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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밤의 실험실 [이한음 저, 1997년 2월호]

위대한 과학적 발견 뒤에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힘겨운 노력이 숨어있다. 과학에 대한 접근방법 중 하나는 바로 과학자들이 연구와 일상생활에서 겪는 갈등과 고민을 이해하는 일이다. '과학동아'는 이번호부터 과학을 소재로 한 콩트를 연재한다. 과학자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잔잔하고 재치있게 엮어낸 젊은 문필가와 함께 과학의 또다른 현실을 느껴보자.

밤1시 분자생물학 실험실에는 불이 환하게 켜 있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고 바람때문에 가끔 창문이 흔들거렸다. 실험실 곳곳에서는 기기들이 윙윙거렸고 한쪽 구석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우는 실험대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시끄러워야 집중이 더 잘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입고 있는 실험복은 시약이 여기저기 묻어 지저분했다. 현우는 그것이 실험의 연륜을 가리킨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DNA를 겔 위에 옮겼다. 겔 한쪽 직사각형으로 파인 홈에 마지막 DNA를 넣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이제 몇시간 동안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전기난로에 손을 뻗었다. 이것이 마지막 실험이라고 생각하자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이제 곧 저명한 잡지에 자기 논문이 발표될 거라고 상상하자, 온몸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복사해 둔 논문을 펼쳤다. 투고할 논문을 어떤 형식으로 쓸 것이진 미리 파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지겨워졌다. 염기 서열만이 나열된 논문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 동안 실험에 매달리는 바람에 거의 논문을 읽지 않았던 것이다.

논문을 덮고 기지개를 펴자, 배가 고파왔다. 그는 전기히터에 물을 올려놓았다. 인터넷으로 논문을 검색하고 있자 물이 끓기 시작했다. 실험실의 전통에 따라 스프를 먼저 넣고 잠시 기다렸다.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그때 옆 실험실의 병하가 귀신같이 나타났다.

"혼자 먹지, 뭘 부르고 그래."

"헛소리마. 아직 넣지도 않았어"

현우는 물을 더 부어야 했다. 이어 다른 실험실에 있는 혜란이가 들어왔다.

"맛있는 냄새가 날 부르는구나."

"아직 넣지도 않았다니깐!"

기온이 떨어지는 바람에 이번 주는 세명만이 밤샘 실험을 하고 있었다. 병하와 혜란은 현우가 라면 끓이는 시간을 정확히 아록 찾아오곤 했다.

"실험 잘돼?"

병하가 걱정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그럼.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다."

현우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병하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 봤어? 형 하는 실험과 같던데?"
뭐? 정말이야?"

현우는 깜짝 놀랐다. 그는 세포 분열을 조절하는 유전자를 연구하고 있었다. 세포 분열은 노화나 암과 관련이 깊다. 노화는 더이상 세포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현상과 관련이 있고, 암은 세포가 몸의 통제를 벗어나 임의로 분열하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이 중요한 과제에 연구자들이 몰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현우는 갑자기 침울해졌다. 혜란과 병하는 서로 눈짓을 하며 라면을 넣었다. 현우는 창가로 갔다. 그는 멍하니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다니.

실험이 헛고생으로 끝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멘델은 10년 넘게 완두 교배 실험을 한 끝에 유전법칙을 이끌어냈고, 다윈도 20년 넘게 진화론을 생각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건 인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내만으로 업적을 이루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멘델의 경쟁자는 30년 후에, 다윈의 경쟁자는 20년 후에나 나타났다. DNA 구조를 밝히려고 덤벼든 경쟁자는 단 몇사람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연구 과제에 수백, 수천명이 달려든다. 누군가 먼저 실험을 끝내고 결과를 발표하면 다른 사람들은 시간 낭비를 한 꼴이 되어버린다. 이제 현우도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이다.

"어쩌지? 노벨상 경쟁자 하나 줄어들겠어."

혜란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농담을 했지만, 현우의 허탈감은 가시지 않았다. 병하가 말했다.

"형. 그럴 수도 있지 뭘. 라면이나 먹어. 먹기 위해 사는 거 아니겠어."

둘은 후루룩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현우는 완전히 식욕을 잃어버렸다. 대신 자기가 이 실험을 왜 선택했는지 너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인간 유전자 지도를 작성한다는 게 거창해 보여서 그랬겠지. 유전자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게 얼마나 지겨운 일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는 지금까지 몇번이나 실험에 실패했는지 따져보았다. 그걸 생각하면 고생한 게 너무 억울했다.

