러나 운명은 거역할 수 없었다.
프랑스가 에티오피아 옴모강 유역에서 인류화석을 조사할 때 아버지의 권유로 케냐팀을 이끌게 된 것이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팀장을 맡았지만 리처드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어릴 적 부모의 어깨 너머로 배운 고고학 지식과 사냥 안내원 시절 터득한 지리 감각으로 그는 쿠비포라라고 하는 고인류학 보고를 발견했다. 쿠비포라에서는 2백30명에 해당하는 4백여개의 인류화석이 나왔다. 현재 리처드는 정치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케냐의 야당인 사피나당에서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그가 최근에 쓴 책으로는 '인류의 기원'(동아출판사)이 있다.
고인류학의 여명
1859년 영국의 생물학자 다원(1809-1882)은 '종의 기원'을 펴낼 때 인간이 유인원(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으로부터 진화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기원과 진화에 대해 조명해봐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종의 기원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와 다른 사람의 뼈가 다윈의 저서가 출판되기 3년 전에 발견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네안데르탈인은 1856년 독일의 네안더계곡 채석장에서 과학교사인 JC풀로트에 의해 발견됐다. 네안데르탈인은 현대인의 두개골에 비해 두꺼웠고, 눈두덩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인의 두개골이 변형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 최고의 해부학 지식을 가진 독일 과학자들조차 네안데르탈인은 병이 들거나 머리에 타박상을 입은 현대인의 두개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이 인간의 조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1868년 프랑스에서 크로마뇽인을 발굴해냈다. 하지만 크로마뇽인은 3만5천년 전-1만년 전에 살았던 사람으로 현대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류 진화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한 사람은 네덜란드 해부학 교수인 유젠 뒤부아(1858-1940)였다. 그는 1893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50만년 전의 원인(猿人)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진화론을 굳게 믿었던 그는 사람의 조상을 발견하려면 유인원이 많이 사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중에서도 사람과 가까운 오랑우탄이 살고 있는 수마트라를 주목했다.
탐사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뒤부아는 군의관을 자원해 수마트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2년동안 수많은 동굴을 뒤졌지만 그는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말라리아에 걸려 자바로 이송됐다. 여기서 그는 호모 에렉투스인 자바원인을 발견했다. 자바원인은 인류의 조상을 50만년 전으로 끌어올렸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과열된 관심은 '필트다운인 사건'이라는 헤프닝을 엮어내기도 했다. 그때까지 발견된 화석들은 유인원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유인원의 특징을 가진 인간 화석을 목말라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필트다운인이다. 1912년 아마추어 과학자인 찰스 도슨은 영국 필트다운에서 사람과 유인원의 특징을 함께 가진 두개골은 발견했다. 또 영국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은 세계 최고의 제국을 이루고 있던 영국 국민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후에 필트다운인은 인간의 두개골에다 유인원의 턱을 결합시킨 조작품임이 판명됐다.
인류의 고향은 아프리카
1924년 레이몬드 다트(1893-1988)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위트워터스랜드대학에서 해부학 강의를 했다. 그는 강의 동중 한 여학생으로부터 비비(건조한 땅 위에서 살도록 적응된 큰 원숭이)의 화석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래서 가져와보라고 부탁했는데, 얼마 후 석회암 조각이 잔뜩 담긴 두 개의 큰 상자가 도착했다.
