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세계적으로 가장 공룡밀도가 높았던 공룡낙원이었다고 한다. 어떤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일까. 또 세계 최대 공룡인 한외룡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살았던 공룡들을 알아보자.
백악기 한반도 전역에서는 다양한 공룡이 득실거렸다. 그들은 아름드리 목본성 양치류 초원과, 소철, 은행, 송백류 등 나자식물들이 여기저기 자라는 평원을 낙원으로 삼아 살았음이 밝혀졌다. 1억년 전의 한반도는 현재 맹수들이 뛰어다니는 아프리카의 사반나초원 그대로였다.
당시 하늘에는 거대한 익룡이 날았다. 또 도요새, 물갈퀴새 등의 물새들은 물가에서 거대한 공룡의 등을 타면서 공생했을 것이다. 크고 작은 잠자리들은 먹히지 않기 위해 새들과 익룡으로부터 쫓겨 다녔다. 평화로운 초원 여기저기에서는 육식공룡에 의해 살육되는 초식공룡들의 비명이 고요한 하늘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다. 초식공룡이 살육됐던 현장은 발자국화석으로 증명되기도 한다. 하천일대의 거대한 호수에는 어룡류, 다양한 경골어류, 거북 등이 생태계의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세계 최대의 탑리 한외룡
공룡이 인류의 눈에 처음 발견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백10년 전의 일이다. 1787년 카스파 위스타 박사는 미국의 뉴저지에서 처음으로 공룡의 골격(뼈)화석을 발견했다. 영국의사 기디온 만텔부부가 이구아나룡 골격화석을 발견한 것은 이보다 35년 뒤인 1822년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3년 1월 20일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에서 필자가 처음으로 공룡의 골격화석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실은 서울대 정창희교수(층서고생물학)에 의해 당시 확인됐고, 서울대 김봉균교수, 고려대 김형식교수, 강원대 박수인교수가 잘 알고 있다. 또한 서울대 의대의 장상요교수는 골조직학적으로 검증해 주었다.
1973년 의성에서 발견된 한국 최초의 공룡화석은 공룡의 팔꿈치뼈(자골)였다. 공룡의 이름은 ‘탑리 한외룡’(Ultrasarustabri-ensis)이라고 명명됐다. 이와 같은 발견은 1983년 와이오밍대학에서 개최된 척추고생물학회 제43차 총회에서 발표됐다. 또 탑리 한외룡은 세계 최대급 공룡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미국 ‘척추고생물학회’(SVP)에 소개됐을 뿐 아니라 ‘공룡 데이터북’에도 그림과 함께 실려있다. 이때 육식공룡인 ‘한국 발톱룡’(Deinonychusko-reanensis)도 함께 발표됐다. 이는 대퇴골에 기초해 명명된 것이다. 발톱룡(데이노니쿠스)은 세계적으로 예일대학교에 2필, 하버드대학교에 1필이 발굴돼 있다. 필자가 발굴한 한국 발톱룡은 네 번째에 해당한다.
최소의 선으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그려냈을 때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공룡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뼈가 화석으로 굳은 돌조각으로부터 완벽한 모양을 갖춘 공룡을 복원해내는 일은 매우 매력 있는 일이다. 마치 인공위성이 우주를 정복하듯 말이다.
탑리 한외룡은 팔꿈치뼈뿐 아니라 척추돌기, 척추추체(척추 중심에 있는 뼈), 갈비뼈 화석, 그리고 발자국(足印)화석이 추가로 발견됨으로써 복원의 신뢰도를 더욱 높여주었다. 이 공룡은 분류학상 공룡강 용반목 용각아목 팔룡과에 속한다.
울트라사우루스는 필자가 세계 최초로 공식적으로 명명한 이름이다. 울트라사우루스 탑리엔시스는 ‘탑리 한외룡’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공룡이름은 모두 저마다의 한글 명칭을 갖고 있다. 인간을 호모(Ho-mo)라 하지 않고 ‘사람’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1993년 자연사환경학회는 공룡의 한글 명칭을 제정한 바 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폭군룡, 트리케라톱스는 세뿔룡, 스테고사우루스는 판룡, 사우로포다는 용각룡, 프테로사우리아는 익룡, 오비랍토르는 알도적룡 등 1백4개의 이름들이다.