"형, 노벨상은 다음에 타고, 일단 먹어."

"너 같이 어영부영해서 어디 노벨상 타겠니?"

병하가 말하자 혜란이 즉시 대꾸했다. 현우는 심란하다는 투로 말했다.

"너희나, 많이 타라. 나처럼 소탈한 사람은 그런 거 줘도 안받는다."

"거봐. 굶으니까 헛소리가 나오잖아."

둘은 현우의 심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현우는 인상을 썼다.

'이것들이. 자기들 실험 잘 안될 때는 심각하게 토론하자고 하더니. 내가 갑갑할 때는 웃고 떠들어?'

라면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둘은 커피까지 끓여마셨다. 현우도 홧김에 마셨다. 빈속에 커피가 들어가자 배가 아팠다. 밤샘 실험을 오래하면 위장병밖에 남는 게 없다는 말이 맞다고 현우는 생각했다. 혜란이 입을 열었다.

"이 커피잔으로 커피 마시는 거 참 웃기지 않아요? 비커는 비눗물에 삶고 증류수로 몇 번씩 행구지만, 이건 물로 대충 씻잖아요. 깨끗한 비커는 고이 모셔두고 세균이 득실거리는 걸로 마시다니."

"뭐 어때. 어차피 우리 몸에 기생하는 세균 수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어? 걔들도 먹고 살아야지."

병하가 세균과 공생하자는 투로 대꾸했다. 현우는 말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분위기를 돋우려고 애쓰는 후배들이 가상해서 참견했다.

"먹어 둬. 다 피와 살이 되니까. 채식주의자가 왜 영양불균형으로 죽지 않는 줄 아니? 채소에 붙은 곤충알, 세균 같은 걸 함께 먹으니까 그런 거야."

혜란이 병하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현우는 잠깐 일어서서 실험하던 것을 살펴 보았다. 실험은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우는 헛고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하던 실험이니 계속하기로 작정했다.

"실험하기도 정말 지겨워. 결과가 제대로 나와야 신이라도 나지."

혜란은 기지개를 펴며 정말 지겨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결과가 쉽게 나오는 실험을 했어야지. 날 봐. 일주일마다 결과가 팍팍 나오잖아. 쓸모 있는 게 거의 없어서 그렇지만."

"그게 너의 한계야."

혜란이 이죽거렸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실험하다보면 왜 이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이런 시가 있지. 이 실험은 너를 위하여. 또 한 실험은 나를 위하여, 그리고 나머지 실험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잘났다. 그런데 왜 실험은 그 모양인감?"

"그저 운이 나쁠 뿐이지."

"맞아, 형도 운이 나쁜가봐. 제멜바이스처럼."

"그게 누군데?"

혜란이 물었다.

"그는 소독법을 주장한 의사야. 19세기 중엽까지는 의사들이 손을 소독하지 않고 환자를 다루었어. 산부인과 의사도 그랬어. 그래서 많은 임산부들이 산욕열로 사망했지. 그는 산부인과 의사였는데, 의사들이 손을 안씻어서 그렇다고 추측하고, 사람들에게 염소용액으로 손을 소독하도록 조치했어. 그러자 사망률이 크게 낮아졌지. 그는 자신의 연구를 발표했어. 그러자 웬걸. 의사들이 그를 미친 인간으로 취급한 거야. 손 한번 닦는다고 사망률이 낮아진다는 건 제정신이 박힌 의사가 할 말이 아니라는 거였지. 그는 괴로워했어. 자기 말대로 하면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데 말이야. 나중에 그는 병원에서 쫓겨나 딴 나라의 병원으로 갔지. 하지만 울화 때문에 정신병 증세를 나타나는 등 점점 폐인이 되어갔어. 그러다가 지쳤는지 어느날 그는 시체를 막 해부 했던 칼을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어. 당연히 상처가 생겼고. 상처는 세균에 감염되었지. 결국 그는 자기가 막으려 애썼던 그 병으로 사망했어. 나 같은 천재의 불우한 일생이었지."

"잘났어. 차라리 안듣는 게 낫다니까."

"듣고 나서 딴소리야. 자 가서 실험해야지."

"나도. 형, 잠자다 실험 망치지 말고 열심히 해요."

"망치길 뭘 망쳐. 이미 끝난 실험인데."

현우가 투덜거리자 병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진담한 줄 아네? 농담이었어. '사이언스'읽을 시간이 어딨어? 실험하기도 바쁜데. 라면이 두개밖에 없더라구."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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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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