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계획과 부실공사로 치닫던 고속전철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5조원에서 20조원으로 4배가 커진 민족사상 최대공사의 문제점을 쟁점별로 짚어봤다.
민족 최고의 명절인 설을 보내면서 올해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교통대란을 겪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승용차로 18시간. 평소에도 승용차로 7-8시간이 걸리는 것이 예사다. 그래서 ‘꿈의 고속철도’를 학수고대하는 것인지 모른다.
고속철도는 87년 노태우씨가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면서 구체화됐다. 89년 대통령령으로 고속철도추진위원회가 결성된 후, 90년 서울-부산간 노선 확정, 91년 노반설계 착수, 92년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발족 및 천안-대전(시험구간) 착공, 94년 프랑스의 GEC 알스톰사와 차량(테제베) 도입 계약, 96년 고속철도건설촉진법 제정 등으로 고속철도 대역사는 이어졌다.
그런데 고속철도 건설이 걷잡을 수 없이 궤도를 이탈하고 있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고 한다. ‘단군 이래 최대공사’라고 일컬어지는 고속철도의 허구를 쟁점별로 살펴보자.
1 쟁점
차량보다 노반 설계가 먼저 이뤄져
우리나라가 도입하는 고속철도 차량은 프랑스의 테제베(TGV). 그러나 테제베가 달려나갈 노반(철길)은 독일의 이체(ICE)를 기준으로 설계됐다. 그 결과 노반설계를 다시 해야 했다. 차량의 무게와 속도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모한 노반설계가 이뤄진 것은 차량을 계약하기 전 급하게 고속철도를 건설하려고 했던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테제베는 평야지대에 적합하고, 이체는 산악지대에 적합하다. 그래서 노반을 설계할 때 산악지대가 많은 우리나라에 이체가 선택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2 쟁점
어설픈 노선설계
우리나라 고속철도의 노선은 70%가 교량과 터널을 통과한다. 산악지대가 많기는 하지만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책상 위에 지도를 놓고 선을 그은 결과”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고속철도는 3백km/시의 속도로 달리는 최첨단 교통기술이다. 따라서 노선을 설계하려면 정밀한 항공촬영은 물론 현장측량과 지질조사 등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원칙을 무시했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고속철도가 폐광을 통과하는 경우다. 폐광을 통과하면 무너지거나 지하수가 흘러내릴 위험이 크다. 폐광이 발견된 상리터널의 경우 계획된 2천2백60m 중 2백98m를 파들어간 상태로 그동안 1백17억원이 투입됐다. 노선을 설계하고 터널을 뚫기 전에 이뤄져야 할 지질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고속철도 노선을 조사한 결과 자연동굴 1곳과 폐광 3곳이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불안감을 더하고 있다. 현재 건설공단은 이런 설계상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프랑스의 시트라사로부터 설계를 검증받고 있다. 결국 노선설계를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3 쟁점
건설현장 ‘개점 휴업중’
공사는 시작됐는데 수시로 설계도면이 바뀜에 따라 재시공되는 일이 잦다. 이 때문에 예산이 낭비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새로운 설계도면은 과연 제대로 된 것이냐” 하는 의구심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고속철도의 노반건설은 서울-천안 구간이 8.9%, 천안-대전 구간이 60%, 나머지 구간이 2.5% 정도 진행됐다. 전체적으로 보면 10%의 노반이 건설된 셈이다. 그러나 최근 설계와 노반건설이 전면적으로 재검토받고 있어 공사업체들은 일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
4 쟁점
국내기술 믿을 수 없다
정부의 욕심은 차량을 외국에 발주하더라도 노반만은 국내기술로 깔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속철도건설공단은 “설계도 부실했지만 시공도 설계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콘크리트 두께와 철근 간격이 일치하지 않고, 땅을 다지는 작업에서도 문제점이 속속 드러났기 때문. 공단직원이나 감리가 현장에 가지 않고 공정을 통과시켰던 것으로 공단의 자체 조사에서 확인됐다. 또한 10곳 중 7곳의 모래가 불합격제품이라는 사실은 충격을 더한다. 지난해 건설교통부가 적발한 부실사례만도 48건. 고속철도 건설업체 32개사 중 10개, 설계업체 13개사 중 3개사는 무경험업체라고 한다. 현재 천안-대전 사이의 시험구간은 미국의 WJE사로부터 안전진단을 받고 있다.
5 쟁점
테제베는 사고덩어리
96년 12월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해저터널에서 테제베 국제노선인 유로스타가 모터고장을 일으켜 4백69명의 승객들이 갇혔다. 또 1월 2일 볼렌느와 오랑쥬 사이에서 영하 10℃의 추위에 전차선이 얼어붙어 3만명의 발을 묶어놓았다. 93년 12월에는 테제베가 탈선했던 적도 있다.
유럽보다 기온변화가 심한 우리나라에서 테제베가 과연 안전하게 승객을 태울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고속철도건설공단측은 전차선이 얼지않도록 해빙시스템을 마련했다고 하지만, 프랑스국영철도(SNCF)는 전차선이 얼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6 쟁점
예상속도 크게 못미쳐
고속철도는 평균 3백-3백50km/시로 달릴 것이라고 홍보돼 왔다. 이 정도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노선설계와 노반설계의 잘못으로 2백km/시 밖에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만약 새마을호보다 조금 빠른 정도라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굳이 고속철도를 건설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7 쟁점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건설비용
노선설계 잘못과 부실공사, 그리고 쏟아지는 민원 때문에 고속철도 건설비용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4배 가량 증가했다. 90년 발표된 건설비용은 5조8천억원, 그러나 93년 10조7천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그런데 최근 보고된 건설비용은 18조6천억원.
건설 기간 역시 비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90년에는 98년에 완공할 것이라고 희망을 불어넣더니, 93년에는 21세기가 시작되는 2001년에 고속철도를 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2005년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고속철도건설공단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그러나 약 20조원을 들여 2005년에 고속철도가 운행될지는 미지수다.
8 쟁점
민원을 법으로 눌러
고속철도를 건설하는데 건설교통부와 건설공단을 가장 괴롭힌 것은 사실상 민원문제다. 노선을 선정할 때도, 토지를 수용할 때도 민원은 줄기차게 따라붙었다. 그나마 지방자치단체마저 선뜻 협조해주지 않고 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고속철도건설촉진법. 이 법은 고속전철 건설사업이 지방자치단체나 지역주민과 마찰이 일 경우 고속전철 건설추진위원회가 조정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입법예고 과정에서 서울시 등 자치단체와 시민단체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고속전철건설촉진법은 지난해 12월 노동법과 더불어 날치기로 통과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