석회암에 박힌 화석들을 보고 다트는 해부학적 직감을 통해 비비의 두개골치고는 너무 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비비보다 유인원이 지능도 높고 두뇌도 크다는 생각을 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에선 그때까지 유인원 화석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살지 않는 유인원의 조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다트는 석회암으로부터 조심스럽게 화석을 떼어낸 후 또 한번 놀랐다. 그것은 6살 먹은 아이의 두개골이었기 때문이다. 결코 비비의 것이 아니었다. 비비는 중둥이가 길고 머리 꼭대기가 아주 낮은데 이 화석의 두개골은 높고 둥굴었다. 그러나 두개골이 낮고 턱이 튀어나와 있어 사람보다는 침팬지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이를 '타웅의 아이'라고 불렀다. 타웅의 아이는 유인원의 특징인 날카로운 송곳니와 치극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타웅의 아이는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최초의 인류 화석이다. 이것은 다윈이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예언을 입증한 것이기도 했다. 타웅의 아이는 후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라는 학명을 갖게 됐다. 이는 '아프리카 남쪽유인원'이란 뜻으로 2백만년 전-3백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트는 아프리카누스를 발견한 후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와 다른점은 무지비한 살륙자라는 점이다. 이들은 살아 있는 것들을 폭력적으로 사냥해서 처죽이고, 시체를 갈기갈리 찢어서 피로 갈증을 채우고 몸부림치는 살들을 탐욕스럽게 뜯어 먹었다." 문득 동생을 처죽인 카인이 떠오른다.
타웅의 아이가 발견된 후 1938년 스코틀랜드 의사인 로버트브룸(1866-1951)이 2백만년 전-1백50만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스투스를 발견함으로써 화려한 아프리카 시대가 개막됐다. 이는 다시 리키가족과 요한슨 등에 의해 계승됐다.
행운을 몰고 다닌 요한슨
고인류학자 중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도널드 요한슨이다. 그는 평생 쫓아다녀도 얻기 어려운 화석을 줄줄이 발견했다. 그의 대표작인 '루시'는 3백20만년 전에 살았던 인류 최초의 여성이다.
요한슨은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 밑에서 1943년 태어났다. 이발사였던 아버지는 두살 때 죽었다. 그후 인류학자인 폴 레서라는 대부를 만났다. 자식이 없던 대부는 그를 무척 귀여워했고, 인류학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시카고대학 대학원에서 클라크 하웰이라는 유명한 인류학자로부터 사사했다. 특히 스승이 가지고 있던 유인원 이빨에 관한 지식을 고스란히 배웠다. 이빨은 누구의 것이며,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먹었는지 등 많은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고인류학 연구에서는 매우 중요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대학원생이었던 그는 어렵게 후원금을 받아 에티오피아 하다르에서 인류화석 발굴에 나섰다. 루시가 나타난 것은 돈이 떨어져 발굴을 포기하고 돌아가야할 때 쯤이었다. 그런데 그가 늘상 입버릇처럼 말하던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루시는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 화석 중 가장 완벽한 것이었다. 나이는 25세, 성(gender)은 여자. 키는 약 1백7cm, 몸무게는 28kg, 관절염을 앓았다는 점 등 이처럼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지금도 찾기 어려울 정도다. 루시의 무릎뼈는 인류가 두 발 걷기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줬다. 루시라는 이름은 발견 당시 라디오에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라는 비틀즈의 노래가 흘러나와 붙인 이름이다.
요한슨은 루시의 발견으로 무명의 대학원생에서 스타로 도약했다. 루시는 국립과학재단, 리키재단,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으로부터 많은 후원금을 받아주었다. 이를 가지고 그는 1975년 '인류 최초의 가족'을 발견헀다. 이것은 3백20만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화석으로 13명의 화석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성인이 9명, 어린이가 4명이었다. 1981년 요한슨은 여기저기서 4명이었다. 1981년 요한슨은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후원금으로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에 인간기원연구소를 설립하고, 예멘,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요르단, 탄자니아 등에서 인류화석을 발굴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1986년 탄자니아 올드바이에서 1백80만년 전의 호모 하빌리스를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는 1991년 '루시'(1996년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변역 출간)라는 책을 써서 미국과학저술상을 받기도 했다. 1994년PBS/NOVA 방송사가 요한슨과 함께 제작한 '인류 기원을 찾아서' 3부작은 전세계적으로 1억명이 넘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