의성에서 처음 발견한 이후 현재까지 공룡골격화석이 산출된 곳은 8개소로 알려졌다. 북한의 경우 평북에서 공룡골격화석이 80년대에 발굴됐다고 한다(북한 지질조사소 소장). 골격화석으로부터 알 수 있는 우리나라 공룡은 팔룡(브라키오사우루스), 골방룡(카마라사우루스), 한외룡, 발톱룡 등 4속 수종 뿐이다.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공룡의 종류는 약 4백종인데, 중국학자들은 8백여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흑인·황인·백인 합쳐 우리 인간이 하나의 종이므로 공룡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공룡 완전 복원의 꿈
우리나라의 공룡발굴은 아직까지 거의 초보단계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는 공룡화석이 많이 발굴되는 미국, 중국, 캐나다와 달리 사막이 없고 수풀이 지표면을 뒤덮고 있어 공룡화석 발견이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노력하기에 따라 완전한 공룡뼈 전체를 발굴할 가능성이 90% 이상으로 매우 희망적이다. 공룡화석을 잘 찾는 전문가는 땅속 공룡화석을 냄새맡듯 잘 찾아낸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한다.
공룡시대에 한반도는 아열대 사반나 기후 지역에 속해 있었다. 강우량도 약 1천5백mm에 달했다. 당시 한반도 일대에서는 화산분출·지진·홍수 등과 같은 급격한 자연재해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한반도 공룡이 대량 멸종한 경우가 흔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룡은 육상 동물이기 때문에 사체가 주로 산화 환경에 노출되어 화석화작용을 받기 전에 부패로 없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이다. 현재 발견되는 뼈화석은 주로 물속과 같은 환원환경에 매장되어 있던 골격들로 생각된다. 산성수가 뼈를 녹여내면 뼈물질은 사라지고 그 구멍에 탄산칼슘이나 규산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캐스트(주물화석)들이 한반도에서 주로 산출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토면적에 비해 공룡화석이 산출되는 빈도가 세계 최고다. 특히 발자국화석이 많이 발견된다. 한외룡(울트라사우루스)의 발자국은 그 지름이 1.5m 이상에 달해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1.2m보다 30cm가 더 길다. 의성(천연기념물 지정), 대구, 경산, 경주, 울산, 고성, 함안, 창원, 거제도, 통영 등 경상남북도 55개소, 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1개소, 황해북도 평산군 용궁리 1개소 등지에서 총 6천5백여개의 발자국화석이 확인됐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가 중생대 백악기 시대에 세계 최대로 공룡이 번성했음을 입증한다.
발자국으로 밝혀진 공룡을 보면 발굽 한외룡(족인명: Ultrasauripus ungulatus), 이구아나룡의 일종인 발톱 고성룡(족인명: Koseongsauripus onychion), 골방룡의 일종인 계란 함안룡(족인명: Hamanosau-ripus ovalis), 그리고 육식공룡으로서 큰룡(족인명: Megalosauropus)과 알도적룡 등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규명된 공룡은 10종 이상이다.
공룡의 최번성기는 백악기
길이 22m, 높이 7m에 달하는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공룡화석이 1986년 필자의 추진으로 용인자연농원에 전시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되지 않았던 때였다. 결국 이 중국공룡전은 그로부터 3년 후 이뤄진 한·중수교의 문화외교가 된 셈이다. 이때 전시된 것은 마멘키룡이라고 불리는 공룡이었다. 한국 의성의 한외룡은 40m, 높이 20m에 달해 이보다 2배 이상 크다. 마멘키룡에 비해 자뼈, 갈비뼈, 견갑골(어깨뼈), 발자국이 배나 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쥐라기 공룡은 한국의 백악기 울트라룡에 비하면 새끼 크기일 뿐이다.
그동안 세계적으로 쥐라기에 공룡이 가장 번성하고 최대 크기의 지질시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한국 공룡의 연구 결과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한국 공룡의 골격과 발자국 연구 결과는 공룡이 최대 크기와 최번성기를 누렸던 것은 쥐라기가 아닌 백악기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몽고 고비사막에서 발굴된 팔의 길이 3m인 최대형 육식공룡 손룡(데이노케이루스)과 폭군룡(티라노사우루스)의 지질시대가 후기 백악기임은 필자의 학설과 잘 부합된다. 따라서 최대형 육식공룡이 생존한 시대에 최대형 초식 용각룡이 번성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최대급 공룡화석이 한국의 백악기 지층에서 산출되었기 때문에 새롭게 증명된 셈이다.
위와 같은 사실은 진화의 법칙에도 잘 부합된다. 생물의 진화는 되돌아가지 않는 법칙. 토끼만한 공룡에서 대형 빌딩 크기로 계속 체구가 거대화된다. 만약 이러한 법칙을 따르다가 급격한 환경 변화를 맞이하면 어떻게 될까.
중생대의 공룡들은 무공해 식품이 즐비했던 대자연에 적응해서 계속적으로 체구를 키워왔다. 하지만 1억년을 주기로 찾아오는 소행성의 지구 충돌로 자연환경이 급격히 바뀌면서 다시 소형 공룡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약6천5백만년전의 일이다. 앞으로 3천5백만년 후에는 새로운 소행성이 찾아와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그때까지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의 체구를 빌딩 높이까지 계속 키우게 될 것이다.
한국 공룡 누가 처음 발견했나
과학동아는 96년 8월 특집 '되살아나는 공룡'에서 "72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경북대 양승영교수가 경남하동에서 공룡 알껍데기를 발견했다"고 게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최근 부산대 김항묵교수가 "한국 최초로 공룡화석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라며 반론을 제기해 그 진상을 알아봤다.
김항묵교수는 "73년 1월 20일 경북 의성에서 공룡의 골격화석을 발견해 양승영교수보다 7개월이 앞섰다"고 말한다. 양교수가 경북대학보 77년 9월 5일자에서 "본인은 73년 8월 공룡 알화석을 발견했으며, …공룡화석 잧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부산대의 김항묵교수"라고 쓴 바 있다고 김교수는 지적한다.
한편 양승영교수는 "76년 2월 '주간한국'에 한국 최초로 공룡화석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이어 3월 대한지질학회에 보고할 때까지 김교수의 발견사실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뒤늦게 먼저 발견했다고 하는 김교수의 주장은 말이 안된다는 입장이다.
발표시점이냐 발견시점이냐
결국 논쟁의 실마리는 발표시점과 발견시점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로 모아진다. 그래서 학계의 입장을 정확하게 듣기 위해 대한지질학회에 문의했다. 서울대 지질학과 최덕근교수는 "지질학회에선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에 대해 공식입장을 밝힐 수 없다"면서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발견시점보다는 발표 시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만약 발표시점을 무시한다면 언제든지 발견 시점을 앞당겨 뒤늦게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최덕근교수의 말대로라면 먼저 발표한 양승영교수가 우리나라 최초의 공룡화석 발견자가 된다. 그렇지만 "먼저 발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는데, 이를 고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김항묵교수는 반박한다.
이에 대해 양승영교수는 "경북대학보에 게재된 발견시점(73년 8월)은 오기(誤記)"라며, 과학동아에 게재한 바와 같이 공룡알화석을 발견한 것은 72년 8월이라고 새롭게 맞대응했다. 만약 이 사실이 입증이 된다면 양승영교수가 한국 최초의 발견자라는 것은 더이상 논란이 될 수 없다. 그래서 76년 2월22일자 주간한국을 확인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룡의 알겁질화석과 파충류의 이빨화석이 발견돼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이 공룡의 알껍질은 지난 74년 8월 경북대 양승영교수가 경남 하동군 금남면에서 발견했다.…동양에서는 19세기 말에 미국학술조사단이 몽고에서 공룡의 화석과 원형의 알을 발견한데 이어 두번째로 발견한 것이다."
주간한국에 따르면 양승영교수는 74년 8월에 공룡알화석을 발견헀다. 하지만 양교수는 "주간한국에 발표된 내용은 발견시점이 너무 오래됐다는 기자의 요구에 따라 늦춘 것이고, 경북대학보의 기사는 73년에 외국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오기라는 사시링 분명하다"고 말한다. 결국 72년 8월에 발견한 것이 가장 정확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김항묵교수의 발견 시점은 옳은 것인가. 양승영교수는 경북대학보(77년 9월5일)에서 "김쇼수가 대학원생이었을 때 의성에서 공룡화석을 발견했지만, 연구지도를 맡고 있던 서울대 정창희교수가 발굴여건이 구비될 때까지 덮어두라고 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정창희교수는 "김교수로부터 보고를 받은 후 현장에 내려가 확인한 바 있다"면서, "김교수에게 발표를 미루도록 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당시의 상황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김항묵교수의 발표는 78년 청와대에 제출한 '한국공룡의 다목적 개발을 위한 청원서'가 처음이다.
과연 누구를 한국 최초의 공룡화석 발견자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결론은 학계에서 내려야 한다. 다만 결론이 내려질 때가지 과학동아는 발표시점을 존중해 "한국 공룡화석은 76년 2월 경북대 양승영교수에 의해 발표된 것이 처음"이고 기술할 예정이다.(홍대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